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미치 앨봄 지음, 공경희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대학생 시절, 춤을 좋아하고 학생들과 친구처럼 지내기를 즐겨했던 ‘모리’는 ‘나’의 교수님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나’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처음 맛보는 좌절감에 힘들어했고, 그 후 16년 동안 대학교 시절에 친했던 사람들과는 연락을 끊고 다른 직장인들처럼 일만 파고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루게릭병에 걸린 ‘모리’가 TV쇼에 출연하는 것을 보고 다시 그를 찾은 ‘나’는 화요일마다 ‘모리’와 대화를 나누며 자신이 잃었던 진정한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아이 때와 죽어갈 때 외에도, 즉 그 중간 시기에도 사실 우린 누군가가 필요하네.” 이 구절이 나에게 얼마나 다가왔는지는 하나님만이 아실 것이다.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우리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다. 의식주와 더불어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인 것은 다른 인간들과의 애정을 나누는 것이고, 그 것은 인간의 본능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요즘, 나는 그 어느 때 보다도 많은 외로움을 느낀다. 사실 개인적으로도 많은 일들이 일어나 굉장히 상처를 많이 받았기 때문인데, 그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을 주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나의 문제를 알게 되었고, 그 것 때문에 너무나 놀랐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다른 사람들과의 애정나누기를 거부하고 부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능을 인간이 부정하다니, 끔찍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학교에서 우리 사회의 이기심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사라지고 있어 큰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고 배웠지만, 예전에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사람들은 모두 서로에게 끊임없는 애정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은 그 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 자신부터 다른 사람들에게 애정을 주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인간은 혼자 살 수 없고, 애정을 주고받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어떤 사람들은 애정을 주는 것을 두려워하고 거부하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애정을 받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반항하지만, 사실은 너무나 큰 애정이 결핍되어 애정 받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들은 서로에게 관심을 갖고 사랑을 줄 수 있는 데로 주며,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태도를 취해야 한다. 그 것은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일 중 최고의 가치를 지닌 일이다.

 어렸을 때 우리 가족은 종종 눈을 감고 뒤로 넘어지면 다른 사람이 받아주는 게임을 한 적이 있었는데, ‘모리’도 학생들에게 그 놀이를 하도록 시켰었나 보다. 그 놀이를 성공한 여학생이 나타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믿을 수 없을 때, 느껴지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을 믿게 만들려면, 여러분 역시 그들을 믿고 있음을 느껴야 합니다. 여러분이 어둠 속에 있을 때조차도 말입니다. 여러분이 뒤로 넘어지고 있을 때에도...”

 우리나라에는 ‘눈 감으면 코 베어 간다’라는 속담이 있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요즘에는 특히 다른 사람들에 대한 믿음이 쉽게 가지 않는다. 사기, 보증, 성폭행에 관한 범죄들 중 많은 부분이 주변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작게는 경제적으로, 크게는 인간적으로 발전하려면 높은 신뢰도가 반드시 필요하다. 서로 믿음이 있고, 또 그 믿음을 배신하거나 배신당하지 않는다면 분명히 지금보다 더 살기 좋은 사회가 되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나는 “미치, 만일 저 꼭대기에 있는 사람들에게 뽐내려고 애쓰는 중이라면 관두게. 어쨌든 그들은 자네를 멸시할 거야. 그리고 바닥에 있는 사람들에게 뽐내려 한다면 그것도 관두게. 그들은 자네를 질투하기만 할 테니까. 어느 계층에 속하느냐로는 해결이 되지 않아. 열린 마음만이 자네를 모든 사람 사이에서 동등하게 해줄 걸세.”라는 모리의 말을 여러분에게 던져주고 싶다. 이 문장에는 너무나 많은 뜻이 담겨있기 때문이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관점으로 보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의 전체적인 주제와는 조금 거리가 있었지만, 나에게 와 닿았던 부분을 소개했다. 이 책의 독자로는 40대의 과거를 조금 후회스럽게 살았던 사람들이 적당할 것 같다. 모리가 말하는 인생은 나의 17년 인생과는 조금 멀게 느껴졌고, 현실감과 공감대 형성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리’는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고, 다른 독자들에게도 각자의 시각으로 많은 것들을 깨닫게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콜링 - 어둠 속에서 부르는 목소리
야나기하라 케이 지음, 윤덕주 옮김 / 스튜디오본프리 / 2008년 2월
평점 :
품절


 몇 년에 한 번씩 꼭 화재가 되는 범죄가 있다. 일어날 때 마다 온 국민이 두려움에 떨고, 경찰들의 야근이 잦아지며, 몇 백 개의 기사들이 실시간으로 인터넷이 올라오는 살인사건. 여자친구를 위해 살인을 저지른 사형수를 주인공으로 한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라는 책과 영화도 유명하다.

 그런데 나는 대한민국을 뒤흔드는 연쇄살인사건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궁금한 것이 있다. 연쇄살인범의 과거와 현재의 환경이 바로 그 것이다. 언젠가 TV에서 하는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는데, 연쇄살인범의 과거는 대부분 불행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나는 모두가 손가락질 하는 연쇄살인범에게 치가 떨리는 증오심 못지않게 동정심도 든다.

 이 책에서 너무나 강한 느낌을 받은 두 명은 욕조 속에서 녹아간 에이미와 그녀의 죽음의 원인을 제공한 시오리. 이들의 공통점은 추한 얼굴이었고, 그 공통점은 사회에서 죄로 취급되었다. 그리고 가장 기본적인 것 때문에 고통받던 그들은 서로 의지하고 사회를 비판하며 soulmate와 다름없는 친구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의 놀림거리가 된 것에 상처받던 그들은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각자 다른 방법을 선택했다. 에이미는 성형을, 시오리는 파괴를.

 에이미는 어릴 때 놀림을 받고 왕따를 당했던 기억 때문에 예민하고 소심한 성격을 갖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인터넷 카페에서 만난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 했기 때문에 그가 자신을 애인이라고 여겼다고 생각했던 그녀는 그 믿음이 배신당하자 큰 충격에 빠진다. 그 남자의 애인이라고 주장하는 예쁜 여자에게서 그녀의 외모를 비난하는 메일을 받고 결심 끝에 성형한 그녀. 대수술 결과 아름답게 변하지만, 추형 공포증에 걸려 시오리에게서 받은 혼합액을 주입하게 되고, 결국 크로이츠펠트 야콥병에 걸려 생을 마감하게 된다.

 에이미는 외모지상주의의 최대 피해자이다. 불행했던 학교생활과 부당한 대우, 열등감 등 모두 그녀가 아름답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번 생각해보자. 그녀와 관계를 맺었지만 아름답지 않아서 버렸던 남자와, 자신이 예쁘다고 그녀에게 폭언을 퍼부었던 그의 여자친구. 과연 그들의 행동이 옳은 걸까? 예쁘지 않은 것이 그녀의 잘못이었을까? 우리의 문화가, 우리의 사회가 자꾸 아름다운 얼굴을 강요하기 때문에 어느새 모두에게 세뇌된 아름다운 얼굴. 아름답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 고통 받아야 하는 많은 사람들. 이 글을 읽기 전의 당신을 생각해보라. 아름답다는 것을 부러워 하며 아름답지 않은 사람들을 보고 비웃지 않았던가?

 시오리 역시 실제 나이보다 20년을 늙어 보이는 얼굴을 가졌었던 여자였다. 하지만 자신에게 주사를 놓음으로써 원래의 자신 나이로 보인다는 것에 너무나 큰 만족감과 자신감을 느끼게 되고, 변한 자신의 모습을 보고도 관심을 갖는 남자가 없다는 것에 대해 분노를 느낀다. 에이미를 만나 친구가 되어 함께 그들을 욕하던 중, 성형을 해서 아름다워진 에이미가 자신과는 다르게 남자들의 관심을 받게 될 것에 질투와 배신감을 느낀 그녀. 치사하면 크로이츠펠트 야콥병에 걸리게 되는 치명적인 혼합재를 주사해 끝내 그녀를 죽이고 만다.

 외모지상주의의 비극적인 부분이 에이미의 사건이었다면, 무서운 부분은 이 것이다. 아름답지 않아서 심리적으로 계속 고통 받는 그들이 결국 분노와 억울함을 분출하기 위해, 사회를 비난하고 파괴하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는 것.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서는 외모지상주의의 피해자만 나타났지만, 앞으로는 범죄를 저지르는 피해자가 나타날 것이라는 것을 이 책에서 알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물론 법적으로는 시오리의 책임을 물 수 있고 또 도덕적으로도 벌을 받기에 합당하지만, 그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심리적으로 그녀를 계속 괴롭히고 압박했던 사회는 어느 나라의 것이었을까? 바로 우리들이, 우리 나라의 우리 사회가 그녀를 살인으로 몰아간 것이 아닐까?

 외모지상주의는 황금만능주의와 더불어 우리 사회를 대표하는 어떤 한 사상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외모지상주의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외형을 부정함으로써 많은 사회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많은 여성들이 지방흡입수술로 무리하게 살을 빼고, 쁘띠성형으로 살을 자르고 뼈를 깎는 것이 시집 잘 가기 위한 필수과정 중 하나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기 때문일 것이고, 또 어느새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회적 인식 때문일 것이다.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보자. 과연 외형이 아름답다고 모든 것이 아름다울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웃사이더
S. E. 힌턴 지음, 신소희 옮김 / 문예출판사 / 2007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계급이 존재할까? 이 책을 읽기 전 잠시 생각해 보자. 여기서 말하는 계급은 인도의 카스트제도와 같은 것이 아니라, 모두가 의식하고 순응하지만 직접 언급하기에는 너무나 예민한 것을 뜻한다. 어른들에게는 학벌, 경제력, 직업 그리고 사회적 지위 등에서 발생하고, 청소년들에게는 외모, 성적, 용돈, 대인관계에서 나타나는 우리 사회의 계급. 누구나 한번쯤 느껴보았을 것이다. 
 

  <아웃사이더>에서는 대체로 경제력을 기준으로 한 계급이 존재한다. 소셜과 그리저, 우리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은 그 계급에 이름을 붙이고 또 그 이름을 직접 부른다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는 그리저인 주인공인 포니보이와 함께 어울리는 댈러스와 자니, 소셜인 밥과 랜디, 체리를 통해 각 계급에 속한 인물들의 내적 갈등과 그 것을 이용해 계급에 대한 불만을 토하고 있다. 

  간략하게 소설의 내용을 설명하자면 이렇다. 포니보이와 자니는 영화관에서 체리와 그녀의 친구를 우연히 만나게 되고 잠시 어울리게 된다. 그 모습을 본 체리의 남자친구 밥과 그의 친구들은 그날 밤 포니보이와 자니를 습격하고, 친구의 목숨이 위험해 지자 자니는 밥을 찔러 죽인다. 잠시 다른 마을에 숨어있던 그들은 패거리인 댈러스와 함께 자백을 하려고 동네로 돌아가던 중, 화재가 난 교회 안에 아이들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불 속으로 뛰어든다. 아이들을 구했지만 생사를 헤매게 된 자니는, 소셜들과의 싸움에서 이겼다는 포니보이와 댈러스의 말을 듣고 끝내 눈을 감는다. 자니의 죽음은 냉혈인간 같았던 댈러스를 고통스럽게 했고, 결국 죽음을 자초하게 만들었다. 

  내가 지금까지 읽었던 소설 중에 등장인물 하나하나의 캐릭터를 가장 잘 표현하고 섬세하게 신경을 쓴 작품인 것 같다. 주인공인 포니보이와 자니, 체리와 밥뿐만 아니라 댈러스, 데리, 랜디...... 하나같이 아픔과 두려움을 간직하고 있지만 그 것을 표현하고 대처하는 방법이 각자 다른, 개성 있는 캐릭터들이다. 그 중 가장 나에게 다가왔던 인물은 바로 랜디와 댈러스이다. 

  소셜들은 선택받은 자, 특권층으로 돈도 많고, 머리가 좋고, 사회진출기회도 많은 소위 ‘엘리트’들이다. 랜디는 밥의 친구로, 술에 취해 자니를 초죽음으로 만들어 놓았었던, 나중에 자니가 밥을 칼로 찔러 죽이는 것을 본 소셜이다. 그는 사회의 암묵적인 동의에 의해 만들어진 그 계급을 그대로 인식했고, 그 결과 포니보이와 자니가 화재 속에 갗인 아이들을 구해준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어떤 사람이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해주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갑동보다는 충격이 훨씬 컸다. 왜일까? 

  그것은 사회가 ‘소셜은 엘리트, 그리저는 쓰레기’라는 문구를 개인에게 세뇌시켰기 때문이다. 소셜이든 그리저든 똑같은 사람인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들의 교육수준이나 생활수준과는 별개로 모두 인간이기 때문에 당연히 도덕적인 의식이 몸에 배여 있다. 하지만 사회는 개인을 쓰레기가 아니면 엘리트라는, 경제력과 학력을 바탕으로 한 흑백논리를 세웠는데, 더 심각한 문제는 그 흑백논리에 의해 그들의 도덕적인 면모까지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들의 학력과 경제력을 가지고 도덕적인 인간과 그렇지 않은 인간으로 나누다니, 말도 안 돼, 라고 작가는 외치고 있다. 

  그 흑백논리와 세뇌된 문구 때문에 많은 그리저들이 상처를 입었다. 대표적인 인물은 댈리스. 그의 패거리들조차 그가 폭발할 때에는 건들지 못할 정도로 냉정하고 폭력적인 그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듯 행동했고, 실제로 거의 그랬었다. 하지만 자니의 죽음이 그의 죽음을 불러온 것은 곧 댈러스에게도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애정이 있었고, 또 다른 이의 애정이 절실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그리저라는 신분을 떨칠 수가 없었던 그는, 점점 세상을 증오하고 멸시하게 되고, 어떤 일을 해도 즐거움을 느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니가 죽음으로써 자신이 표현하지 못했던 애정이 결국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흑백논리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은 그리저뿐만이 아니다. 소셜들은 사회적으로 ‘엘리트’라는 인식이 박혔고, 그 인식 덕분에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를 자제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고, 남들도 그들의 겉모습만 보고 그들이 무슨 일을 벌이든 소셜이잖아, 하고 통제하지 않았다. 그 결과 그들은 자신을 통제할 수 없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게 되었고, 그 불안감을 없애기 위해 또 자신을 방치해두는 사회에 반항하기 위해 더욱 큰 잘못을 저질렀다. 그리고 그 잘못들은 쌓이고 쌓여 결국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밥과 같은 결과를 낳게 만들었다. 
 

  “그게 그가 바란 거였어. 누군가가 자신에게 ‘안 돼’라고 말해주는 것, 누군가가 원칙을 정해주고, 한계선을 그어주고, 녀석에게 굳건히 딛고 설 무언가를 주는 것이. 사실은, 우리 모두가 그것을 원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계급이 형성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고, 그 것이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하지만 계급이 형성된다고 해도, 그 계급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옳지 않다. 그렇다면 경제력이나 학력을 기준으로 한 계급이 아니라, 인간성과 도덕성을 바탕으로 한 계급을 형성하도록 노력해 보자. 가장 높은 계급의 사람들이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지닌 사람들이라면, 그 아래 계급의 사람들도 그들을 동경하고 닮으려고 하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과 6펜스 푸른숲 징검다리 클래식 23
서머싯 몸 지음, 송무 옮김, 나현정 그림 / 푸른숲주니어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본론에 앞서, 먼저 이 질문을 던져본다. 당신에게는 확실한 꿈이 있는가? 만약 꿈이 있다면, 그 꿈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자신이 있는가? 만약 버릴 수 있다면, 그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만약 모든 사람들이, 심지어 가족들마저 당신의 꿈을 비웃고 험담을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곰곰이 고민한 후 그 생각을 정리해서 써보고, 한 번 더 읽어보자. 그리고 <달과 6펜스>의 첫 장을 넘겨보자.

 스트릭랜드는 중년의 남자로 조용하고 내성적이다. 그에게는 매력적이고 헌신적인 부인과 귀여운 아이들, 그리고 사회적 지위와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인정이 있었고, 모두는 그가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그림을 그리겠다는 생각 하나 만으로 집을 떠나 파리에 정착하게 된다. 몇 년 동안 파리에서 그림을 그린 후, 타히티 섬에서 아타를 만난 그는 평생을 그 곳에서 살며 그림에 전념하다 문둥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스트릭랜드의 인생은 나에게 강렬한 느낌, 설명하기 힘든 깨달음을 주었다. 먼저 그의 꿈. ‘나’도 말했었지만, 스트릭랜드는 아버지의 반대나 가족부양 등의 여러 가지 이유로 자신의 꿈을 보류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꿈을 잊지 않고 간직하고 있었으며, 결국 그 꿈을 위해 모든 것을 감수하고 파리로 떠나버린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스트릭랜드가 과연 화가가 될 필요가 있었을까? 그에게는 가족과 사회적 지위, 그리고 다른 이들이 부러움이 섞인 눈길 등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었다. 직업도 좋았고, 재산이야 노력하면 따라오는 것이 아닐까? 그가 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떠나가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나 컸다. 다른 사람들의 눈초리와 명예에 먹칠을 자초하는 셈이지 않은가.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간 이유는, 꿈에 대한 열정이 다른 어떤 것 보다 컸기 때문이다. 내가 스트릭랜드 였다면 꿈을 포기 했을 것이다. 왜? 내 꿈을 향해 달려가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잃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때까지 쌓아올린 모든 것들을 잃을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또 두렵기 때문이다. 나의 사회적 지위, 명예보다도 주변 이들의 시선이 두렵기 때문이다. 나는 당연히 인정받고 싶다. 다른 이들보다 더 행복하게, 더 잘 산다는 것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지켜야 할 것들은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스트릭랜드 였다면, 그가 내린 결정과 같은 결정을 내릴 수 있었을까?

 스트릭랜드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어쨌든 그림을 그려야 한다지 않소? 그리지 않고서는 못 견디겠단 말이오.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는 문제가 되지 않아요. 우선 헤어 나오는 게 중요하지. 그렇지 않으면 빠져 죽어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손도끼 사계절 1318 문고 18
게리 폴슨 지음, 김민석 옮김 / 사계절 / 200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개인적으로 나는 모험을 좋아한다. 몇 년 전에 나왔던 <~에서 보물찾기>나 <~에서 살아남기>는 시리즈별로 모두 있고, <엔리케의 여정>이나 <아더와 미니모이> 등의 책도 많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책은 숲 속에서 살아가는 책인데, 정말 자세하게 어떻게 살았는지 쓰여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책의 제목을 기억할 수가 없다.

브라이언이 어머니가 어떤 남자가 키스하는 것을 본지 얼마 후에, 부모님은 이혼을 했다. 아버지를 방문하려고 비행기를 탔는데, 조종사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리고 브라이언은 비행기는 호수가로 추락했고, 혼자 살아남았다. 모기떼가 극성을 부리는 그 곳에서, 어머니가 주신 손도끼와 운동화 끈으로 은신처를 만들고 불도 피우며, 나무도 자르고, 물고기도 잡았다. 그런데 어느 날, 밤에 일어난 회오리바람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잃고 만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모든 것을 이룬 후 비행기에서 생존가방을 찾으러 간다. 

굉장히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줄거리였다. 기발한 생각으로 손도끼 하나만을 사용해 불을 피우고 은식처를 만들고 거기에다가 물고기까지 잡다니! 정말 놀랍다. 물론 물고기를 잡거나 바보새를 잡을 때에 쓴 활이나 창은 그다지 새롭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또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인정하지 않거나 익숙해지지 않으려 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참 감탄스럽다.

내가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그가 비행기에 들어가는 장면이다. 생존가방을 찾으러 들어간 그 곳에, 조종석에 앉아있는 조종사의 머리가 흔들리고 있다니! 거기에다 물고기들로 인해 찢겨진 머리 살이 너덜거리고 있다니!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그리고 무섭다. 만약 브라이언이 그 비행기에서 나오지 못하고 그냥 묻혔다면, 그도 똑같은 일을 당했을 것 아닌가.

솔직히 나도 이런 경험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비행기가 추락해 모르는 사람들 몇 명과 함께 살다 보면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고 무서울 것 같기도 하다. 물론 그 상황에는 웃음이 어림도 없겠지만, 조금 익숙해지면 물고기를 잡거나 새를 잡는 것, 또 은신처를 만드는 것이 모두 재미있고 꿈같이 느껴질 것 같다.  이 책은 굉장히 재미있었지만 살아남는 방법이 그다지 신선하거나 놀랍지는 않아서 아쉬웠다. 나중에는 정말 맨 손으로 혼자 살게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꼭 읽고 싶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글로리 2009-10-05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모험의 책이 혹시 <나의 산에서>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