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읽은 책 중 하나인 호프 자런의 <나는 풍요로웠고, 지구는 달라졌다>가 방대한 데이터를 기초로 명확한 숫자를 제시하며 현 상황의 위기를 그저 담담하게, 그러나 조목조목 설명해 줌으로써 경각심을 일깨우는 것과는 조금은 결이 다른, 그러나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정확히 일치하는 기후 위기에 관한 책, #시간과물에대하여 를 읽었다.
마그나손 작가는 빙하 곁에서 태어나 빙하가 사망선고를 받기까지의 긴 시간을 지켜보아온 조부모와의 삶, 달라이라마와의 만남을 준비하다 북유럽 신화와 힌두교와의 연관성을 발견하며 깨닫게 된 신화 속의 연결고리, 어린 시절 본 다큐멘터리를 보고 다짐했던 대로 악어의 보호를 위해 연구자로 살다가 세상을 떠난 외삼촌의 삶에 대한 이야기 등을 보따리에서 풀어낸다. 전혀 연결점이 없는 것 같은 이야기들의 종착점은, 한 곳이었다. "이제 우리는 전과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는 모든 연장과 모든 장비와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다. 행동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조상과 후손을 둘 다 실망시킬 것이다.(P.296)" 더 늦기 전에, '오래된 근시안의 신, '탐욕'(p.254)'에의 믿음을 거두고 더 멀리 내다보아야 한다는 외침이 한가운데 말이다.
마그나손은 1809년 아이슬란드에 군주제를 폐지하고 민주주의를 도입하고 싶었던 예르겐의 '빈자가 부자와 똑같은 발언권을 가질 수 있다는 주장'은 일반 사람들의 현실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 생각, 상상할 수 없는 낯선 개념이었기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고 이야기한다. 새로운 단어와 개념을 이해하는 데는 수십 년, 심지어 수백 년이 걸리기도 한다고. 아이슬란드의 완전한 독립은 그로부터 140여 년이 지난 후인 1944년에야 달성되었다는 이야기를 읽으며 갑자기요? 갑자기 역사 이야기를요?라고 어리둥절해 있을 때, '자유'나 '평등'과 같은 단어와 같이, '해수산성화', '지구 온난화', '환경위기'라는 단어 역시 그때의 '자유'와 '평등'처럼 지금 우리의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사람들이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다며 슬쩍 샛길에서 빠져나온다.
'자유'와 '평등'의 개념을 이해하는데 걸린 100여 년과 '환경위기'의 개념을 이해하게 되는데 걸릴 100여 년의 시간의 무게가 과연 같을까. 더 좋은 것을 깨닫는데 걸리는 희망의 시간과 완전히 나쁜 것을 깨닫는데 걸리는 절망의 시간이 같을 리 없다. 게다가 1800년대의 100년 동안의 변화의 속도와 2000년대의 속도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르다. 얼음이 물이 되는 -1도와 0도, 그 사이. 물이 수증기가 되는 99도와 100도, 그 사이. 무언가 전혀 다른 것 변해버리는 급변점은 그 한순간이겠지만, 실은 우리는 차근차근 단계를 밝아 변화의 순간을 맞는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 한순간의 티핑포인트를 향해 돌진하는 중인 것이다. 우리의 삶이, 지구가, 급변하는 급변점이 어디인지 아직 우리는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늦어버린 때라는 것만큼은 안다. 우리는 그 급변점을, 영원히 알아서는 안 된다는 것 또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