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의 심장 가까이 암실문고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지음, 민승남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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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간과 다음 순간 사이, 과거와 미래 사이, 그 틈새의 하얀 모호함. 원을 그리며 도는 시계의 분 표시 사이에 있는 공간처럼 비어 있는 것. 조용히 죽은 채로 드러나는 삶의 본질, 한 조각의 영원. 어쩌면 삶의 한 시기를 다른 시기와 가르는 건 고요한 찰나일지도 모른다. (p.250)"

지난달 을유 서포터즈 모임에 갔을 때, 편집자님, 그리고 마케터님 세 분 모두가 '쉽지 않은 책'이라고 하셔서였을까, 시작부터 조금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펼쳤었다. 이미 '어려운 책'이라는 선입견의 장막이 드리워져 있는 상태여서 더욱 책에 몰입하기가 어려웠었다. 의식의 흐름을 따라 상황을, 그 상황 속에 떠오르는 이미지와 상징들을 글자로 쏟아내는 주아나의 날것 그대로의 문장들이 낯설고, 때로는 두려웠고, 때로는 슬펐고 애처로웠다. 줄거리를 묻는다면 단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을법한 소설이지만 이 소설은, 줄거리가 중요한 소설은 아니었다. 우리의 하루를 생각해 보자. 집에서 나와 출근 후에 이런저런 업무를 마무리하고 퇴근. 이 간단한 '줄거리' 속에서 우리의 머릿속에선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싹을 틔우고, 피어나고, 지고, 시들었다, 폭발하고, 부수어지는지를. 이 책엔 그렇게 매 분 매 초 본능적으로 야성적으로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의 파편들이 모조리 문자화되어 있었다.

처음엔 그녀의 '이야기'를 이해하고 싶었지만 결국 그녀의 생각의 흐름 그 자체에 온 마음을 내맡겨 버리게 만든 작품이었다. 그렇게 그 날것의 문장들 사이를 헤매다가, 더없이 예리한 문장에 베일 때의, 그 아찔한 희열의 순간. 그 순간을 경험하는 것이 이 책을 읽는 가장 큰 기쁨이었다.

어쩌면 이 책은 326페이지짜리 산문시였을지도 모르겠다. 미묘한 불쾌와 미묘한 희열이 뒤섞여 정말 묘한 느낌을 주는 이 불온하게 아름다운 붉은색의 책을 오래전 읽었던 마찬가지로 불온하게 아름다웠던 배수아 작가님의 <뱀과 물>옆에 놓아둔다. 흑과 적, 참으로 불온하게 잘 어울린다. 두 작가님의 책을 딱 한 권씩밖에 읽지 않았음에도 감히, 닮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짧은 식견으로 무모하게 내려버린 판단일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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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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