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책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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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소설은 죽은 남자들의 이야기이다.

소설이란 정말 거짓말 같아서, 몇몇 남성 작가의 소설 속의 죽음 - 혹은 상실 - 들은 정말 그 죽음의 비참함의 무게 대신 죽고 다시 일어나 세상 앞에 홀로 선 쓸쓸하고 비장한 주인공의 뒷모습 같은 것만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그것은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홀가분한 자유, 모험같은 것과도 연결되어 있다. 멀게는 카프카가 그랬고, "부탁이니 제발 조용히 해줘"의 레이몬드 카버가 그랬으며[이 작가가 널리 읽히지 않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가깝게는 무라까미 하루끼가 그렇다. 이 소설 역시 마찬가지이다.

헥터 만은 자신을 사랑하여 반 미치광이가 된 브리지드의 죽음과 함께 더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으며, 화자인 데이비드 짐머 역시 가족의 죽음과 함께 더이상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사람'이 되었다. 데이비드와 헥터의 책꽂이에 꽂혀있는 샤또브리앙의 회고록은 '죽은자의 목소리'이다.

그들을 죽음의 상태에 이르게 한 커다란 상실은 오히려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브리지드를 파묻고서 떠나는 끝없는 도주와 방황이 헥터의 삶에 보다 많은 깊숙한 자국들을 남겼으며, 가족의 상실로 인한 절망이 오히려 데이비드의 "생의 감각을 흔들어"주었다. 사실 그들은 죽은 남자이지만, 죽고 다시 일어나 세상 앞에 서서 모험을 떠나는 것이다. 물론 가볍지 않은 발걸음으로 비틀거리며, 터덜터덜 담배연기 속으로.

더이상 감동받을 것도 없고 아무 놀랄 것도 없는 세상 속에서 자신을 이끄는 알 수 없는 여인의 손길을 따라나서는 절망한 도시 남성의 집착 섞인 모험은 이제 하나의 정형화된 모티브가 되어버린 건가.

폴 오스터의 책은 처음이었지만, 그에게서는 카프카와 카버와 하루끼의 책에서 느껴지는, 그런 냄새가 난다. 특히, 하루끼의 '댄스댄스댄스'와 몹시 유사하다. 이제는 그런 걸 그리 좋아하지 않게 되었지만, 그런 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에게 권하고 싶다. 그리고 자살을 기도해본 적 있는 사람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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