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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머니 이야기 1부 ㅣ 내 어머니 이야기 1
김은성 글.그림 / 새만화책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분명 눈으로만 읽고 있는데 책에 오디오 장치라도 되어있는 것 처럼,
북청사투리의 소박한 음률이 머리속에서 연주하듯 리듬을 만든다.
신기한 경험이다.
이 책은 만화책이지만 농도짙은 서사의 힘이 가히 압도적이다.
한 사람의 살아온 이야기가 어쩌면 이토록 치밀하고 풍부할 수 있을까.
특출난 업적 있는 사람의 위인전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름 깨나 떨쳤다고 말년에 정리한 자서전도 아니고 그저 누구나처럼 한 시대를 관통해 살아 왔을 뿐인 팔순 할머니의 인생 이야기가 어쩌면 이렇게 독자로 하여금 몰입하게 할 수 있는걸까.
흔한 말로 '내 이야기를 글로 쓰면 책이 몇 권...'하는 말이 있는데 이 세상 살아가는 사람에게 누구 하나 가슴 아린 사연 없는 사람 없고 인생 역정 안 겪어 본 사람 없다는 이야기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누구나 책을 쓰는 건 아니다.
말과 기억으로 떠도는 이야기를 하나의 서사로 완성해 내는 것은 사실 무지막지한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책으로 만들어 낸 '누구누구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에게 값진 유산이 된다.
'객관적인 역사와 엄마가 체험한 역사는 달랐지만' .... '엄마의 이야기도 [역사이어야 한다] 고 생각했다' 라고 밝힌 작가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조금 더 앞질러 말하자면 객관적인 역사라는 것은 원래 존재하지 않는다.
연표와 지명과 인명 등의 표식으로 정리되는 역사는 최소한의 '기록'일 뿐이다.
기록 안에 함축되어 있거나 소실되어 있는 건 실제로 존재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며 그 사람들의 감정과 숨결이다.
궁극적으로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역사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록되지 못하고 잊혀져 간(지금도 잊혀져 가는) 수천만(어쩌면 수억, 수조)의 역사를 생각하면 이렇게 누군가의 노력에 의해 기록되는 한 사람의 역사는 얼마나 값지고 값진가.
사람의 가치가 다 똑같을진대, 사람의 인생이 다 똑같이 귀하고 아름답다.
그런데 '내 어머니 이야기'의 주인공의 삶은 지극히 보편적이면서도 어떤 독자들에게는 무척 독특하게 느껴져서 평범한 삶의 기록 이상의 가치를 발견하게 한다.
주인공이 나고 자란 고향이 함경도 북청이라는, 남쪽에서 나고 자란 나같은 후손들이 한 번도 가 본적도 없고 죽을 때까지 가보지 못할 지도 모르는 '신기한' 곳인데 그곳 사람들의 말이나 풍습에 강력한 친화력을 느끼게 하고야 마는 이 책의 능력은 실로 놀랍다.
활자화 된 북청 사투리는 마치 이국의 말 처럼 생소하지만 흥미진진하다.
그래도 어디서 들어본 건 있어서 나도 모르게 활자에 사투리다운 음률을 붙여서 읽는다.
소설에서 사투리를 재현한 작품은 수도 없이 많지만 만화는 오로지 구어체에 의존하기 때문에 대사의 비중이 소설에 비견할 수 없이 크다.
만화에서 사투리의 사용은 그래서 더 어렵고 (이책의 작가 역시 그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미묘한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어머니 이야기'는 그것을 과감하게 시도했고 독자에게 놀랍도록 새로운 언어적 쾌락을 선사했다.
아마도, 이 책 때문에 향후 학계에서 [만화에서의 사투리의 구현]에 대한 새로운 연구분야가 생겨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요즘은 만화 읽는 재미가 남다르다.
자칫 지루한 독백이나 넋두리로 그칠 수 있는 자신의 이야기를 완벽하게 '만화화'할 줄 아는 작가군의 등장이 나를 기쁘게 한다.
이들의 장점은 만화를 잘 그리는 기술에 있다기 보다 탁월한 소통능력에 있다.
대중문화가 즐기는 것에서 소통하는 것으로 진화하고 있음을 잘 이해하는 작가들의 출현은 어쩌면 필연적인 추세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의 가치는 고정적이지 않고 변화하며, 변화는 결국 무언가를 발전시키는 에너지가 된다.
요즘 나오는 만화들에게서 그러한 에너지의 기운이 묵직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