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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물리학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3월
평점 :
불가리아의 역사에 대해 지식이 있었다면 이 책을 좀 더 잘 읽을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품고 책장을 덮었다. 매우 특이한, 실험적인 형식으로 저 먼 신화시대에서부터 현재를 넘나들며 자신과, 가족과, 민족의 삶 속에 흩뿌려진 슬픔으로 만든 이야기로 끝없는 미로를 만들어 내는 이 소설을 솔직히 말해 무척 힘들게 읽었고, 사실상 반쯤은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그러나 다만 한 가지, 양자는 우리가 그것을 관찰할 때만 입자로 거동하듯, 인간의 존재 역시 누군가 바라보아 줄 때 온전히 존재할 수 있으며(p.372), 세상이 존재하려면 누군가가 끊임없이 세상을 지켜보아야 한다(p.374)는 생각으로 작가는 주변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관찰하고, 수집하고, 공감하고, 슬퍼하며 이런 형식으로 기록했던 것은 아닐까 어렴풋이 추측해 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동유럽 국가들이 겪은 역사와 긴밀한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나의 무지가 더욱 아쉬웠다.
우리가 존재한다면 그건 우리가 관찰되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에게서 절대로 눈길을 거두지 않는 무엇 혹은 누군가가 있다.
그것이 더 이상 지켜보지 않을 때, 우리에게서 고개를 돌릴 때 죽음이 온다.
P.373
소설 속 화자의 '강박적 공감-신체화 증후군'이라는 병으로 인해 그의 할아버지, 고모할머니, 살면서 만난 사람들, 심지어 인간이 아닌 생명에까지 '이입'하며 발견한 생의 슬픔들 속에서 작가는 반복적으로 신화 속 영웅 테세우스가 무찌른 괴물, '미노타우로스'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가 무엇을 중심에 두고 세상을 바라보는지에 따라 어떤 영웅신화가 어떤 학살과 학대와 차별의 증거가 될 수 있는지, 그러니까 우리는 어떤 입장에서 세상을 관찰할 것인지 즉, 어떤 세상이 존재하게 만들 것인지를 고민하게 만드는 지점이었다.
타인의 슬픔에 얼마나 공감할 수 있는가. 몇 달 전 독서모임 친구들과 함께 읽고 이야기 나누었던 책,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읽고 나서 내내 머릿속에 머물렀던 질문이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금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나의 대답은 여전히, 백 퍼센트 공감하지는 못하더라도 다만 그 슬픔의 존재를 알아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고 싶다는 것. 타인의 슬픔을 모른척하지 않는, 없는 취급하지 않는 사람이고 싶다는 것. 이 소설 속 화자처럼 타인의 고통을 신체화하는 것 까진 무리일지라도 누군가의 슬픔을 바라봄으로써 온전히 존재할 수 있게 해 주는 사람이고 싶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슬픔이 다만 온전히 존재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