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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독서 - 세상을 바꾼 위험하고 위대한 생각들
유시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요즘 꽤 몰입하여 읽은 책 중에서 인상 깊은 저자를 하나 꼽으라면 단연 유시민이다.
그의 책을 다 읽은건 아니지만, <청춘의 독서>는 <후불제 민주주의>에 이어서 최근에 나를 매료한 저작의 반열에 올릴 수 있다. 참 쉬운 문체이면서도 완벽하게 뜻을 전달하는 명료함과 명쾌한 주장, 인간적인 고뇌가 느껴지는 솔직담백한 글솜씨. 여기에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주는 소소한 유우머까지.
나는 정치인으로서나 학자로서의 유시민에 대해서 아직은 명확한 이미지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그가 사람을 잡아 끄는 데가 있는 '지식소매상'인 것 만은 분명한 듯 하다.
이 책은 유시민씨가 갓 사회에 발을 디딘 딸에게 헌정하면서 동시에 그 나이 또래의 젊은 후배들에게 주는 따뜻한 지식의 선물상자이자, 동세대의 공감대에 다시 한 번 감흥의 선율을 선사하는 작은 오르골 박스와 같다. 나는 그의 딸 또래인 젊은이도 아니고 그와 동세대도 아니지만 슬그머니 그들 사이에 몸을 밀어 넣고 지식의 선물과 공감대에 울리는 즐거운 떨림을 맛보았다.
어떤 사람들은 그저 자기가 읽은 책 중에서 몇 권을 모아 그에 대한 썰을 푸는 식으로 한 권의 책을 내고 지명도를 얻는 것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다. 마하자면 완벽한 오리지널이 아니라 일종의 재탕이기 때문이다. 나도 이런 생각에 어느 정도 공감하는 부분이 있다. 그래서 서평을 모아 놓은 책이나, 유명한 사람들의 추천 도서들로 엮은 책들을 그다지 즐겨 보는 편이 아니다. 오히려 독서 목록에서 배제하는 편이고 나 스스로 독창적으로 독서편력을 만들어 가는 것이 훨씬 가치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내가 이 책을 집어들고 읽으면서 게다가 상당히 몰입하면서 독서를 즐길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저자만의 독특하고 매력적인 감성이 엮어낸 컬렉션과 그에 대한 솔직한 감상과 주장에서 잔잔힌 지적 희열을 느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일류대를 나오고 대한민국의 장관까지 지냈으며 지금도 늘 누군가를 가르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지만 결코 한 번도 위에 서서 아래로 가르치려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그가 읽은 책들이 좋은 책이니 우리가 꼭 읽어야 한다고 강요하지도 않고 자신의 느낌이 가장 보편타당한 것이라는 식의 은근한 권위를 내세우지도 않는다. 작가후기에 쓰여진 독자에 대한 당부는 이러한 저자의 입장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 야기는 단지 나의 느낌이고 생각일 뿐이니 당신들은 당신들의 느낌과 생각을 더 중요시 하기 바란다'라고, 저자는 실컷 300페이지에 달하는 책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고서 모든 것을 백지로 돌려 놓는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저자의 당부 말씀을 다는 다 들어드릴 수가 없을 것 같다. 저자가 제시한 독특한 컬렉션들과 거기에 덧붙여진 저자의 설명과 주장에 여하간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동양고전을 읽어보려고 한 번도 시도한 적도 없고 관심도 없었던 나에게 청춘의 독서 컬렉션 중의 '사기'와 '맹자'는 강렬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대상으로 다가왔다. 이 책이 아니었다면 아마 앞으로도 동양고전에 대해 관심을 가질 일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또 한가지 이 책을 읽으면서 즐거웠던 것은 내가 읽었던 책들에 대한 저자의 감상과 이해를 참고하며 내가 그 책을 읽었을 때 가졌던 생각들을 회고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나름 유명한 <죄와 벌>, <대위의 딸>이나, 나 또한 대학 초년생 때 제법 가슴을 두근거리며 읽었던 <공산당 선언>이나, 저자와 똑같은 이유로 책의 '명성'때문에 읽게 되었던 <광장>같은 것들이 그렇다. 내가 그 책들을 읽으면서 느꼈던 감정과 사유들이 꾸역꾸역 되살아 나는 느낌은 무척이나 새롭고 당황스럽고 즐거운 일이었다. 독서가 책과의 대화라고 하지만 정말이지 나와 이 책의 저자와 예전에 읽었던 책들의 저자들이 다 함께 원탁에 둘러 앉아 한 판 시끌벅적하게 회식이라도 하는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이 책의 영향으로 앞으로 나의 독서 영역이 조금은 덜 편협해질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가령 저자의 러시아 문학에 대한 조예는 남달랐는데, 난 도스토 옙스키의 <죄와 벌>이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정도를 읽은게 대부분이다. 러시아제정과 볼셰비키 혁명과 같은 시대적 상황도 잘 몰랐을 때인 중고등 학생때 읽은 것들이니 더 말할 것도 없다. 어느 정도 식견이 생긴후에는 고전에는 그닥 관심을 갖지 않았고 읽었다고 말 할 수 있는 것은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정도다. 이 책을 통해 나는 러시아의 고전(혹은 현대고전)에 다시 한 번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저자의 경험을 통해 그들의 문학이 한국의 근현대사 속에서 재해석 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정점은 맨 마지막 컬렉션인 <역사란 무엇인가>라고 할 수있다. 저자는 감히 이 책이 자신의 인생을 바꾸었다고 말했다. 자신의 인생을 바꾸거나 적어도 어떤 방향으로 확실히 이끌어 준 책을 마음에 품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마음 든든한 일인가. 그래서 저자는 <역사란 무엇인가>를, 마음이 길을 잃고 방황할 때마다 여러번 읽었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몇 번이고 길을 제시해주고 어두운 곳을 밝혀주는 책이란 그 사람에게 얼마나 가치있는 것인가! 나는 지금도 그런 책을 찾고 있다. 내 인생에도 적잖은 영향을 준 책들이 여러권 있긴 하지만 아직까지는 내게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해 주는 책은 이것이다, 라고 자랑(?)할 수 있는 건 없는 것 같다.
독서를 즐기는 사람 누구나가 저마다 다른 취향과 인생의 맥락 속에서 책을 읽는 것이기에, 유시민씨와 같은 경험이 없다고 해서 특별히 좌절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 같은 경우에는 내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이 책이 아니라 박재동씨의 '한겨레 그림판'이라는 일간신문의 한 코너였음을 생각하면 사람들은 다 저마다의 사연을 갖고 살아간다는 말이 새삼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책을 좋아하고 감히 독서를 취미라고 여기며 살아가는 입장에서, 앞으로 내게 어떤 책들이 어떤 의미를 던져주게 될 지 늘 설레이고 기대에 들뜰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 이 책을 통해 그러한 기대는 더욱 확연한 것이 되었다.
앞으로도 더 많은 책들과 만날 것이고, 꼭 좋은 책만을 읽게 되지는 않겠지만, 나도 유시민씨와 비슷한 나이가 되면, 그와 같은 멋진, 내 인생의 책 컬렉션이 만들어질 날이 오지 않을까 싶고 그렇게 기대해본다. 책과 저자들과 나와의 대화는 내 일생에 걸쳐서 계속될 것이고 그러한 한 인생은 결코 외롭지 않을 것이다. (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