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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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로자 아줌마는 환하게 웃었다. 이제 이빨도 거의 없었다. 미소라도 지어야 아줌마는 평소보다 덜 늙어보이고 덜 미워 보였다. 그녀의 미소에는 젊은 시절의 아름다움을 상기시켜주는 무엇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녀는 유태인 대학살 전인 열다섯 살 적 사진을 한 장 가지고 있었는데, 그 사진의 주인공이 오늘날의 로자 아줌마가 되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로자 아줌마가 열다섯 살의 사진 속 주인공이었다는 사실 역시 믿기 어려운 일이다. 그들은 서로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열다섯 살 때의 로자 아줌마는 아름다운 다갈색 머리를 하고 마치 앞날이 행복하기만 하리라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열다섯 살의 그녀와 지금의 그녀를 비교하다보면 속이 상해서 배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생이 그녀를 파괴한 것이다. 나는 수차례 거울 앞에 서서 생이 나를 짓밟고 지나가면 나는 어떤 보습으로 변할까를 상상했다. 손가락을 입에 넣어 양쪽으로 입을 벌리고 잔뜩 찡그려가며 생각했다. 이런 모습일까? (147-148).

우리는 모두 미래를 두려워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불투명한 미래가 불행한 현재가 되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불안한 미래의 예감은 조금씩 늘어나는 현재의 시름으로 점차 확신이 되어가고, 우리 겁쟁이들은 못견딜 것 같은 두려움에 현실로부터 도망치거나 애착을 가질 무언가를 찾아 마음 속의 욕망을 쏟아붇곤 한다.

 

그래도 죽기는 싫다. 우리는 살고 싶어한다.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면 닥쳐오는 또다른 삶이란 사실 진지하게 생각해보면 엄청나게 부담스럽고 두렵고 심지어 혐오스러울 정도의 무게를 우리 위에 지우지만, 그래도 우리는 매일 우리를 찾아오는 생을 맞이하고, 또한 마주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용기가 필요하다.

 

희망도 좋지만, 희망은 언제나 우리를 배신하기 일쑤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스스로를 속이는 갸냘픈 희망보단 우리가 쓰러지지 않게 해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불행한 이들이 서로를 감싸고 사랑하고 보듬으며 더욱 불행해져가는 이 이야기는 그 용기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삶을 마주하는 용기는 사랑, 아니 그보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다른 사람을 향한, 그리고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애정이라는, 어쩌면 간지러운, 하지만 누군가의 어깨를 빌려본 사람이라면 반드시 공감했던 순간이 있을, 당연하고도 소중한 삶의 진실을 이 소설은 보여준다. 나에겐 내가 사랑할, 그리고 나를 사랑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끝으로, '자기 앞의 생'이란 제목은 별로다. '내 앞의 삶', 아니 차라리 '우리 앞의 삶'이라고 번역한다면 더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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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돌봐줘
J.M. 에르 지음, 이상해 옮김 / 작가정신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책의 2/3 정도까지는 수다스럽고 예민한 프랑스인들의 모습 - 지금껏 보았던 프랑스 영화가 심어준, '끊임없이 시시콜콜한 것에 대해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불평하는 프랑스인'에 대한 편견과 일치하는 - 에 질려버렸다. 그러나 책의 막바지에는 작가가 꽤나 신경을 쓴걸로 보이는 반전이 존재하고 있다.

대개의 인기 있는 추리소설이 그렇듯, 이 소설 역시 몇 개의 살인사건을 시작과 중간, 그리고 마지막에 배치하고 있다. 그러나 책 전반을 이끌어나가는 것은 무거운 종이상자에 깔려 죽은 개 엑토르의 비극적 살견(?) 사건이다. 여기에 마주 보는 아파트의 두 사람이 창을 통해 마주보는 상대방을 지긋지긋한 스토커로 잘못 알고서 신경질적으로 써내려가는 일기들과 아파트의 별난 주민들의 개인적 기록들이 콜라주처럼 덧대어지며 이야기는 진행된다. 작가가 독자들에게서 노리는 것은 콜라주 작품의 오브제들 사이의 빈틈을 메꾸는, '그래서 실제로는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가'의 내용이다. (이 정도면 스포일러는 다 피해간 듯)

이 소설은 현재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는 작가의 첫 작품이라고 한다. 번역자도 그렇고 후배도 그렇고 이 책을 읽는 와중에 여러 번 웃었다고 하지만, 불행히도 나는 그 몇 번의 웃음이 냉소였다. 다른 문화권의 코미디를 접할 때의 낯선 기분 같은 거랄까, 나를 웃기지 못하는 농담을 만났을 때의 안타까운 유감 같은 거랄까, 뭐 그런 것들 - 그리고 수다스런 프랑스인에 대한 부정적 편견;; 반전 역시 반전이 있음을 아는 순간 누가 범인인지 알아채게 되는, 게다가 맨 마지막에 찬찬히 설명까지 다 해주는 방식의 것이라 소위 '뒷통수를 맞은 것 같은' 느낌은 없었다.

그래도 재미있다. 그리고 내가 볼 때 가장 사악한 악당은 브뤼노다.
이런 녀석들 때문에 나는 평소 "아이를 좋아합니다"는 말을 자신있게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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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책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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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죽은 남자들의 이야기이다.

소설이란 정말 거짓말 같아서, 몇몇 남성 작가의 소설 속의 죽음 - 혹은 상실 - 들은 정말 그 죽음의 비참함의 무게 대신 죽고 다시 일어나 세상 앞에 홀로 선 쓸쓸하고 비장한 주인공의 뒷모습 같은 것만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그것은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홀가분한 자유, 모험같은 것과도 연결되어 있다. 멀게는 카프카가 그랬고, "부탁이니 제발 조용히 해줘"의 레이몬드 카버가 그랬으며[이 작가가 널리 읽히지 않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가깝게는 무라까미 하루끼가 그렇다. 이 소설 역시 마찬가지이다.

헥터 만은 자신을 사랑하여 반 미치광이가 된 브리지드의 죽음과 함께 더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으며, 화자인 데이비드 짐머 역시 가족의 죽음과 함께 더이상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사람'이 되었다. 데이비드와 헥터의 책꽂이에 꽂혀있는 샤또브리앙의 회고록은 '죽은자의 목소리'이다.

그들을 죽음의 상태에 이르게 한 커다란 상실은 오히려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브리지드를 파묻고서 떠나는 끝없는 도주와 방황이 헥터의 삶에 보다 많은 깊숙한 자국들을 남겼으며, 가족의 상실로 인한 절망이 오히려 데이비드의 "생의 감각을 흔들어"주었다. 사실 그들은 죽은 남자이지만, 죽고 다시 일어나 세상 앞에 서서 모험을 떠나는 것이다. 물론 가볍지 않은 발걸음으로 비틀거리며, 터덜터덜 담배연기 속으로.

더이상 감동받을 것도 없고 아무 놀랄 것도 없는 세상 속에서 자신을 이끄는 알 수 없는 여인의 손길을 따라나서는 절망한 도시 남성의 집착 섞인 모험은 이제 하나의 정형화된 모티브가 되어버린 건가.

폴 오스터의 책은 처음이었지만, 그에게서는 카프카와 카버와 하루끼의 책에서 느껴지는, 그런 냄새가 난다. 특히, 하루끼의 '댄스댄스댄스'와 몹시 유사하다. 이제는 그런 걸 그리 좋아하지 않게 되었지만, 그런 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에게 권하고 싶다. 그리고 자살을 기도해본 적 있는 사람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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