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고고학 - 정치 인류학 연구
삐에르 끌라스트르 지음, 변지현.이종영 옮김 / 울력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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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현대 정치학은 기본적으로 서구 사회의 발전 과정에서 배태된 서구중심적, 그리고 근대중심적인 세계관을 바탕에 두고 있다. 정치이론 및 연구의 핵심적인 연구 대상인 국가와 사회 관계 역시 서구 사회의 근대화 및 국민국가체제 형성 과정의 경험을 그 중심에 두고 있고 비서구세계의 정치 제도 발전 역시 결국은 서구사회의 발전 양상을 답습하는 것, 혹은 거기에서 약간의 변이를 가진 것 정도로 치부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점에서 남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원시사회 연구에 평생을 바친 정치인류학자 삐에르 끌라스트르의 책들은 서구중심적 국가관과 사회관에서 벗어난 시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끌라스트르가 정의하는 원시사회란 국가가 출현하지 않은 사회이다. 여기서 국가란 폭력을 독점한 유일 권위체로서의 정치제도를 이야기한다. 그는 남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사회 연구를 통해, 원시사회는 독점적 권위체의 출현을 방지하고자 하는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으며, 권위적 리더쉽을 통한 권력 장악 시도나 권력의 집중화 시도는 사회에 의해 거부된다고 밝히고 있다. 이를 통해 그가 근본적으로 도전하는 것은 "두 사람 이상이 모인 곳에서는 언제나 지배와 복종의 권력관계가 형성된다"라는 권력정치적 정치학의 기본 전제이다.

원시사회 역시 추장, 혹은 족장으로 불리는 일종의 리더가 존재하지만, 끌라스트르에 따르면 이들이 가지고 있는 리더쉽은 지배자로서의 리더쉽이 아니라 제한적인 위세(prestige)만을 가진 존재들이다. 그가 발견한 남아메리카 원시사회 리더의 덕목(혹은 요구조건)은 1) 뛰어난 언변, 2) 자신의 것을 구성원들에게 아낌없이 내어주는 희생정신, 3) 사회를 불필요한 전쟁이나 권력 집중화로 이끌어가지 않는 정치적 신중성이다. 우리는 전쟁시에 발휘되는 군사적 지휘능력이나 개인적인 전투능력이 추장에게 요구되지 않을까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은 전쟁시에만 칭송될 뿐 전투가 종료된 다음에는 다시 리더의 조건이 되지 않는다고 끌라스트르는 밝히고 있다.

그러나 전쟁이 지속되거나 혹은 상시적인 외부로부터의 위협이 있을 때 한 집단은 군사적 작전수행을 위한 위계구조의 지속과 함께, 우세한 폭력을 보유한 특정 세력으로의 권력 집중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에 대해 끌라스트르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왜 원시사회들은 국가 없는 사회인가? 더 이상 정치 이하적인 맹아가 아니라 완전한, 완성된, 성숙한 사회들로서의 원시 사회들이 국가를 갖지 않는 것은, 그들이 국가를 거부하기 때문이고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사회적 몸체가 분할되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야만인들"의 정치는 권력의 분리된 기관의 발생에 끊임없이 제동을 거는 것이고, 우두머리와 권력 행사 사이의 치명적일 만남을 가로막는 것이다. 원시 사회에서 권력의 분리된 기관이 없는 것은 사회로부터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자신의 존재를 분할되지 않은 것으로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내부에서 지배자와 예속민, 우두머리와 부족 사이의 불평등이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하나의 전체로서의 사회가 권력을 소유하기 때문이다. 권력을 소유한다는 것은 곧 권력을 행사한다는 것이고, 권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권력 행사의 대상이 되는 자들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원시사회들이 원하지 않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바로 그래서 원시 사회의 우두머리들은 권력이 없고, 바로 그래서 권력은 하나의 몸체로서의 사회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 불평등의 거부, 분리된 권력의 거부, 바로 이것이 원시 사회들의 동일한 그리고 부단한 염려이다. 원시 사회들은 매우 잘 알고 있다. 바로 이러한 투쟁을 포기한다면, 권력의 욕망 그리고 복종의 욕망이라고 명명되는 은밀한 힘들-지배와 복종은 바로 이 힘들의 해방을 통해 발생하는 것이다-을 가로막는 것을 그친다면, 자신들의 자유를 잃게 되리라는 것을 말이다... ...사회로부터 분리되지 않은 그러한 권력은 단 하나의 방향으로 행사되고, 단 하나의 프로젝트만을 실현한다. 사회의 존재를 분할되지 않은 상태로 유지시키는 것, 사람들 사이의 불평등이 사회 내에 분할을 도입하는 것을 막는 것이 그것이다... ...사회는 위세에 대한 애호가 권력의 욕망으로 발전하지 않도록 감시한다. 권력에 대한 우두머리의 욕망이 뚜렷이 드러날 때 취해지는 조치는 매우 간단하다. 그를 쫓아내거나 죽이는 것이다. 분할이라는 유령이 원시 사회에 출몰하지만, 원시사회는 그 유령을 쫓아낼 수단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원시 사회들의 예는 우리에게 다음의 사실을 가르쳐준다. 분할은 사회성의 존재에 내재적이지 않다는 것, 달리 말해 국가는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 국가는 특정한 시점에 발생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폭력의 고고학 "제 6장 원시 사회에서 권력의 문제" pp.151-152)


그렇다면 이로부터 제기되는 문제는 이것이다. 국가 출현 이전의 사회가 국가와 계층화, 권력 집중의 발생을 방지하기 위한 강력한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면, 세계 많은 곳에서 원시 사회는 왜 국가 제도를 갖추게 되었는가? 그리고 그 변화는 왜 불가역적인 것인가? 끌라스트르는 원시 사회를 중심으로 연구한 학자이기에 그 자신도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지만 그에 대한 대답은 제대로 제시하고 있지 않다.

세계 여러 지역에서의 국가 발생 과정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찰스 틸리(Charles Tilly)가 밝힌 바 있듯이 국가의 출현 과정은 높은 수준의 전투 능력을 보유한 집단이 계급화되면서 이들에게 권력이 집중되고 전사 집단 간의 투쟁을 통해 보다 강력한 집단을 중심으로 한 위계적 지배구조가 발생했던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문화로서의 전쟁'은 클라우제비츠적인 '정치의 도구(수단)으로서의 전쟁'으로 이행하게 된 것이다. 끌라스트르가 밝혀낸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의 메커니즘이 만들어낸 장애물이 어떤 식으로 파괴되었는지는 각각의 사회가 맞닥뜨렸던 역사적, 환경적인 배경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끌라스트르의 연구가 보여주는 원시 사회의 모습은 원시적인 형태의 민주주의와의 몇 가지 유사성으로 인해 흥미를 끈다. 소위 '도편 추방제'가 존재했던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 체제는 민주주의적 정치체의 핵심적 원칙 중 하나가 '유능한 사람의 선출'보다는 '유능한 사람에 대한 견제'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인디언 사회에서 사회가 원하지 않는 전쟁을 수행하려는 리더를 그의 유능함에 상관없이 추방하듯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권력의 집중을 방지하기 위한 노력은 그리스 민주주의에서도 이루어졌던 것이다. 유능한 언변과 사회에 대한 봉사 및 희생을 주요 덕목으로 하는 원시 사회의 리더쉽 역시 고대 원시 민주주의는 물론 현대 민주주의에서도 리더에게 수사적으로나마 요구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끌라스트르가 밝혀낸 원시 사회의 내재적 메커니즘은 사회 그 자체의 속성으로서 아직도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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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나는 좌파다
베르나르 앙리 레비 지음, 변광배 옮김 / 프로네시스(웅진)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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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우선 책의 제목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번역판의 제목은 나름 선정적(?)이기도 하고 작금의 상황에 한탄과 함께 일종의 패배감에 젖어있을 한국의 많은 좌파들에게 바깥 세상으로부터의 위로를 제공해줄 것만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그러나 책을 다 읽은 결과 그다지 적절한 제목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베르나르 앙리 레비가 이 책을 통해 대답하고자 하는 핵심 질문은 '왜 프랑스 좌파가 이 모양 이꼴이 되었는가?" 그리고 "프랑스 좌파는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이다. '그럼에도 나는 좌파다'라는 제목은 이 두 가지 질문 중 어느 것과도 호응되지 않는다. 물론 원제인 '나자빠진 거대한 시체'라는 제목의 책을 살 사람들은 없겠지만, 어쨌든 책의 내용과는 그다지 통하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2.
이 책을 읽을 때 주의해야 할 것은 베르나르 앙리 레비가 책의 주제로 삼고 있는 '좌파'란 상당히 넓은 범주의 개념이자 그 범주 내에서도 아주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는 맨 마지막에 좌파의 대안적 진로로서 '감성적 좌파에 맞서는 우울한 좌파'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가 이해하는 좌파의 개념은 아래에서와 같이 다분히 감성적인 것이다.

   "좌파, 즉 자기 스스로를 타인과 그들의 비참함의 육체적 인질로 여기는 데 동의한 인간은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타인의 입장에 서기 위해 융화도 감동도 없이 자기를 무너뜨릴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라고 말이다... ... 그러나 이 같은 근심에서 깨끗이 손을 씻고자 마음먹은 자들은 우파에 속한다. 그 어떤 경우에도 타인들의 고통을 떠맡지 않기로 마음먹은 자. 타인을 위한 시련은 악마에게나 줘버려라! 공감하고 부끄러움을 느끼는 썩은 정신일랑은 던져버려라! 형제에 대한 박애, 이웃을 사랑하고자 하는 기벽은 이제 충분하다!" (95-96쪽)

여기서 '감성적'이란 표현을 사용한 건, 나이브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보다는 베르나르 앙리 레비의 좌파개념이 흔히들 떠올리는 맑스나 엥겔스,그람시 등등과는 그다지 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의 좌파 개념은 경제학을 위시한 '딱딱한' 사회과학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무한 책임"을 도덕률로 제시하는 프랑스 철학자 레비나스의 '말랑말랑한' 윤리철학에 사상적 뿌리를 두고 있다.

이와 같은 바탕 하에 베르나르 앙리 레비는 나치의 폭력과 극우의 폭력 뿐 아니라 붉은 기를 두른 독재자와 압제자들의 폭력 역시 비판해왔던 것이고, 그것이 좌파가 진정으로 나아가야할 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분배나 복지 같은 사회경제적 프로그램이나 사회주의와 자유주의 같은 이데올로기보다는, 지상의 모든 폭력에 분노하고 가장 힘없는 자의 편에 서는 '사회적/윤리적 정의'의 기준으로서 좌와 우를 나누는 저자의 시각을 이해해야할 것이다.

3.
사실 이 책을 읽으며 한국의 좌파들이 대답해야 할 더 중요한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들일 것이다. 좌파는 이상주의자인가? 아니면 현실주의자인가? 그 둘을 명확히 나눌 수는 없어도 언젠가 그 선을 그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선은 어디에서 어떻게 그어져야 하는가? 이것은 그저 모호한 문제가 아니라 한국 정치에서 좌파들이 대답을 요구받았던 오래된 문제, 바로 북한 문제와 연결된다.

한국의 우파들은 묻는다. 한국의 좌파들은 왜 한국 사회의 문제에 있어서는 이상주의자가 되고, 북한 문제에 있어서는 현실주의자가 되는가? 한국의 좌파들은 왜 이명박 정권의 시위진압은 인권탄압으로서 격렬히 공격하고, 김정일 정권의 폭정은 외면하거나 뒤로 미루어두는가?

이에 대한 한가지 고전적 대답은 "미국과 한국 수구보수세력이 북한 인권 문제를 핑계로 북한을 붕괴시키고 제국적, 혹은 침략적 야욕을 강화하는 것에 이용될 소지가 있기 때문에, 그리고 한반도의 평화를 심각하게 위협할 수 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북한 인권문제를 다루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였다.

그러나 베르나르 앙리 레비는 이 대답에 대해 다시 한 번 이렇게 질문할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여기서는 현실주의자--우파--가 되기로 한 것인가? 왜 당신은 여기서는 좌파가 되지 않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다양한 대답이 나올 수 있고, 이미 좌파 내부에서도 여러 가지 대답들이 나오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특히 좌파들--이 한국 좌파의 양심에 도전을 제기하는 북한 인권 문제를 계속해서 상기하며 이 책을 읽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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