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가지 예수 모습 中,                           안셀름 그륀,  분도출판사

22.어진 목자 예수

예수께서 사용하신 어진 목자라는 표현에는 고대인들의 간절한 그리움이 잘 나타나 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께서 백성을 이끄시는 참된 목자라고 생각했다. 모세는 하느님의 분부를 받아 백성의 목자이자 지도자가 되었다. 그리스 사람들은 넓은 초장에서 양 한 마리를 어깨에 매고 있는 목자의 모습을 상상했다. 초장은 낙원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스 사람들은 그들이 그리는 이상향과 목자를 연관지어 생각했다. 다른 많은 문화권에서도 목자는 사려깊게 보살피는 아버지의 모습, 아버지처럼 인간을 보살피는 하느님의 모습을 나타낸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스라엘과 그리스 사람들의 이러한 그리움을 그대로 물려 받았다. 그래서 예수님을 하느님처럼 백성을 생명으로 이끄는 목자로 여겼다. 그리스 사람들은 노래의 신 오르페우스를 착한 목자의 모습으로 그렸다. 오르페우스의 노래를 들으면 야생 동물도 순해지고 죽은 사람들도 다시 살아났다. 그는 늘 아름다운 전원에서 양과 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에게서 오르페우스를 보았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우리 안의 야성을 길들이고 죽은 것을 살려 내시는 거룩한 음유시인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어진 목자는 인간의 영혼에 잠재된 구원의 전형이다.

예수님은 당신을 이렇게 말씀하신다. : "나는 착한 목자입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습니다(요한 10,11). 착한 목자의 특징은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끄시며 그들을 위하여 몸 바치신다. 늑대들로부터 양들을 지키는 목자처럼 예수님도 위험을 무릎쓰고 제자들을 지키며 그들을 위하여 죽음을 마다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써 양들에게 닥치는 온갖 위험을 막아 내신다. 십자가는 양우리를 넘어 오려는 늑대들을 막아 주는 든든한 보호막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착한 목자라고 다시 한번 말씀하신다. : "나는 착한 목자입니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는 압니다.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습니다(요한 10, 14-15). 예수님은 남녀 제자들을 잘 알고 계셨다. 제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시며 이름을 모두 알고 계셨다. 목자와 양들은 그들만의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예수님은 당신의 양들을 사랑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노래로 사람을 매혹시킨 오르페우스같은 느낌을 받는다. 옛날부터 오르페우스가 부르는 노래는 사랑의 노래로 여겼고, 목자들은 사랑의 가수로 통했다. 성탄 노래가 목자들의 노래인 것도 다 그런 이유이다. ...목자들이 부르는 노래에서 에수님의 제자 사랑이 느껴진다. 이런 노래에는 제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예수님의 사랑이 담겨 있다.

예수님은 마태오 복음과 루가 복음의 '잃었던 양 비유'에서 자신을 목자에 비유하신다. : "여러분 가운데 어떤 이가 양 백마리를 가지고 있다가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둔 채 잃은 것을 찾아낼 때까지 뒤쫓아다니지 않겠습니까? 그러다가 찾아내면 기뻐서 어깨에 메고 집으로 가서 벗과 이웃을 불러모아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양을 찾았소." 할 것입니다(루가 15, 4-6).

*사실, 나는 이 대목이 마음에 와 닿지 않았었다. 합리적이고 계산적이며 목적지향적인 사고방식에 젖어있던 나로서는 아흔아홉마리 양을 광야에 두고, 잃어버린 양 한마리를 찾아나서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건, 아흔아홉마리 양에 대한 불신과 하느님께 맡겨 버리지 못하는, 하느님에 대한 불신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만약, 한마리 양을 찾아왔더니 열마리 양이 사라져 버렸을 경우 느껴질 죄책감 내지는 후회감, 실망감이 싫어서... 그래서 아예 도전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지금도 그런 마음이 많이 작용한다. 아이들을 친척 집에 맡기고 다른 일 하러 가려면 발걸음이 무겁다. 심지어 막내가 가끔씩 유치원에 가기 싫다고 하면 그냥 1년간 내가 집에서 데리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면, 두 딸아이에게 그 영향(정신적으로 피곤함)이 미칠 것이고, 다시 다니기 시작한 상담소에도 영향이 갈 것이다. 내가 상담해 주고 있는 두세 사람에게도. 그러면서 생기는 마음의 갈등의 영향은 다시 막내에게로 가게 될 것이고. 하루 4시간 반의 자유시간을 희생하는 대가가 클 것이다. 하느님께 맡기자. 아이의 즐거운 유치원 생활을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을 찾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자. 아마도 집에서 너무 풀어져(?) 있어서 그런 건지도... 집에서도 규율을 익히도록 하는 쪽이 아이에게도 나을 것이다. '정당한 좌절은 겪는 것이 좋다.'

예수님은 착한 목자이기에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신다. 그리고 길을 잃고 헤매다가 기진맥진한 양을 다정하게 어깨에 메신다. 우리 인간들은 삶의 덤불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양들과 같다. 예수님은 우리를 귀하게 여기셔서 우리를 찾아 나서신다. 그리고 우리를 찾으시면 기뻐 잔치를 베푸신다. 백 마리 양은 우리 모두의 모습이다. 우리는 우리 한가운데를, 우리 전체를, 우리 자체를 잃어버렸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그냥 보아 넘긴 것, 무의식적으로 억압하고 있던 것, 잃어버리고 있던 것, 우리 안에 있는 이 모든 것을 소중하게 여기신다. 그 분은 우리 안에 뿔뿔이 흩어져 있던 이 모든 것을 찾아내시고 우리와 함께 우리가 온전해지고 자아를 회복하는 것을 축하해 주신다.

*양 백마리를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구나... 나의 자아의 모든 모습. 어두움도, 밝음도 모두 포함되는 하나하나의 모습. 이기심, 나약함, 예민함, 교만, 공격성... 또 명석함, 인내심, 노력...등 백가지 나의 내면. 그 중 내가 싫어해서 심리적으로 억압해 버림으로써 나에게 없다고 느끼지만, (사실은 있기 때문에 투사로써)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자아의 어떤 면을 잃어버린 한마리 양이라고 볼 수 있구나.

이렇게 좋은 글을 써주신 안셀름 신부님께 평화가 있기를! 그 분이 느끼시는 하느님과 예수님은 내 마음에 깊이 다가온다. 반면, 기도회에서 사용하는 이탈이아 곱비 신부님의 '성모님께서 지극히 사랑하시는 아들 사제들에게' 책은 군데군데 의구심이 드는 부분이 있다. 예를 들어, '악이 세상을 짓누르는 이 결정적인 시대'라고 하는 시대상도 그렇고, '더이상 수도복을 입지 않는 수도자들을 향한 성모님의 걱정' 부분도 그렇다. 기도회에서 이야기 하는 성모님은 '지극히 걱정하시는 성모님(피눈물까지 흘리시며 호소하시는) ', '세계 평화를 위해 정화와 기도와 희생을 바치기를 바라시는 성모님'이시다. 내 마음 안의 성모님 상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자꾸 드러나서 기도회를 잠시 쉬기로 했다. 지금 내  마음 안의 성모님 상은 잘 모르긴 하지만, 불교의 관세음보살상과 일치한다. 현세의 평화로운 삶을 위해 세심하게 도와주시는 성모님.

 하느님과 성모님에 대해 더 알게 되어서 그 쪽의 성모님 상이 마음에 와닿으면 그때 기도회를 다시 시작하려 한다. 와닿지 않으면 그만두고. 그쪽 영성은 ISFJ(충성스러운 사람형)나 INFJ(예언가형)이 맞는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