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얼굴들 - 빛을 조명하는 네 가지 인문적 시선
조수민 지음 / 을유문화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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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빛이다.˝ 아파트 방등으로 대표되는 획일적인 조명에서 벗어나 빛 그 자체에 대해 진지하게 사유할 수 있는 책. 조명 하나에도 달라지는 삶의 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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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부정 - 복간본
어니스트 베커 지음, 노승영 옮김 / 한빛비즈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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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주일 전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 결과가 발표되었고, 같은 날 장편소설을 투고한 출판사로부터 답장이 왔다. 올해 목표했던 두 번째 책 출간은 이렇게 '0'으로 2021년이 종료되었다. 우울할 틈도 없이 아들이 덜 마른빨래들을 바닥에 내던지고 있었고, 강풍에 테라스 분리수거통이 넘어져 나뒹굴었다. 출간 제의도 전부 거절당하고, 공모전도 떨어지고, 창작지원금도 탈락한 지금 세상이 나를 향해 '이제 헛짓거리 그만하고 네 할 일이나 하쇼~' 비웃는 것 같았다. 사실 세상은 나를 비웃지 않는다. 애초에 내게 관심이 없다. 나라는 인간이 존재하는지는 아나? 자연은 인간에게 무관심하고 인간은 그 무관심을 견딜 수 없어한다.


이 땅에 사는 우리는 우주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우리에게 무엇을 줄 작정인지 알지 못한다. 우리에게는 칸트를 괴롭힌 물음-우리의 의무는 무엇인가, 이 땅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없다. 우리는 자신이 누구이고 왜 여기 있는지 까맣게 모른 채 살아가지만 삶에 의미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은 안다. 그렇다면 영웅적 행위를 다른 인간에게 위임해 이 행위가 우리에게 영생을 가져다줄 만큼 좋은지 하루하루 알아감으로써 이 말할 수 없는 신비를 당장 떨쳐버리는 것보다 더 자연스러운 것이 어디 있겠는가?

- 어니스트 베커 [죽음의 부정] 254쪽(강조는 인용자)


[죽음의 부정]은 '죽음'을 키워드로 독서 중에 우연히 만난 책이었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자마자 책을 주문했다. 삶이 정답지가 뜯어진 문제집이라면 이 책은 정답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해설지에 가깝다. 죽음의 관념, 죽음의 공포는 인간이라는 동물을 무엇보다 사납게 뒤쫓는다. 죽음은 인간 활동의 주된 원동력이다.(같은 책, 저자 서문) 우리가 삶을 영위하기 위한 모든 행동의 기원에 '죽음의 공포'가 숨어 있다. 그 공포는 인간이라는 동물의 독특한 진화과정에서 기인한다. 우리는 동물이지만, 언젠가는 죽어 벌레의 먹잇감이 될 몸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생각한다. 그는 상징적 자아이고 이름과 인생사가 있는 피조물이다. 그는 원자와 무한에까지 사유를 뻗을 수 있는 창조자다.(같은 책, 68쪽)


동물은 자신의 죽음을 미리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지만, 인간의 상상력은 인간을 현재에 고정해 두지 않는다. 병으로 앓는 몽롱한 머릿속으로, 지진이나 화산 폭발 같은 자연재해 뉴스를 목도한 눈으로, 가까운 이의 장례식장에 들어서면서 끊임없이 상상한다.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이게 끝일까? 내가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해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키운 이 모든 일들이 다 이렇게 '죽기 위해' 한 일인가? 내 존재 의미가 겨우 그 정도뿐이었나?


진짜 세상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끔찍하다. 세상은 나에게 내가 하찮고 두려움에 떠는 존재이며 늙어서 죽을 거라고 말한다. 환상은 이 모든 것을 바꿔놓는다. 나를 중요하고 우주에 필수적이며 어떤 면에서 불멸인 존재로 만들어준다. - 같은 책, 222쪽


죽음에 대한 공포, 삶의 무의미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인간은 삶을 지속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환상을 만들고 자신의 삶의 짐을 의탁할 영웅을 만들어낸다. 영웅은 위대한 가치이자 불멸하는 존재로 죽음을 초월한다. 영웅은 신이었고, 신의 대리인이었고, 왕이었으며,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 전쟁 영웅, 이데올로기, 돈으로 바뀌어 왔다. 종교는 인간의 존재 의미를 '신의 뜻'으로 해석해 주며 신민들을 안심시켰다. 이데올로기 대립이 극대화된 시기에 삶의 의미는 공산주의나 자본주의 둘 중 하나였다. 지금 대다수의 사람들은 돈을 버는 것을 목표로 삶을 정렬한다. 부동산, 주식, 코인 등 각종 투자 이야기가 대화 주제로 빠지지 않는다. 인간은 사회가 제공하는 확고하고 제한된 대안을 통해 보호받으며고개를 들어 자신의  너머를 보지만 않으면 막연한 안도감을 느끼며 삶을 살아갈  있다.(같은 책, 137쪽)


죽음에 대한 공포가 영웅주의로 이어지는 과정이 잘 드러난 작품이 최근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지옥>이다. 어느 날 갑자기 인간들은 천사로부터 지옥행을 통보받고 정해진 날짜와 시간에 지옥의 사자들이 찾아와 고통과 죽음을 선사한다. 지옥행 시연이 전국적으로 공개된 날 일상이 멈춘다. 아무도 출근하지 않고 누구도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평화롭다고 생각했던 일상이 무참히 찢어져 숨겨져 있던 실재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버렸다. 나한테도 지옥의 사자가 찾아오지 않을까?


공포가 불러온 혼란 속에서 사람들은 영웅을 찾아낸다. 이럴 줄 알고 미리 준비했다는 듯 나타난 새진리회 의장 정진수는 불안에 떠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지옥행을 고지받은 자들은 모두 죄를 지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마땅히 지옥에 가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더 정의로워져야 합니다'. 이것이 신의 뜻입니다. 그는 단숨에 영웅이 되고, 신의 뜻을 전달하는 새 시대의 교황으로 등극한다. 그는 인간들에게 의미를 만들어 준다. 저들의 죽음에 충분한 이유가 있으니 두려워 말고 일상을 영위하라. 내가 너희에게 환상을 가져다 주리라.


우리는 자신이 현실에 대해 근본적으로 부정직함을, 우리가 실제로는 자신의 삶을 통제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이 홀로 서지 못함을, 자신을 초월하는 무언가-우리가 깃들어 있으며 우리를 지탱하는 관념과 힘의 체계-에 늘 의존함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 힘이 늘 뚜렷한 것은 아니다. 공공연히 신이거나 (나보다) 강한 사람일 필요는 없지만,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활동, 열정, 유희에 대한 헌신, 그리고 안락한 거미줄처럼 사람이 자신을 잊고 자신이 스스로의 중심에 자리 잡지 않았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하는 삶의 방식이 그런 힘을 가질 수는 있다. 우리 모두는 자기망각적 방식으로 지탱받는 방향으로 이끌린다. -같은 책, 109쪽


하루 한 회씩 6일 간 시청한 <지옥>은 충격적이었다. 웹툰을 먼저 봤음에도 충격적이었다. 영상화된 지옥 시연 장면이 너무나 현실적이라 실제로 밖에서 일어나는 일 같았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지옥의 사자들은 죽음 그 자체를 상징한다. 그들이 왜 하필이면 그때 나를 찾아오는지 이유는 없다. 길을 걷다 차에 치이거나 병원에 갔는데 암 말기 선고를 받는 것과 같이 죽음은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없이 들이닥친다.


죽음에게 이유를 달아 전시한 새진리회가 진정한 영웅일까? 드라마를 보면 전혀 그렇게 생각할 수 없다. 새진리회를 창시한 정진수부터가 20년 전 고지를 받고 시연 당일까지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평범한 인간이었다. 어떻게 인간이 딴 사람에게 신과 같은 '모든 것'이 될 수 있겠는가? 어떤 인간관계도 신성의 짐을 감당할 수 없으며, 그러려고 시도했다가는 양쪽 다 그 나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같은 책, 269) 우리는 손쉽게 자신의 실존의 짐을 떠넘길 대상을 찾아 두리번거리지만, 그는 신이 아니기에 실패할 수밖에 없고, 그의 실패는 곧 나의 실패다. 새진리회는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만든 지옥 시연의 이유는 완벽하지 않았다. 죄가 없는 선량한 인간도 고지를 받았다. 죽음은 평등하기에 누구나 받을 수 있다는 무작위성을 숨기기 위해 화살촉이라는 폭력을 쓰고, 폭력은 피해자를 양산하며 그들이 선언하는 '정의'와 멀어진다. 상대방이 나의 '모든 것'이라면 그의 모든 결함은 나에게 심각한 위협이 된다.(같은 책, 270쪽)


이 삶을, 실존이라는 무거운 짐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손 놓고 숨만 쉬면서 명줄만 잡고 있어야 할까? 책에서 제시한 해결책 중 하나가 예술이다. 결국 삶의 의미를 타인에게 기대지 않고 스스로 만들어내야 한다면, 창조적인 활동으로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예술 아닌가.


예술이라는 작업은 실존의 문제에 대해-외부 세계의 실존뿐 아니라(공유된 무엇에도 의존할 수 없는, 고통스럽도록 분리된 존재인) 자신의 존재에 대해-창의적 유형이 내놓는 이상적 답이다. 그는 극단적 개별화, 지독히 고통스러운 고립의 부담에 답해야 한다. 그는 자신의 고유한 재능을 발휘해 불멸을 얻는 법을 알고 싶어 한다. 그의 창조적 작업은 그의 영웅주의를 표현하는 동시에 정당화한다. 랑크 말마따나 '사적 종교'인 것이다. 창조적 작업의 고유함은 그에게 개인적 불멸을 선사한다. 이것은 그 자신의 '너머'이지 남들의 '너머'가 아니다. - 같은 책, 277쪽


<지옥>의 클라이맥스에서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가 고지를 받고, 3일 뒤 시연에서 아기를 감싼 부모의 힘으로 처음으로 고지받은 인간이 살아남았다. 기적과도 같은 현상 앞에서 사람들은 새진리회를 거부하고(아기를 잡으러 온 사제들을 체포한다) 살아남은 아기를 보호한다. 시즌 2의 중심인물이 될 이 아기가 새로운 영웅이자 메시아로 정진수의 자리를 차지할지, 또 다른 창조적인 역할을 맡게 될지는 기다려 봐야 할 일이다. 지옥의 사자들 앞에서 우리 인간은 어떻게 나의 삶을 지켜야 하나? 이 드라마 자체가 죽음-삶의 실존적인 문제에 대한 연상호 감독의 창의적인 답이라고 할 수 있다. 정답이 아닐지라도 성실하게 채운 시험지의 답안.



드라마를 다 본 뒤 [죽음의 부정]을 한 번 더 읽었다. 책상 위에 책을 올려놓고 일주일 넘게 손도 대지 않았던 노트를 펼쳤다. 매일 한 장씩 채운 노트 안 세계가 잠시 멈춘 그대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문장을 쓰자 주인공이 한 발 앞으로 나아간다. 두 문장에서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다. 정해진 분량만큼 하루의 작업량을 채운다. 매일 한 장씩 쓰면 한 달에 30장이고 세 달이면 새 장편소설 초고 하나는 충분히 완성할 수 있다. 새 원고로 새롭게 투고하고 지원하고 책을 만들 수 있다. 내가 쓴 소설이 나의 존재를 정당화한다. 이것이 나만의 답이다.


하지만 인간은 그저 한가로이 노니는 원형질의 눈먼 덩어리가 아니라 이름을 가진 존재요, 단지 물질이 아니라 상징과 꿈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피조물이다. 그의 자기가치감은 상징적으로 구성되며 그가 소중히 여기는 자기애는 상징을 먹고 산다. 상징은 자신의 가치에 대한 추상적 관념이요, 공기 중과 마음속과 종이 위에서 소리와 말과 이미지로 이루어지는 관념이다. 이는 유기체적 활동에 대한, 또한 통합과 확장의 쾌락에 대한 인간의 자연적 열망을 상징의 영역에서, 따라서 영원불멸토록 무한히 충족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나의 유기체는 물리적 팔다리를 움직이지 않고서도 세계와 시간의 차원으로 확장될 수 있다. 숨을 헐떡이며 죽어가면서도 영원을 내면에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같은 책, 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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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동 이야기
조남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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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해외에서 가장 많이 팔린 한국소설이 조남주 작가님의 [82년생 김지영]라는 기사를 읽었다. 소설이 현실의 거울이라면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비추는 작가님의 거울이 이번에 향한 곳은 아파트. 좋은 기회를 얻어 작가님의 신작 소설이 정식으로 출간되기 전 먼저 읽을 수 있었다.

일곱 편의 소설이 이어지는 연작소설 [서영동 이야기]의 세 작품을 읽었다. 서울의 동네 서영동, 등장인물의 대사로 추정해 용산-마포-목동 라인의 서울 서쪽 강북 지역으로 추정되는 지역. 동아, 현대, 우성, 노블엔 등의 아피트가 있고 '서사사'카페가 활성화된 곳. 가장 한국적인 무대가 있다면 아파트가 아닐까 생각한다. 아파트로 대표되는 집값이 내 '부'를 상징하고, 동네를 대표하고, 아이의 교육 미래가 되며, 부모의 노후가 되는, 전 세대를 아우르는 배경이자 목표, 문제의 핵심이니까.

아파트라는 재산의 가치를 둘러싸고 담론화되는 과정을 상세히 보여주는 <봄날아빠(새싹회원)>

아파트 거주민에 가려진 경비원을 조명한 <경고맨>

아파트가 곧 학군이 되고 영유(영어유치원)부터 시작되는 교육열의 중심지로 형상화되는 <샐리 엄마 은주>

뒤에 이어지는 작품들도 서영동의 아파트와 그곳에 사는 이들, 일하는 사람들, 이해관계가 얽힌 인간 군상을 샅샅이 비출 것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현실의 뉴스들-아파트 값을 올리기 위해 유명 동네 이름까지 넣어 바꾸려고 소송까지 불사하는 사람들, 경비원 갑질, 임대아파트를 배척하는 멸칭들, 현재진행형 사건인 아파트 부실공사 등등등...수많은 사회문제들이 아파트를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다.

가장 한국적인 사회문제를 알고 싶다면 아파트를 보아라. 인간의 기본조건인 의식주가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의 가치에 거품이 낄 때 보여지는 인간 행동 양상을 관찰하라. 서영동은 서울, 한국의 동네다. 아파트가 많고 그 누구보다 치열한 삶의 현장.

#서영동이야기 #조남주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하니포터2기_서영동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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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시대 열린책들 세계문학 48
보리슬라프 페키치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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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잔혹동화나 어른을 위한 동화 타이틀로 어린이 동화를 재해석한 책들이 유행한 적 있었다. 빨간모자의 엄마는 왜 숲속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빨간색을 권유했을까? 콩쥐팥쥐의 진짜 결말은 무엇일까? 같은 류의 이야기들. 보리슬라프 페키치의 소설 [기적의 시대]를 자극적인 타이틀로 소개해 본다면, '잔혹성경'같은 표현을 붙여야 하지 않을까.


서점에서 우연히 서가에 꽂힌 이 소설을 꺼낼 때만 해도 내가 이걸 읽게 될 줄은 몰랐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작가의 낯선 소설, 유고슬라비아 작가라, 그런데 유고슬라비아는 이제 없어진 나라가 아닌가? 책을 펼쳤는데 숨겨진 쪽지가 있었다. 이 서점만의 보물찾기 이벤트에 당첨된 것이다. 우연도 운명이라 생각하고 상품인 마들렌과 함께 [기적의 시대]를 챙겼다. 이런 우연도 작은 기적이라면 기적이겠지.


나는 종교가 없고, 양가 부모님도 종교가 없으시고, 종교적인 삶과 무관하다. 성경은 문화적인 기본 상식선에서 아는 정도로, 예수는 12월 25일에 태어났고 십자가에 매달렸다 3일 만에 부활한 사람,아니 인신, 신인인가? 아무튼 최소한의 지식만을 가진 상태로 성경 패러디 소설을 읽었다.


사람의 아들이자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가 인간을 구언하기 위해 이 땅에 내려와 열두 제자를 거느리고 각종 기적을 일으키며 자신의 능력을 입증한 뒤 십자가에 매달려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은 뒤 부활한 과정과 그 과정을 서술한 신약성경. 성경은 예수가 문둥이의 병을 고치고, 벙어리의 입을 열고, 앉은뱅이를 일으키며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죽은 자를 살아나게 하는 기적을 이야기한다. 저 분의 권능을 보라! 이분이 우리의 왕이시다! 기적에 매료된 추종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 떠난 뒤, 기적의 무대 위에 남은 눈 뜬 자들, 깨끗한 피부의 여인, 말을 할 수 있게 된 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게 치유된 사람들은 건강한 몸으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성경에는 그 뒷이야기가 안 나오지만 아무튼 그렇겠죠 뭐.....


- 254쪽, 하지만 그 기적이라는 것이 우리 영혼에는 어떤 변화도 일으켜 놓지 못했어요. 그 까닭은 영혼이라는 것은 불멸하는 것, 하느님의 영혼과 밀접하게 맺어져 있는 것, 따라서 다시 빚어질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죄악은 우리 육체로부터 지워졌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스스로 기억하는 죄악, 스스로 간구하는 죄악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육체는 영혼에게 복종하지 않았고, 따라서 영혼은 자격을 상실한 육체 앞에서 역시 무능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성성의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예수의 기적은 과연 기적의 대상을 위한 것이었을까? 예수 자신의 구원자로서의 예언을 실현시키기 위한 도구로써 이용한 것이 아닐까? 자신의 권능을 증명하기 위해 죽은 자를 살리고, 예수의 기적을 부정하기 위해 지배 집단이 되살아난 자를 다시 죽이고, 다시 살리고, 죽이고, 시체를 숨겨 도망가고, 12사도들은 기적을 위해 시체를 찾아 추격하고, 소름끼치도록 우습다. 나는 이미, 운명에 갇혀, 예언에 갇혀 성서 말씀에 들어 있다.(417쪽) 예수 그 자신조차 신약성경의 예언을 실현시키기 위한 도구로 조종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유다는 왜 예수를 배신했고 예수는 그런 그의 배신을 미리 알고 있었는가? 배신 그 자체가 이미 짜여진 연극은 아니었을까?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 매달린 자가 진짜 예수일까? 사실 엉뚱한 자가 호송 도중 뒤바뀌어 대신 죽은 것은 아닐까...같은 만약에, 흥미로운 만약들.


- 433쪽 행위는 행위의 주체를 선행한다, 행위에서 벗어난 행위의 주체는 불꽃을 벗어난 온기와 같은 것이다, 창조 행위는 창조주보다 더 중요하다, 가르침은 선생보다 중요하다, 구원은 구세주보다 더 중요하다...


무교인의 눈으로 본 성서 패러디 소설은 오히려 성경을 흥미롭고 입체적인 텍스트로 다시 보게 만들었다. 일주일 전만 해도 존재조차 몰랐던 소설을 푹 빠져 읽었다. 번역도 번역이고, 술술 읽히는 문체와, 운명에 갇힌 인간을 말하는 주제 방식(운명 뒤에 사람 있어요!), 흥미를 자극하는 패러디 형식. 사실 소설이란 현실의 패러디가 아닌가.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의 기적은 독습의 산물입니다. 그의 기적은 새롭고도 독창적이었습니다. 가치 자체는 차치하고라도 그의 기적은 끝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그 기적으로부터 도움을 받으려 했다기보다는 그 기적을 통하여 달라지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이 위대한 기적을 이용하되 현재를 왜곡시키는 데 이용하는 것이 아니고 미래의 길을 밝히는 데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결국 그를 확고하게 믿었습니다. 전적으로 믿었습니다. - P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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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ntastique 판타스틱 2010.1 - Vol.22 Fantastique 판타스틱 (월간지) 1
판타스틱 편집부 엮음 / 판타스틱(월간지)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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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랑 작가님 데뷔작이 실린 바로 그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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