[사람들] 28년째 만화영화 주제곡 부르는 '소녀가수'
 

네티즌 선정 최고 만화영화 가수 정여진씨

[조선일보 김태훈 기자] ‘개구리 소년, 개구리 소년, 네가 울면 무지개 연못에 비가 온단다~.’

20년 전, TV 만화영화 ‘개구리 왕눈이’를 즐겨 봤던 당시의 꼬마 팬들에게 그 노래의 멜로디와 앳된 소녀 가수의 목소리는 여전히 기억 속에 생생하다. 그때 그 노래를 따라 불렀던 코흘리개들은 이제 더 이상 만화영화 노래를 따라하지 않겠지만, 그때 그 노래를 부른 가수는 지금도 여전히 만화영화 주제가를 부르고 있다. 정여진(32)씨가 그 사람이다.

정씨는 최근 인터넷 웹사이트 ‘만화인의 노래’(www.manhwain.com)가 네티즌을 상대로 실시한 온라인 투표에서 한국 최고의 만화영화 주제가 가수로 뽑혔다. 이번 조사는 특히 지난 2년간 발표된 만화영화 주제가만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에서 그녀의 세월을 뛰어넘는 파워를 실감케 한다. 올드팬들이 기억하는 만화영화 주제가들이 빠졌지만, 대신 ‘수호요정 미셸’ ‘디지몬 테이머즈’ ‘꽃보다 남자’ ‘이누야샤’ 등 요즘 어린이들이 즐겨보는 만화의 주제가 등으로 당당히 1등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인터넷에는 ‘여진천하’라는 그녀의 팬 사이트도 만들어졌다. ‘개구리 소년’을 기억하던 30대 팬이 만들었지만 그녀의 최신곡을 좋아하는 10대들까지 가세해 활동하고 있다.

“1976년부터 노래를 불렀으니 2년 후면 가수 경력 30년이 되네요.”

11일 오후 서울 강남의 한 음악 스튜디오에서 만난 정씨에게 그간 몇 곡이나 불렀느냐고 물었다. “글쎄요. 워낙 많이 불러서 잘 몰라요. 그보다 몇 년생이세요? 묻는 사람의 나이를 알면 그 사람이 들었을 시기의 제 노래 제목을 말해줄 수 있죠.”

30대 중반이라 했더니, ‘요술공주 밍키’ ‘돌아온 아톰’ ‘빨강머리 앤’을 불렀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건 TV 만화영화였고요, 극장용도 꽤 있죠.” 이어 ‘태권동자 마루치’ ‘똘이장군’ ‘타임머신 001’ 등의 영화 제목이 그녀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런 정씨이지만 한동안 마이크를 놓았던 시기도 있다. “중3 때 아빠가 돌아가신 뒤 노래를 그만뒀어요.” 정씨는 만 네 살에 아버지(작곡가 정민섭씨)의 손에 이끌려 노래를 시작했다. 그녀가 좋아해 불렀다기보다는 아버지가 그녀에게 노래를 시켰던 시절이다. 정씨의 아버지는 ‘대머리총각’ ‘곡예사의 첫사랑’ 등 가요는 물론, 수많은 만화영화 주제가와 영화음악을 만들었던 당대 최고의 작곡가.

정씨가 다시 마이크 앞에 선 것은 서울예대 실용음악과 2학년 재학 중이던 1993년. “이번에는 내 의지로 다시 노래를 부르기로 결심했어요. 아빠가 보여준 길이지만, 저도 노래를 사랑했나 봐요.” 그 사이 만화영화 주제가의 분위기가 바뀌어 있었다. “전에는 동요에 더 가까웠는데 지금은 유행가 비슷해졌어요.”

그 후 10년간 그녀는 만화영화 주제가뿐 아니라 CM 분야에서도 최고의 가수로 활동해 왔다. 정씨는 “무대에 서는 것은 체질에 맞지 않기도 해서 오직 목소리로만 승부해왔다”며 “팬들이 내 목소리를 원하는 한 노래 부르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선일보 김태훈기자 scoop87@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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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를 번역하며 살아가는 파트너…양억관·김난주 부부
요즘 출판가에는 일본의 부부 작가 츠지 히토나리와 에쿠니 가오리가 번갈아가며 써내려간 릴레이 러브 스토리 ‘냉정과 열정 사이’가 단연 화제다. 12월 들어 소설 3위,스테디셀러 1위의 자리를 지키면서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는 이 소설은 베테랑 부부 번역가인 양억관(47),김난주(45)씨의 공동 번역으로 더욱 관심을 모았다. 경기도 고양시 화정동에 살고 있는 양씨 부부를 찾아갔을 때 거실이며 방에 책으로 빼곡했다.

“억관씨가 6개월 전 일산쪽에 오피스텔을 마련,독립하기 전까지만 해도 한 지붕 아래서 번역 일을 했지요.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에게는 서로의 번역일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지요. 하지만 가끔 외부에서 전화를 걸어와 ‘사전 좀 찾아주라’는 정도의 요청은 들어주고 있는 편입니다.”(김난주)

“아다시피 일어는 한자 읽기가 가장 어렵지요. 어쩌다 전화를 하면 ‘지난 번에도 가르쳐 줬잖아’하고 좀 까다롭게 굴기도 해요.”(양억관)

그러니 이제 집은 안방 마님의 집필실이다. “솔직히 제가 번역가라는 사실을 인식한 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92년도에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번역일에 뛰어들 때만 해도 전문번역가라는 인식이 전혀 없었거든요.”(김난주)

부부는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선후배 사이로 뒤늦게 일어 전문번역가로 변신한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양씨가 군에 갔을 때 김씨가 대학에 다녔으니 재학 중에는 서로를 잘 알지 못하다 대학원에 진학해서야 서로를 알게 됐다. “집사람이 저보다 한 해 이른 1984년도에 유학을 갔는데 도쿄에서 재회해 5년만에 결혼했지요. 현해탄을 건너가서야 비로소 눈을 맞췄다고나 할까요.”(양억관)

얼마전 지인들로부터 “그동안 번역한 책들을 따로 정리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듣고 들여놓은 서가엔 350권의 책으로 가득차 있었다. 양씨는 만화,건축 분야에서부터 지리학,철학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200권 가까운 일서를 번역했고,김씨는 150권 가까운 번역서 가운데 90%가 문학 관련 도서다.

“우리나라는 번역가라는 직업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매우 낮은 편이죠. 하지만 선진국에 비해 인구도 적고 국력도 떨어지는 우리 실정에서는 인문학,과학할 것 없이 모든 분야에서 번역이 많이 되어야 합니다. 10년전만 해도 번역은 대학교수의 부업 정도로 여겼었죠.”(김난주)

불쑥 번역이란 무엇이냐고 물었다. “한마디로 종합격투기가 아닐까요. 철학서는 의당 철학 전공자가 번역해야 하지만 일단 일을 맡으면 전공자 못지 않게 수많은 문헌을 참고해야 하는 이중고를 겪곤 합니다.(양억관)

“일어는 한국어에 비해 매우 폭이 넓은 언어예요. 가다카나,히라카나에 한자까지 병행하고 있잖아요. 이것은 일어가 표음과 표의문자적인 세계를 둘 다 추구한다고 볼 수 있죠. 일어는 그 의미 공간이 매우 복잡하면서도 자유로운 언어입니다. 그래서 문화가 더 풍성해 질 수 있는 것 같아요.(김난주)

‘키친’의 작가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을 좋아한다는 김씨는 바나나처럼 우리 문학이 세계적인 지평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점을 안타까워 했다.

“일본 소설을 번역,소개하는 입장이어서 우리 작가들에게 미안한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하지만 일본의 경우 장기 불황이 계속되자 거리의 부랑자를 소재로 한 소설이 나오기도 하는데 우리 작가들은 그런 사회적 현상을 빨리 포착하지 못하는 같더군요.”(김난주)

양씨가 말을 거들었다. “소설가 무라카미 류의 경우 오십이 넘은 나이인데도 젊은이들의 움직임을 수시로 체크하고 있지요. 필요하다면 화폐론부터 경제원론에 이르기까지 지금도 끊임없이 재충전을 하고 있지요. 작가에 비해 번역쟁이는 삶이 너무 단순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늘 마감에 쫓기는 시간 싸움을 해야하니까요. 한달에 한 권 이상을 번역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가 없는 것이죠. 그러니 매일 일을 할 수밖에 없어요. 생활의 단조로움이야말로 번역가의 가장 큰 직업적 스트레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애주가형인 양씨가 술을 벗삼아 무료한 일상의 탈출구를 찾는 반면 김씨의 스트레스 해소법은 경제적이다. “한 두 시간쯤 일을 하다가 지루하다 싶으면 빨래를 하거나 청소기를 돌리지요. 생활을 벗삼아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셈인데 이제는 억관씨에게 이 일을 좀 맡겼으면 합니다.”

양씨가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방법 말고 당신이 인세로 번역계약을 해서 대박을 터뜨리는 편이 더 빠를 것 같은데…”(웃음)

번역가의 가장 큰 고민은 일단 번역서가 출간되고 나면 그 책과 무관한 관계가 된다는 점이다. 책이 얼마를 팔리든 간에 일단 고료를 받는 것으로 그 책과의 관계가 사라지고 마는 것. 그러나 두 사람은 번역을 직업으로 선택한 데 후회는 없다. “번역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그 작가의 속이 들여다보이는 경우가 있어요. 저희 부부도 그런 관계라고나 할까요.” 그들은 서로를 번역하며 살아가는 부부였다. 문득 서로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이 소설 ‘냉정과 열정 사이’의 남녀 주인공인 쥰세이와 아오리를 닮은 듯 했다.

정철훈기자 chjung@kmib.co.kr

http://www3.kmib.co.kr/gisa/gisa_view.asp?code=13110000&arcid=0919258380.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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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 같은 딸…재즈의 길 同行…이정식·이발차 부녀
재즈 색소폰 연주자 이정식(43)은 올해 초 자신이 이끄는 밴드 ‘서울재즈퀄텟’의 피아니스트로 큰 딸 이발차(22)를 맞아 들였다. 2년 전부터 가끔씩 아버지 공연에서 피아노를 쳤던 딸은 이제 아버지 밴드의 정식멤버가 됐다. 부녀가 한 밴드에서 연주하는 경우는 국내에서 유일하다.

‘이발차’란 이름이 참 독특하다고 했더니 이정식이 사연을 설명해줬다. “얘 증조할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인데 너무 촌스럽다고 해서 그동안 ‘이예숙’이란 예명을 써왔어요. 그러다가 얘가 연주자 생활을 시작하면서 이발차란 본명을 다시 쓰기 시작했죠. 아무래도 개성이 중요하니까요.”

나란히 옆에 앉으니 부녀는 오누이처럼 보였다. 이정식이 일찍 결혼한 탓에 부녀의 나이 차는 21년에 불과하다. 게다가 이정식의 차림이며 얼굴은 또래보다 젊은 편이었고,정장을 차려입은 딸은 꽤 성숙한 느낌을 줬다.

딸이 재즈 피아니스트로 나서면서 부녀는 재즈의 길을 함께 가게 됐다. 그러나 한 세대도 못되는 세월을 앞뒤로 재즈에 닿기까지 둘이 걸어온 길은 너무나 달랐다. 아버지가 자갈 가득한 길을 맨발로 걸어왔다면,딸은 잘 닦인 고속도로를 자동차로 달려왔다고 할까.

이정식은 중학교 때 브라스밴드에서 처음 색소폰을 입에 물었다. 그 후 색소폰은 이정식의 분신이 되었지만,이 악기로 밥을 먹기까지 험난한 세월을 견뎌내야 했다. “군악대를 거쳐 사회에 나온 20대 초반부터 밤무대 연주 생활을 시작했어요. 카바레는 물론이고 유랑극단,심지어 서커스단 아래서도 색소폰을 불었죠. 아마 나처럼 다양한 무대에서 공연한 사람도 드물껄요,허허허.”

20대 그 시절,이정식은 하루하루 먹고 살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유랑극단을 따라 전국 방방곡곡을 돌던 시절은 말 그대로 자장면 한 끼 먹으며 하루를 버텨야 했어요. 집사람과 갓 태어난 딸을 지방의 월셋방에 떼어놓고 다녔는데 나 먹을 것도 없던 시절이었으니까 집에 부쳐줄 돈이 있었겠어요? 애는 눈에 황달이 들고,마누라는 빈혈기가 돌았죠.”

아버지의 눈물겨운 고생담을 들은 딸의 반응은 뜻밖에도 “참 낭만적이예요”였다. “가끔 아버지로부터 옛날 얘기를 듣는데 그때마다 낭만적으로 느껴져요. 영화나 소설에 나오는 음악가들의 얘기 같잖아요. 사실 전 모든 게 너무 쉬웠어요. 배를 곯아본 적도 없구요. 그래서 그런지 아버지에 비해 음악에 대한 애착이 약하고 또 열심히 안하는 것 같아요.”

고생 고생하며 대중가요를 불던 이정식이 재즈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꿈을 찾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배 고프고 생활이 어렵다는 것보다 더 힘든 게 우리같은 ‘딴따라’들에게는 비전이 없다는 거였어요. 그 당시 연주자라고 하면 거의 밑바닥 인생 취급을 받았죠. 아무도 딸을 주려 하지지 않았고,어디 가서 음악 한다고 얘기하는 게 창피했어요.” 내일이 없는 삶을 이어가며 주변의 많은 연주인들은 술이나 여자에 빠져 인생을 소진했다. 젊은 이정식은 이대로 살 수 없다고 결심한다. “어차피 평생 딴따라로 살아갈 팔자라면 이 바닥에서 최고의 음악을 해보자고 결심했죠.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재즈였어요. 재즈를 하려고 하니까 주변에선 돈이 안된다며 다 말리더군요.”

오기로 시작해 독학으로 재즈를 공부한 아버지와 달리 딸은 어릴 때부터 집 안에 넘쳐나는 음반들을 들으며 자연스레 재즈를 익혔다. 집 안의 피아노는 어릴 적부터 그녀의 장난감이었다. 이발차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재즈를 한 번 배워보고 싶다”고 얘기했다. 그 말을 듣고 이정식은 무척 기뻤다고 한다. “다른 건 몰라도 재즈라면 내가 좀 힘이 돼 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이제 우리나라도 재즈한다고 굶어죽는 시절은 벗어났구요.”

이정식은 자신의 음악에 대해 ‘서민적’이라고 설명했다. 젊은 시절의 고생과 경험은 고스란히 그의 음악에 양분이 됐다. “다양한 경험들이 내 몸 안에 녹아 있어요. 그래서 내가 풀어내는 재즈는 사람들의 감정이나 회한에 맞닿을 수 있다고 봅니다. 거칠고 촌스럽기도 하지만 뚝배기 맛이 나는 재즈,난 그걸 ‘서민적 재즈’라고 부르고 싶어요.”

이정식을 곁에서 오래 지켜봐온 이발차는 아버지에게서 가장 배우고 싶은 것으로 열정을 꼽았다. “연주할 때 뿜어져 나오는 아버지의 열정적인 모습을 닮고 싶어요. 저는 아직 경험이 적어서 그런지 음악적 에너지가 부족하다고 느끼거든요. 그런데 그게 음악만으로는 되는 게 아닌가 봐요. 아버지는 늘 경험이 많고 생각이 깊어야 좋은 연주를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죠.”

국내 재즈계에서 이정식의 존재감은 결코 가볍지 않다. 지금까지 7장의 색소폰 연주음반을 낸 실력파 뮤지션,인기 재즈밴드 서울재즈퀄텟의 리더,5년이 넘게 수원여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음악 교수,국내 유일의 재즈 프로그램인 CBS ‘0시의 재즈’ 진행자. 이 모든 타이틀은 유학파들이 넘쳐나는 국내 재즈계에서 이정식이 독학으로 획득한 것이기에 더욱 돋보인다.

이정식을 아버지로 둔 덕에 이발차의 음악 인생은 남들보다 쉽게 출발했을 지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이름을 걸고 음악을 하겠다고 나선 이상,이정식이란 이름은 그녀에게 무엇보다 높은 장벽이다. “어딜 가나 ‘이정식의 딸’이란 꼬리표가 따라다녀요. 이정식의 딸이 아니라 재즈 피아니스트 이발차가 되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릴 지 몰라요.”

이정식은 요즘 해외 시장에 관심을 두고 있다. 최근 출반한 ‘원더풀 피스(Wonderful Peace)’의 해외 판로를 모색하는 한편 다음달 1일 LG아트센터에서 ‘아시안 스피리츠(Asian Spirits)’ 공연을 올린다. 이정식 주도로 일본,홍콩,말레이시아,싱가포르 연주자들이 참여한 ‘아시안 스피리츠’ 밴드는 아시아의 재즈를 세계에 알리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담고 아시아 각 국에서 공연일정을 잡고 있다.

이발차는 당분간 아버지 밴드에서 활동할 계획이다. 밴드에서 연주 경험을 쌓는 한편 내년 졸업 후에는 유학을 생각하고 있다. “앞으로 제 이름을 단 밴드를 만들 거예요. 그래서 연주와 함께 작곡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어요. 누가 알아요? 나중엔 제 팀이 아버지 밴드를 치고 올라갈 지,호호.”

김남중기자 njkim@kmib.co.kr

http://www.kmib.co.kr/html/kmview/2003/0922/09191543411311000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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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관객들도 우리말 재즈 좋아해요"
[속보, 기타] 2004년 02월 06일 (금) 21:12
[오마이뉴스 배성록 기자]
▲ 나윤선의 공연 모습
ⓒ2004 나윤선 사랑방
나윤선은 그야말로 어느 날 갑자기 ‘혜성처럼’ 우리 앞에 나타났다. 맨 처음 그녀를 본 것이 어느 방송국의 음악 프로그램에서였던가, 이 예쁜 언니의 결 고운 음성과 분방한 스캣과 능란한 무대 매너에 청중들은 너나없이 모두 빨려 들었다. 흡사 사이렌(siren)의 노래에 홀린 항해자처럼, 오르페우스의 연주에 감동한 하데스처럼 말이다.

그리고 어느새 나윤선은 대중과 언론의 주목을 한 몸에 받는 ‘드문’ 재즈 아티스트로 자리잡았다. 이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이전까지 한국 재즈는 ‘미모’의 ‘여성’이 부르는 ‘가요’와 ‘타협’한 ‘보컬’ 음악이 아니면 도무지 팔릴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윤선은 모든 매체로부터 고루 주목받으며, 대중과 평단과 마니아들에게 만장일치의 찬사를 받고 있는 것이다.

아, 물론 나윤선이 ‘미모’의 재즈 ‘보컬리스트’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녀의 음악은 결코 아무개처럼 가요(나쁜 의미!)와 타협하지도, 여피들의 밤 시간을 위한 무작(Muzak)으로 행세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녀의 음악은 어떤 면에서는 까다로운 편에 속하기까지 한다!

한국 재즈에 무언가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때마침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곽윤찬, 임미정 등의 음반을 생각해 보면 더더욱 그렇다. 요컨대, ‘새로운 세대’의 등장이다.

그래서 문득, 나윤선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가 궁금해졌다. 때마침 그녀의 두 번째 음반이 발매된 것을 핑계로, 그녀의 데뷔 이전과 음악 세계, 그리고 재즈에 관한 그녀의 이런저런 견해에 대해 질문해 보았다. 질문자의 짧은 지식 외에는 아무 것도 아쉬울 것이 없었다.

나윤선은 무대에서의 조리 있는 말솜씨 그대로, 꼼꼼하고 논리 정연하게 답변해 주었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린다. 아울러 나윤선님과의 사이에 다리를 놓아준 ‘나윤선 사랑방’의 운영자 최림님께도, 매니지먼트를 맡고 계신 박한별님께도 심심한 감사를 표한다.

- 학창 시절에는 어떤 학생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어떤 음악을 즐겨 들으셨는지도 말씀해 주시고요.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학생이었어요. 올드 팝, 샹송, 이문세, 양희은, 서태지와 아이들 등등 장르를 불문하고 골고루 즐겨 들었고요."

- 뮤지컬 배우로 활동하기 전에 주한 프랑스 대사관 주최 샹송 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하셨습니다. 어떤 곡으로 출전하셨나요? 그리고 나윤선님의 이 이전 경력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비슷한 시기의 활동 내역에 대해서도 간단히 언급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니콜 리우(Nicole Rieu)의 “Mais Je Sais Que Ca Va M'arriver”라는 곡이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그냥 보통 학생으로 지냈고요, 특별한 활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 1994년부터 뮤지컬 <지하철 1호선>를 비롯해 <오션 월드> <번데기> 등에 출연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같은 해 서울 연극제 대상을 수상하는 등 배우로서도 상당한 가능성을 보여주셨는데, 급작스레 유학을 떠난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지요.

"뮤지컬을 하는 동안 늘 부족함을 느꼈어요. 노래를 해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그래서 더 늦기 전에 체계적인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유학을 떠났지요."

- 많은 가수들은 연극 무대에서의 활동이 음악을 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이야기하곤 하는데요, 나윤선님의 경우에는 어떠셨나요? 개인적으로는 나윤선님의 보컬이 갖는 강한 환기력(喚起力)이 무대 경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저는 훈련받은 배우가 아닌 완전 '초짜'였기 때문에 무대의 신성함(?)과 그것이 주는 공포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공연을 했답니다. 무식해서 용감했지요. 그래서 제 자신의 무대경험이 제게 구체적인 어떤 도움을 주었다고는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도움이라면 그 당시 주위의 선배나 동료, 후배들의 공연을 보며 많이 받은 편입니다."

- 대체로 미국 재즈 보컬 가운데 나윤선님과 같은 ‘미성의 소유자’는 드문 것 같습니다. 오히려 클래식 전통이 녹아든 유럽 재즈 쪽이 나윤선님의 음색과 어울린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유학 장소를 프랑스 CIM으로 결정하신 것에 이러한 차이가 원인으로 작용했는지 궁금합니다.

"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미국 재즈 보컬리스트들 중에는 미성의 소유자도 꽤 있는 편입니다. 저도 늘 가지고 있던 재즈보컬리스트에 대한 편견(허스키에 굵은 저음)이 프랑스 유학 후 많이 사라진 건 사실이지만 그것이 나라나 지역과 상관이 있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 프랑스에서 상당 기간 유학 생활을 하셨고, 차후에는 교수로서도 재직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학교 이름만 들었지 구체적으로 어떤 곳인지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네요. CIM을 비롯해 프랑스 음악 학교의 커리큘럼은 어떤지 간단히 설명해 주시겠어요?

"CIM은 유럽에서 최초로 생긴 재즈학교입니다. 역사는 약 30년 정도 되었고요. 프랑스 재즈 뮤지션들의 70% 정도가 이 학교 출신입니다. 커리큘럼은 보통 다른 음대와 차이가 없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세계 여러 나라의 뮤지션들의 마스터 클래스와 공연이 거의 일주일에 한 번씩 있다는 점입니다. 굳이 외국에 나가지 않아도 다양한 나라의 음악을 배우고 들을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습니다."

- 그렇군요. 이제 1집 음반 'Reflet'(2001)에 대해 몇 가지 여쭈어 보겠습니다. 이 음반에서 김광민님의 'Rainy Day'를 새로 부르셨는데, 굉장히 참신한 해석이라는 평가가 많았습니다. 이외에도 패티김의 '초우' 또한 멋진 재해석으로 찬사를 불러 일으켰는데요, 이렇게 보면 나윤선님은 국내 음악에도 관심이 많으신 것으로 보입니다.

"아름다운 국내의 가곡과 가요, 동요 등에 관심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아직은 여유가 그리 많지 않아 제대로 작업을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더 공부해서 좋은 작품을 만들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답니다."

▲ 퀸텟 멤버들과 함께
ⓒ2004 나윤선 사랑방
- 데뷔 음반에 함께 한 연주인들과의 호흡이 굉장히 훌륭합니다. 특히 저 개인적으로는 공연에서 베이스와 비브라폰의 연주를 인상적으로 들었는데요, 함께 한 연주인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정보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멤버들을 간단히 소개해 주시겠어요?

"베이시스트 요니 젤닉(Yoni Zelnik)은 이스라엘 출신으로 비상한 머리에 뛰어난 작곡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즈음 프랑스에서 가장 잘 나가는 연주자 중에 하나지요. 반면에 그의 일상생활은 말도 아닐 만큼 늘 실수투성이지만…(이를테면 데워지지도 않은 프라이팬에 계란을 깨놓고서는 이 계란에는 흰자가 없다고 난리를 친다던가 말이죠)

비브라폰을 연주하는 다비드 니어만((David Neerman)은 영국태생으로 어려서부터 팝 음악을 즐겨서인지 곡을 쓸 때도 굳이 재즈라는 장르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쓰는 편입니다. 영화, 연극음악을 만들기도 합니다. 비브라폰을 그만둔다고 한 지 4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드러머 다비드 죠르쥴레(David Georgelet)는 할아버지가 오스트리아계이지만 프랑스 태생입니다. 안정적인 연주로 많은 보컬리스트들이 같이 연주하고 싶어하는 드러머이고요. 저희 중 나이는 제일 어리지만 철은 제일 빨리 든 친구입니다. 그룹의 매니저 역할도 맡아 하고 있습니다.

피아니스트는 처음엔 이태리 출신 기욤 노(Guillaume Naud)였다가 그 친구의 사정으로 인해 다른 피아니스트를 영입한 상태입니다. 이름은 벵쟈멩 무쎄(Benjamin Mousseux), 많은 콩쿨에서 상을 휩쓰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연주자입니다. 아참, 2003년 12월 한국공연에는 독일 피아니스트 프랑크 뵈스터(Frank Wester)가 저희와 연주했지요. 훌륭한 대타였답니다."

- 앞서 말씀드렸듯 나윤선님의 가창, 그 중에서도 스캣은 굉장히 감각적이고 강한 환기력을 지닌 것으로 평가됩니다. 굳이 대조하자면, 알 자로 같은 분의 스캣이 ‘기인열전’의 묘기처럼 보인다면 나윤선님의 경우에는 ‘신비함’과 같은 정서적인 면이 강하다고 할까요? 특별한 비결 같은 것이 있는지요.

"특별한 비결은 없고요. 스캣이란 게 원래 그렇지만, 목소리로 악기흉내를 많이 내 본 것이 조금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사람의 목소리로 뭘 해볼 수 있을까 이것저것 궁리하다가 어느새 습관이 든 것 같기도 하구요."

- 데뷔 음반은 수록곡의 스타일이 매우 다양합니다. 나직한 발라드가 있는가 하면 “Your Face”처럼 다소 아방가르드 한 곡들도 존재하는데요, 보컬리스트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기에는 적합하지만 다소 앨범으로서의 통일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프랑스에서의 경험들을 될 수 있으면 많이 넣으려고 했던 것이 그런 결과를 낳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에는 1집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거라는 불안감이 없지 않았거든요."

- 나윤선 님의 데뷔 음반은 언론으로부터도 많은 주목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발매된 재즈 음반으로서는 나름대로 좋은 판매고를 기록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재즈 음반으로서는 이례적인 성공에 대해, 나윤선님께서는 어떻게 평가하고 계시는지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일입니다. 재즈는 어느 나라 건 간에 그리 많이 들려지는 음악도 아니고 또 대중의 인기를 끌 수 있는 음악도 아니기 때문에 큰 걱정을 안고 시작한 활동이었는데 시기가 잘 맞은 덕분인지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셨습니다.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 나윤선님과 비슷한 시기에 피아니스트 곽윤찬님도 데뷔 음반을 발매했습니다. 두 분이 종종 협연도 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함께 연주할 때 호흡은 어떤지, 그리고 연주인으로서 곽윤찬님에 대해 나윤선님께서는 어떻게 평가하시는지요.

"묵묵히 열심히 연습하며 내실을 기하는 훌륭한 연주자입니다. 끊임없이 좋은 연주로 우리 모두를 기쁘게 또 놀라게 해 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후진양성에도 많은 애를 쓰시고 있지요."

- 이번에는 유럽 발매 음반인 'Light for the People'(2002)에 대한 질문입니다. 도입부의 'One Way'와 'Song for the People', 'Untitled' 같은 곡이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MJQ(Modern Jazz Quartet)을 연상케 할 정도로 부드럽고 세련된 느낌을 주고, 특히 베이스와 비브라폰의 움직임이 두드러지는 것 같습니다. 이런 처음 세 곡의 배치는 의도하신 바가 있는 건가요?

"처음 두 곡은 유럽공연 때마다 연주하는 곡들이고 또 할 때마다 달리 연주되는 곡들입니다. 각 연주자에게 충분한 자유를 줄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들이라 어찌 보면 저희 그룹의 색깔을 가장 잘 나타낸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때문에 1, 2번에 수록하기로 결정 했구요. 3번 곡은 저 뺀 나머지 멤버들의 의견이었습니다.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

- 앞서 언급한 곡들을 포함해 새로 쓰여진 곡들이 꽤 되는 것 같습니다. 일부에서는 한국 재즈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영미권 스탠다드의 커버보다는 작곡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요, 나윤선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저도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물론 고전에 대한 공부는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하지만 그 안에서 자신만의 것을 발견하는 것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지요. 몇 번의 실패와 반복되는 고민을 통해 나오는 나만의 곡들이 남들에게 들려지고 또 검증 받다 보면 어느새 조금씩 발전하게 됩니다. 프랑스의 경우는 대부분의 재즈공연이 창작곡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개중에는 소위 뜨는 음악이 되어 방송 등을 통해 나오기도 합니다."

- 음반에서 'One Way', 'Untitled', 'Nostalgia', 이렇게 세 곡은 한국어 가사로 된 곡들입니다. 그러고 보면 나윤선님의 음반에는 항상 한국어 가사로 된 곡이 포함되어 있군요. 국내 발매음반은 그렇다 하더라도, 유럽 발매음반에서도 세 곡의 한국어 노래를 포함시키신 것은 어떤 이유인지 궁금해집니다.

"멤버들의 전적인 요구(강요?)와 공연을 통해 얻은 관객의 반응 때문인데요. 처음엔 한국어와 재즈는 상추쌈에 얹은 버터 조각 같은 관계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제 생각이 완전히 틀린 것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만은…. 의외로 많은 관객들이 한국어로 된 곡들을 좋아합니다. 이국적이기도 하기 때문이겠지만요. 제 프랑스 친구들은 '초우'를 따라 부르기도 합니다. 뜻은 전혀 이해 못하면서 말입니다."

- 전작인 'Reflet'에 비해 수록곡들이 음악적으로 까다로운 편에 속한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특히 'Sometimes I'm Happy'는 과연 이 곡이 냇 킹 콜(Nat King Cole)의 간질간질한 노래였는지 의아할 정도인데요. 이런 음반 구성은 유럽 시장의 특성을 감안하신 것인지 궁금합니다.

"근래에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나오는 재즈 앨범들은 대부분 실험정신이 가득한 앨범들입니다. 물론 많이 팔리진 않지요. 하지만 무대를 통해 자주 연주됩니다. 많이 색다를수록, 개성적인 아이디어가 넘쳐 날수록, 실력이 확실히 느껴질수록 그 아티스트의 연주기회는 많아지지요. 저희의 경우 어떤 시장성을 염두에 두고 음반을 내지는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음반을 듣고 저희 공연에 오고 싶어하는 마음이 들기를 하는 바람에서 음반을 만들었을 뿐이죠."

- 이야기가 나온 김에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지역의 재즈 시장에 대해 여쭈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프로필을 보면 상당히 많은 콩쿠르와 페스티벌에 참가하신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요, 유럽 지역이 그처럼 재즈가 활성화되어 있는 편인가요? 유럽의 재즈 음악 환경과 시장성은 어떤지 궁금합니다.

"유럽에는 일년 내내 재즈공연과 페스티벌이 열립니다. 몇 십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페스티벌에서부터 작은 산간 지방에서 열리는 소규모 공연까지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재즈는 죽었다, 라는 말도 많습니다만 나라의 지원과 기업들의 후원이 끊이지 않는걸 보면 재즈가 정말 죽었는지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프랑스의 경우는 음악만 해도 먹고 살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어 뮤지션들에게는 천국입니다. 24시간 들을 수 있는 재즈 라디오 방송, 매주 몇 번씩 TV방송되는 세계 최고 재즈 뮤지션들의 공연 등등. 그리고 유럽은 각 나라들 간의 음악적인 교류가 활발한 것도 특징입니다. (지리상의 여건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이 모든 것들이 부럽긴 하지만 이것도 돈 많은 나라에서나 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함부로 따라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 아무래도 유럽 지역의 재즈는 미국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을 것 같습니다. 많은 분들은 잘 알려진 ECM 레이블의 음악을 놓고 유럽 재즈를 재단하기도 하는데요, 유럽 재즈의 특징이라면 어떤 것들이 있는지요. 그리고 현재의 트렌드는 어떠한지도 말씀해 주시죠.

"글쎄요, 유럽친구들과 가끔 그런 얘기를 나누다 보면 늘 결론은 차이가 없다는 쪽으로 납니다. 물론 유럽은 클래식 음악의 역사가 깊고 아카데믹한 것에 많은 비중을 두는 편이라 정서적으로나 이론적으로 그러한 면들이 음악에 반영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유럽의 많은 재즈 뮤지션들도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고 있고 그들이 듣는 음악 대부분이 미국 음악인 것을 보면 이젠 더 이상 이분법은 부질없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현재의 트렌드요? 글쎄요. 다양한 스타일의 총합적인 재즈화(化)가 아닐까 싶습니다. 비틀즈 음악에 DJ가 곁들여진 트럼본 4중주. 기계를 통해 뽑아낸 인간의 목소리가 베이스가 되어 아프리카 민속음악 비슷한 리듬을 연주하는 가운데 들리는 소프라노 색소폰의 화려한 즉흥연주 같은 것들이죠. 하지만 이런 것들만 있는 건 아닙니다. 지금도 죽어라고 비밥과 스윙만을 고집하며 연주하는 뮤지션의 수도 어마어마하답니다."

- 어떤 면에서는 프랑스에서 재즈와 록, 힙합 음악이 인기를 끈다는 사실이 이해하기 힘든 면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프랑스는 자국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고, 미국 문화에 대한 거부감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까요. 나윤선님은 이런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런 건 전혀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프랑스 사람들은 미국음악을 무지무지 좋아하고 많이 듣습니다. 물론 자국 음악도 아주 많이 듣지만요.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조지 W. 부시는 엄청 싫어하지만 마돈나에는 미치는 거죠."

▲ 나윤선의 새 음반 [Down By Love]
- 이제 막 발매된 새 음반 'Down By Love'(2003)에 대해 질문드리겠습니다. 커버곡들이 굉장히 다채롭습니다. 특히 이번에는 매지 스타(Mazzy Star)부터 스팅(Sting), 폴 사이먼(Paul Simon), 그에 더해 김민기와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까지 각양각색인데요. 본인이 직접 선곡하시는 건가요? 그리고 평소에 록 음악도 즐겨 들으시는 편인지 궁금합니다.

"함께 작업한 올리비에 오드(Olivier Ode)와 함께 선곡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음악은 자주 듣는 편은 아니지만 장르는 가리지 않고 듣는 편입니다."

- 새 음반은 이전 두 음반에 비해 더욱 차분하고 어떤 면에서는 뉴에이지의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 굳이 재즈라는 영역에 국한되지 않으려 한다는 평가도 있는데요. 어떤 생각을 갖고 새 음반을 작업하셨는지 궁금하네요.

"일단 평소에 해보고 싶은 곡들을 녹음했습니다. 처음 시작이 재즈였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재즈 이외에는 하지 않는, 그리고 하지 말아야 할 사람으로 저를 보시는 것 같네요. 하지만 사실 저는 재즈를 포함한 서양 대중음악을 공부한 게 얼마 되지 않는, 아직 미숙한 뮤지션입니다. 그리고 다양한 것을 시도해 보며 제 스타일을 찾아나가야 할, 아직 갈 길이 먼 가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공부한다는 생각으로 이것저것 해봐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야 오래 음악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 한국어, 영어, 프랑스어를 하시는 것은 알았지만 새 음반을 보면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로 된 곡들까지 등장합니다. 대체 몇 개 국어를 하시는 건가요?^^ 또 가사를 붙이거나 노래할 때 이러한 언어적인 부분도 고려하시는지요.

"언어를 염두에 두고 선곡하지는 않았습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는데요. 저는 한국어,불어 약간, 영어 아주 조금 밖에 할 줄 모릅니다. 그 이외 언어는 따로 공부를 해서 읽고 조금 이해하는 정도입니다. 그리고 입에 맞는 노랫말은 참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건 그 때 그때 하게 되는 곡의 색깔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라 어떤 법칙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 새 앨범에는 샹송과 탱고로 분류될 만한 곡들도 존재합니다. 영미권 외의 음악에도 관심을 갖고 계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월드뮤직 가운데서는 주로 어떤 음악을 즐겨 들으시는지 궁금하네요.

"워낙 다양한 인종이 모여 사는 프랑스의 특성 덕에 월드뮤직을 조금이나마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아르메니아 친구와 그 나라 음악을 공연 해 볼 기회도 있었고, 카메룬, 앙골라 친구와 함께 아프리카 음악을 원어(?)로 불러보기도 했답니다. 브라질 춤 선생의 그 섹시함에 넋이 나가 한동안 브라질 음악을 즐겨 듣기도 했고요. 인도 사리를 걸치고 그 친구들 노래를 따라 하기도 했죠. 대부분이 약간은 건성이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는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대개는 그 나라의 친구들이 가지고 있는 음반들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빌려 듣고 했던 것이 전부라 많이 듣는다고는 볼 수 없지요. 요즈음에는 아랍의 팝을 조금 듣고 있습니다."

- 새 앨범에 대해서는 쉽고 편안하다는 평가와 다소 심심하다는 평으로 양분되는 것 같습니다. 제 견해로는, 전자는 데뷔 음반의 '초우' 같은 곡을 좋아했던 분들이고 후자는 유럽 발매음반이나 'The Jody Grind' 같은 곡의 팬인 것 같네요. 나윤선이라는 가수의 두 가지 서로 상반되는 측면 가운데 이번 음반은 정적인 면을 보여준 것이라고 이해하면 좋을까요?

"예, 아마도 그렇게 보시면 될 듯 싶네요."

- 새 음반 작업에는 기타리스트인 올리비에 오드의 역할이 컸다고 알고 있습니다. 오드에 대해서 간단히 소개해 주실까요. 그리고 그와의 작업은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도…

"그는 광고 음악 작곡가 겸 기타 연주가, 편곡자, 작곡자 그리고 동시에 저희 앨범 'Light For The People'을 제작한 음반 제작자이기도 합니다. 고집이 센 친구고 저도 마찬가지라 가끔은 의견 충돌도 있었지만, 그래도 깊은 음악의 이해를 가지고 있는 친구라서 저를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이번 앨범에서는 멀티 인스트루멘티스트(Multi-instrumentist)로서, 작곡자로서, 편곡자로서 또 녹음 엔지니어로서 수고해주었지요."

- 이제 다른 질문들을 드려 보겠습니다. 근래에는 국내에서도 재능 있는 음악인들이 종종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저는 재즈 피아노를 치는 진보라양이나 임미정님에 관심이 가는데요, 나윤선님께서 눈여겨 보시는 국내 뮤지션이 있는지요.

"한 두 분이 아닌데요. 외국에 나가 계시는 분들도 계시고요. 모두들 재능 있는 뛰어난 뮤지션들이죠. 그 중에 피아니스트 이발차양이 생각나네요. 아직 어린 뮤지션이지만 그 성실함에 큰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 한국 재즈 시장은 외적으로는 성장을 이루었지만 실제로는 편집 음반과 보컬 곡만 인기를 얻는 등 거품이 많은 것으로 보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분위기’를 위한 배경음악으로 취급된다는 생각도 드는데요, 나윤선님이 생각하시는 한국 재즈 시장의 문제라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뮤지션들이 설 수 있는 무대의 부족이 제일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굳이 커다란 무슨 콘서트 홀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습니다. 뮤지션들끼리 프로젝트를 만들어 발표할 수 있는, 적은 관객이라도 수용할 수 있는 그런 공간들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음악이란 연주되어져서 들려질 때에만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그러다 보면 자연히 발전도 이루어진다고 봅니다."

-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계신 것으로 압니다. 지도자로서 느끼는 국내 학생들의 장단점이라면 어떤 것들이 있는지요.

"학생들 보다는 학생들을 둘러싸고 있는 학교, 사회,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들의 장단점에 대해 얘기하는 게 나을 듯싶네요. 세세하게 얘기하다 보면 너무 길어질 것 같고요. 간단히 말해서 학생들에게 많이 보고 느끼고 경험하게 할 수 없는 현실에서 오는 문제가 참 많지요. 그건 선생님인 우리도 똑같이 겪었던 문제들이지요. 비주류 음악을 해도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보장을 받는 나라들과 우리나라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건 한 순간에 해결될 수 있는 단순한 문제도 아니고요.

TV에 나오는 스타가 되는 게 전부인줄 아는 학생들에게 재즈도 음악이니 좀 오래 걸리더라도(평생이 걸리더라도) 한 번 해 보렴, 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어요? 한 번도 비브라폰을 본 적이 없는 학생에게 비브라폰과 마림바의 소리의 차이를 설명해보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아프리카 음악도 국악만큼 훌륭하다는 걸 말로 설명해봐야 그 둘 다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는(창피하지만 저도 잘 몰라요) 학생들에겐 그 설명이 마치 생전 들어본 적 없는 어느 외딴 섬나라 원주민들의 언어 정도로 밖에 안 들리겠지요. 이게 우리의 현실이네요."

- 아도르노 같은 양반은 클래식과 비교해서 재즈를 열등한 음악이라고 폄하하기도 했습니다. 또 일부 비판가들은 한국 땅에서 미국 음악인 재즈를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런 악의적인 주장들에 대한 나윤선님의 생각이 듣고 싶습니다.

"그럼 가요는 한국 음악일까요? 피아노는 우리 악기입니까? 클래식은 왜 고급 음악이고 클럽에서 연주되는 재즈는 왜 저급 음악으로 인식되는지 안타깝습니다. 색소폰은 그냥 불면 불어지는 악기가 아닙니다. 바이올리니스트가 하루종일 연습하듯 색소폰 연주자도 하루종일 연습을 합니다.

미국과의 관계가 그런 생각을 낳았다면 그것도 이해는 합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보다는 세상에는 다양한 인종, 다양한 종교, 다양한 문화가 있듯이 음악도 그렇다는 것을 인정해야죠. 들어오는 건 막지 말고(그 어느 나라 음악이든) 각자 선택해 듣고 그 대신 우리 전통음악은 사라지지 않게 보호하고 하는 쪽으로 신경을 돌리는 게 낫지 않나 합니다. 한국에서 재즈를 한다는 건 한국에서 음악을 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 질문이 갈수록 거창해지네요.^^;; 도식적으로 한국 재즈를 구분하자면, 신관웅과 같은 미 8군 연주자를 중심으로 한 1세대, 버클리 유학파를 중심으로 한 2세대, 그리고 나윤선님과 같은 3세대 정도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세대가 성인 가요와, 2세대가 대중 가요와 어쩔 수 없는 타협을 해 왔다면 3세대의 뮤지션들은 ‘타협의 여지는 줄이면서’ 나름대로 새로운 모색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앞으로 한국의 재즈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어떻게 보고 계시는지요.

"글쎄요, 아직은 경험이 많지 않은 제가 대답하기엔 조금 벅찬 질문이네요. 각자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열심히, 정말 열심히 하면 좀 더 나은 방향으로 가게 되지 않을까요? 재즈를 좋아하시는 많은 팬 분들의 관심과 격려도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말씀해 주실까요.

"1, 2월 프랑스 공연이 있어요. 그리고 2월 초에는 프랑스에서 나올 새 앨범을 녹음합니다. 4월 초 쯤에는 한국에서 작은 공연을 할 예정이고요. 10월에도 역시 한국에서 저희 퀸텟의 투어를 가질 계획입니다."

- 계속 좋은 활동 보여주세요. 감사합니다.

/배성록 기자 (schmaltz99@hanmir.com)


덧붙이는 글
나윤선님의 해외 공연 관계로, 인터뷰는 서면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 ⓒ 2004 오마이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제공 :
http://news.naver.com/news_read.php?oldid=200402060000431970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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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규찬, 술 담배 끊고 7집 '싱글노트' 작업
텅 빈 충만 …
지난해 장염 악화 응급실행, 삶-음악 진지한 성찰의 시간
음반 곳곳 작가주의 풍모 물씬


가수 조규찬과의 인터뷰는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조규찬은 '7집 가수'에 어울리지 않는(?) 진솔함으로 차마 밝히기 힘든 사생활과 음악 이야기들을 담담히 털어놨다. 인터뷰를 끝내고 다시 접한 7집 '싱글 노트(Single Note)'에선 처음에 발견하지 못한 그의 혼과 숨결이 느껴졌다.

조규찬은 지난해 가을 20대 중반부터 앓아온 만성 스트레스성 장염이 악화돼 병원 응급실 신세를 져야 했다. 담당 의사가 자신의 몸 상태에 대해 심각성을 환기시켰다는 조규찬은 이후 술, 담배를 끊은 것은 물론, 운동과 식사요법을 꾸준히 병행하며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다.

이같은 변화들은 조규찬이 자신의 삶과 음악을 새롭게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그가 7집 제목을 '싱글 노트'로 붙인 이유다.

음악에서 '단음'을 의미하는 '싱글 노트'를 통해, 조금 더 차분하게 '나는 무엇이고 삶이란 어떤 것인가'를 관조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타이틀곡으로 '마지막 돈키호테'를 내세운 것도 같은 맥락이다. 타락할 대로 타락한 현실 세계에서 조금은 엉뚱하지만, 순수함으로 무장한 저돌적인 돈키호테의 존재를 갈망하고 있고, 그 자신이 바로 '마지막' 돈키호테일 지도 모른다는 심정을 노래하고 있다.

조규찬은 자신의 이런 진지한 변화들을 우울한 시각으로만 보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최근 일어날 일들이 비록 힘들기는 했지만, 오히려 인생에 대한 진지함과 애착을 더욱 갖게 만들었다며 앞날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냈다.

조규찬은 7집에서 자신이 하려는 이야기를 부각시키는데 중점을 뒀다.

예전에는 멜로디를 먼저 만들고 노래 가사를 분위기에 맞게 붙이는 정도였으나, 이번에는 이야기의 뼈대를 세우고 이에 조화되는 소리를 찾으려고 애를 썼다.

'마지막 돈키호테' 외에 '언젠가 이 노래를 듣게 될 내 아이에게', '우화-번데기가 날개 있는 벌레로 변하는 것', '멜로디', '아이 언더스탠드(I understand)' 등이 조규찬의 작가주의적 풍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자신의 삶과 음악에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 조규찬이 앞으로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된다.

(스포츠조선 신남수 기자 delta@sportschosun.com )

입력 : 2004.02.06 12:05 27' / 수정 : 2004.02.06 16:26 56'

 

http://www.chosun.com/w21data/html/news/200402/20040206012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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