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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벵하민 라바투트 지음, 노승영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6월
평점 :
내가 좀 더 물리학, 수학을 잘 알았더라면 이 소설을 온전히 즐길 수 있었을까? 읽다가 이 책을 이해하길 멈출까 하고 고민하지 않았을까? 그래도 나름 문과생의 뇌보다는 이과생의 뇌에 가깝다고 생각해 온 나였는데 실은 이도 저도 아닌 뇌의 소유자였나 봐 하며 헤벌쭉 웃지 않을 수 있었을까? 어떤 책을 읽으며 나의 무식과 대면하게 될 때가 있다. 어떤 경우엔 스스로의 무식에 몸서리를 치며 자괴감에 빠지는데 또 어떤 경우엔 담담하게 무식을 인정하게 된다. 너무 거대한 지식 앞에선 으레 후자의 입장을 취했고,... 이 책 역시 후자의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다섯 편의 팩션이 수록된 이 책을 마지막 장까지 손에서 놓지 못한 이유가 있다. 위대한 발견의 이면, 그리고 위대한 발견을 위해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일의 이면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들어 결국 세상을 이해하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함을 이야기하고야 마는 작가의 의지 때문이었다. 푸른 안료를 얻기 위한 실험의 부산물로 발견되어 후에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데 사용된 시안화물, 그리고 공기 중에서 질소 채취에 성공하여 인공비료를 개발함으로써 인류의 식량 생산 문제를 해결한 한편 저 시안화물을 이용하여 1차 세계대전 당시 독가스의 개발과 살포에 앞장서 사람을 살리면서도 죽이는 데에 지식을 사용한 유대인 화학자의 이야기, <프러시안블루>로 첫 작품을 시작하여 어떠한 거대한 발견의 순간을 마주하기까지 어떤 수학자와 어떤 과학자들이 어떤 극한의 순간까지 자신을 몰아붙이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슈바르츠실트 특이점>, <심장의 심장>,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로 이어진다.
범인으로서 천재의 삶을 내 어찌 이해할 수 있으며, 이들의 극한의 극한의 극한으로 치닫는 삶이 사실 약간 진절머리 나서,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의 중반부부터 아, 이 책을 이해하길 멈출까 고민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결국 1927년 10월 24일 코펜하겐에서 막스 프랑크, 마리 퀴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하이젠베르크, 슈뢰딩거, 닐스 보어 등 스물아홉 명의 천재들이 한자리에 모여 "전통과 가차 없이 결별하고 물리학은 실재가 아니라 우리가 실재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에만 관여해야 한다고 주장(p.224)" 하여 "과학의 토대 자체를 뒤흔들(p.221)"고 하이젠베르크가 "우리 시대의 과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객관적이고 초연한 관찰자로서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벌어지는 게임의 행위자로서의 우리가 자연과 맺는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p.225)"이라고 이야기하는 결말, 그리고 뒤이은 짧은 마무리 소설 <밤의 정원사>를 읽고 나서야 이 책의 제목이 온전히 내 마음에 포개어졌다. 그리고 위대한 깨달음을 얻었으나 그 순간 '세상을 이해하기를 멈추기로' 한 그로텐디크와 한때 수학자였던 밤의 정원사의 마음을 깊게 생각해 본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이해하길 멈추지 말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책을 다 읽고, 다시 가장 첫 번째 소설로 되돌아가야 했던 이유 또한 거기에 있다. 작가의 말에 소개한 책들 중 몇 권을 찾아 읽어보아야겠다. 월터 무어의 <슈뢰딩거의 삶>과 제발트의 <토성의 고리>을 말이다. 물론, 두 책을 읽으면서 소름 끼치도록 무식한 나를 담담하게 인정하고 말 테지만.
*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책을 읽고 쓴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