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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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타와 마리아       (루가, 10장 38-42절)

예수의 일행이 여행하다가 어떤 마을에 들렀는데 마르타라는 여자가 자기 집에 예수를 모셔 들였다. 그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 시중드는 일에 경황이 없던 마르타는 예수께 와서 "주님, 제 동생이 저에게만 일을 떠맡기는데 이것을 보고도 가만 두십니까? 마리아더러 저를 좀 거들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주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가지 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된다."

.....................

고등학교 시절 처음 영세 받았을 무렵, 이 대목이 이해가 안되었던 것이 기억난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에 걸렸던 나로서는 마르타의 입장이 너무나 공감이 되면서,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두둔해 주시는 부분을 이해해 보려 해도 이해되지 않았다. 손님이 집에 오시면 당연히 음식을 대접해야 할텐데, 예수님 발치에 앉아서 말씀만 듣고 있는 마리아가 얄미워 보였다. 그건 아마도 대접 잘 받아야 환대받은 느낌을 받는 부모님의 영향도 컸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두 분은 손님이 오시면 대접 잘 하려 노력했고(마음에 없어도) 손님이 가고 나면 싸우곤 했다. 엄마는 '나 힘든 생각은 안 해주고 남 생각만 해서 손님을 불러 온다.'고 짜증내고, 그리고나서 며칠 후에는 '어떤 사람은 대접받을 줄만 알지 사람을 초청할 줄 모른다.'고 판단하고, '어디 먼 데 잔치집에 갔더니 변변히 젓가락 대 볼 데도 없어서 화가 났다.'고 판단하셨다.(아버지나 나처럼 남의 험담에 예민한 사람들은 이런 판단에 마음이 흔들리며 '그렇게 하면 흉잡히는구나.'하고 마음에 새겨 두게 된다. 그래서 아버지는 또 다른 사람들을 초청하곤 하셨을 것이다, 아마도.) (엄마에 대해 이런 평가를 하는 것도 판단이다. 사실, 엄마는 내가 갖고 있지 못하는 장점을 많이 가지고 계신다. 다만, 어린 시절 정서적 상처 때문에 화를 잘 낸다는 걸 알고 나서도 남을 평가하는 엄마 대하기가 가끔 마음 편치 않은 내가 더 문제지. 내가 아직 덜 치유됐기 때문일 것이다. 화난 감정 이야기 하고 나면 엄마는 마음 편해질텐데...)

요즈음에야 예수님 말씀이 받아들여진다. 예수님으로서는 마르타가 예수님 일행을 대접하고 싶으면 스스로가 할 수 있는만큼 하기를 바라셨을 것이다. 혼자서 하기 힘들만큼 크게 대접하며 속상해 하기를 원치 않으셨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 일행이 기뻐하는 걸 보며 마르타가 기뻐하기를 (수고한 결과를 즐기기를) 바라셨을 것이다. 마리아가 대접보다는 예수님 말씀을 듣기를 원하면 그렇게 해서 마리아가 기뻐하기를 바라셨을 것이고. 그리고나서, 마리아도 기쁨 속에, 대접할 기회를 찾아 대접하게 될 것이다. 오히려, 마르타처럼 스스로의 생각에서 나온 대접이 아니라, 예수님의 입장을 헤아려서 예수님께 꼭 필요한 것을 대접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여자들의 마음을 세심하게 파악하고 계시면서, 누구의 편도 들어주지 않으면서도 예수님의 입장을 확실히 밝히시는 태도이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생각 못 했는데, 예수님께서 마르타를 부드럽게 바라보시면서 "마르타, 마르타"하고 다정하게 부르시며 이런 이야기를 하셨을 거고, 마르타는 그 말씀과 氣에 정화되어 마리아를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다. (참고로, 신부님 말씀에 따르면, 마르타는 교회에서 성녀로 인정되었고 마리아는 성녀로 인정되지 않았다고 한다. 중요한 건 아니지만.)

조금 전에 날씨가 화창한데 오늘따라 황사가 심하다고 하는데다 감기에 걸려서, 산책 하는 것을 포기하고 베란다 창가에 의자를 내놓고 책을 읽으려는데(3층이라서, 나뭇가지에 새로 돋아나 제법 자라난 연초록 잎사귀들이 창 밖에 가득하다.), 새장에 있는 잉꼬들 곁에 앉으니 잉꼬들에게 상춧잎을 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가져다 주니 반가워한다, '곁에 앉기'가 새삼 마음에 와닿는다. '곁에 앉기' 또는 '발치에 앉기'(직접 대면하든, 지면을 통해서든)가 관심의 시작이라는 것. 위의 성서구절이 떠올라 정리해 본다. 다시 베란다로 나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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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가지 예수 모습 中,                           안셀름 그륀,  분도출판사

22.어진 목자 예수

예수께서 사용하신 어진 목자라는 표현에는 고대인들의 간절한 그리움이 잘 나타나 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께서 백성을 이끄시는 참된 목자라고 생각했다. 모세는 하느님의 분부를 받아 백성의 목자이자 지도자가 되었다. 그리스 사람들은 넓은 초장에서 양 한 마리를 어깨에 매고 있는 목자의 모습을 상상했다. 초장은 낙원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스 사람들은 그들이 그리는 이상향과 목자를 연관지어 생각했다. 다른 많은 문화권에서도 목자는 사려깊게 보살피는 아버지의 모습, 아버지처럼 인간을 보살피는 하느님의 모습을 나타낸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스라엘과 그리스 사람들의 이러한 그리움을 그대로 물려 받았다. 그래서 예수님을 하느님처럼 백성을 생명으로 이끄는 목자로 여겼다. 그리스 사람들은 노래의 신 오르페우스를 착한 목자의 모습으로 그렸다. 오르페우스의 노래를 들으면 야생 동물도 순해지고 죽은 사람들도 다시 살아났다. 그는 늘 아름다운 전원에서 양과 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에게서 오르페우스를 보았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우리 안의 야성을 길들이고 죽은 것을 살려 내시는 거룩한 음유시인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어진 목자는 인간의 영혼에 잠재된 구원의 전형이다.

예수님은 당신을 이렇게 말씀하신다. : "나는 착한 목자입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습니다(요한 10,11). 착한 목자의 특징은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끄시며 그들을 위하여 몸 바치신다. 늑대들로부터 양들을 지키는 목자처럼 예수님도 위험을 무릎쓰고 제자들을 지키며 그들을 위하여 죽음을 마다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써 양들에게 닥치는 온갖 위험을 막아 내신다. 십자가는 양우리를 넘어 오려는 늑대들을 막아 주는 든든한 보호막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착한 목자라고 다시 한번 말씀하신다. : "나는 착한 목자입니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는 압니다.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습니다(요한 10, 14-15). 예수님은 남녀 제자들을 잘 알고 계셨다. 제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시며 이름을 모두 알고 계셨다. 목자와 양들은 그들만의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예수님은 당신의 양들을 사랑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노래로 사람을 매혹시킨 오르페우스같은 느낌을 받는다. 옛날부터 오르페우스가 부르는 노래는 사랑의 노래로 여겼고, 목자들은 사랑의 가수로 통했다. 성탄 노래가 목자들의 노래인 것도 다 그런 이유이다. ...목자들이 부르는 노래에서 에수님의 제자 사랑이 느껴진다. 이런 노래에는 제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예수님의 사랑이 담겨 있다.

예수님은 마태오 복음과 루가 복음의 '잃었던 양 비유'에서 자신을 목자에 비유하신다. : "여러분 가운데 어떤 이가 양 백마리를 가지고 있다가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둔 채 잃은 것을 찾아낼 때까지 뒤쫓아다니지 않겠습니까? 그러다가 찾아내면 기뻐서 어깨에 메고 집으로 가서 벗과 이웃을 불러모아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양을 찾았소." 할 것입니다(루가 15, 4-6).

*사실, 나는 이 대목이 마음에 와 닿지 않았었다. 합리적이고 계산적이며 목적지향적인 사고방식에 젖어있던 나로서는 아흔아홉마리 양을 광야에 두고, 잃어버린 양 한마리를 찾아나서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건, 아흔아홉마리 양에 대한 불신과 하느님께 맡겨 버리지 못하는, 하느님에 대한 불신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만약, 한마리 양을 찾아왔더니 열마리 양이 사라져 버렸을 경우 느껴질 죄책감 내지는 후회감, 실망감이 싫어서... 그래서 아예 도전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지금도 그런 마음이 많이 작용한다. 아이들을 친척 집에 맡기고 다른 일 하러 가려면 발걸음이 무겁다. 심지어 막내가 가끔씩 유치원에 가기 싫다고 하면 그냥 1년간 내가 집에서 데리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면, 두 딸아이에게 그 영향(정신적으로 피곤함)이 미칠 것이고, 다시 다니기 시작한 상담소에도 영향이 갈 것이다. 내가 상담해 주고 있는 두세 사람에게도. 그러면서 생기는 마음의 갈등의 영향은 다시 막내에게로 가게 될 것이고. 하루 4시간 반의 자유시간을 희생하는 대가가 클 것이다. 하느님께 맡기자. 아이의 즐거운 유치원 생활을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을 찾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자. 아마도 집에서 너무 풀어져(?) 있어서 그런 건지도... 집에서도 규율을 익히도록 하는 쪽이 아이에게도 나을 것이다. '정당한 좌절은 겪는 것이 좋다.'

예수님은 착한 목자이기에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신다. 그리고 길을 잃고 헤매다가 기진맥진한 양을 다정하게 어깨에 메신다. 우리 인간들은 삶의 덤불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양들과 같다. 예수님은 우리를 귀하게 여기셔서 우리를 찾아 나서신다. 그리고 우리를 찾으시면 기뻐 잔치를 베푸신다. 백 마리 양은 우리 모두의 모습이다. 우리는 우리 한가운데를, 우리 전체를, 우리 자체를 잃어버렸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그냥 보아 넘긴 것, 무의식적으로 억압하고 있던 것, 잃어버리고 있던 것, 우리 안에 있는 이 모든 것을 소중하게 여기신다. 그 분은 우리 안에 뿔뿔이 흩어져 있던 이 모든 것을 찾아내시고 우리와 함께 우리가 온전해지고 자아를 회복하는 것을 축하해 주신다.

*양 백마리를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구나... 나의 자아의 모든 모습. 어두움도, 밝음도 모두 포함되는 하나하나의 모습. 이기심, 나약함, 예민함, 교만, 공격성... 또 명석함, 인내심, 노력...등 백가지 나의 내면. 그 중 내가 싫어해서 심리적으로 억압해 버림으로써 나에게 없다고 느끼지만, (사실은 있기 때문에 투사로써)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자아의 어떤 면을 잃어버린 한마리 양이라고 볼 수 있구나.

이렇게 좋은 글을 써주신 안셀름 신부님께 평화가 있기를! 그 분이 느끼시는 하느님과 예수님은 내 마음에 깊이 다가온다. 반면, 기도회에서 사용하는 이탈이아 곱비 신부님의 '성모님께서 지극히 사랑하시는 아들 사제들에게' 책은 군데군데 의구심이 드는 부분이 있다. 예를 들어, '악이 세상을 짓누르는 이 결정적인 시대'라고 하는 시대상도 그렇고, '더이상 수도복을 입지 않는 수도자들을 향한 성모님의 걱정' 부분도 그렇다. 기도회에서 이야기 하는 성모님은 '지극히 걱정하시는 성모님(피눈물까지 흘리시며 호소하시는) ', '세계 평화를 위해 정화와 기도와 희생을 바치기를 바라시는 성모님'이시다. 내 마음 안의 성모님 상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자꾸 드러나서 기도회를 잠시 쉬기로 했다. 지금 내  마음 안의 성모님 상은 잘 모르긴 하지만, 불교의 관세음보살상과 일치한다. 현세의 평화로운 삶을 위해 세심하게 도와주시는 성모님.

 하느님과 성모님에 대해 더 알게 되어서 그 쪽의 성모님 상이 마음에 와닿으면 그때 기도회를 다시 시작하려 한다. 와닿지 않으면 그만두고. 그쪽 영성은 ISFJ(충성스러운 사람형)나 INFJ(예언가형)이 맞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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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만드는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자신이 하지 못하는 일을 다른 사람이 하고 있음을.
그리고 그런 사람에 의해 자신의 삶이 나아지고 있음을...


- 권미경의 《아랫목》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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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이 정말 지혜의 길인 것 같다.

내 시간을 남에게(아이들도 포함) 내어주는 것과 나를 위해 내 시간을 지키는 것이 잘 균형을 이루지 않으면 쉽게 피곤해진다. 정신력이 더 강해지기 전에 너무 소모하지 말아야겠다. 요즈음은 그야말로 '일용할 양식'을 쓰듯 하루하루 정신력과 시간을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일주일에 두세 사람 정도 오전중에 상담해 주고 있고, 상담소 홈피에 들어가서 글 읽거나 쓰고, 아이들이 오는 시간부터는 아이들과 지내는데, 밤에 아이들 재우기 직전이 되면 신경이 아주 예민해질 때가 있다. 특히 막내가 망치라면 둘째아이는 나사못처럼 내 신경을 조인다.(차라리 망치가 낫다. - 막무가내로 해달라고 소리치고, 안되면 울고불고...) 둘째는 "실수로 우유 쏟았을 때, 엄마가 전에는 '북한 어린이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굶는다.'고 하더니, 요즈음은 그렇게 안하고 잘 봐주시네요." 라는 식으로 나를 '조인다.' -그러잖아도 죄책감이 심한 나에게... ('예민아씨' 둘이 부딪치니까 감동하기도 짜증내기도 잘한다. 내가 종종 아홉살 수준이 되어 있다. 때론, 애가 마흔살 수준이...)

내가 실수는 웬만하면 화 안내고 넘겨 버리는데, 그런 상황에서 그런 말 한 기억이 안난다고 하면, '아! 그냥 칭찬 해드리는 거예요.' 이런다. -- ; 

내가 혹시 아이한테 그런 식으로 '칭찬'하나? 어렸을 때 동생들에게 그러지 않았을까? 아이들 지켜보니까 언니노릇도 힘들지만 동생노릇이 더 힘들어 보인다. 치사해도 참아야 될 때도 많은 것 같고.

지나친 죄책감은 오히려 좋지 않다는 생각이 요즈음 든다. 너무 잘해 주려다 보면 나도 지쳐서 짜증내고 아이들 의존심을 키우니까, 기준을 세워서 내가 해줄 것과 스스로 하도록 할 것을 확실히 해야겠다.(사실, 이렇게 하려면 정신력이 더 강해야 한다. 겁주지 않고, 좋은 습관의 가치를 알면서 익히도록 하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사랑의 마음으로 좋은 습관을 들이는 것. 그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석같은 선물일 것이다.)

지금 하기에 따라 4-5년 후가 달라질 것이다. 막내가 10살-11살 쯤 되면 그 결과가 드러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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