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비(paralysis)’라는 책 전체 주제를 잘 제시하고 있는 첫 번째 단편이다. 역시 책 전편을 통해 자주 나타나는, 색깔의 이미지도 주목하라.
여기서 신부의 ‘죽음’에서 시작해서 마지막 단편 “The Dead(죽은 자)”로 순환하는 ‘죽음(death)’이 우선 눈에 띄지만, ‘노처녀(여기서의 Nannie와 Eliza 자매)’에서 ‘노처녀(“The Dead”의 Julia와 Kate)’로 끝나는 내용 역시 불모(不毛)의 순환을 보여준다. Dubliners는 단순한 단편 모음집이 아니고 전체로서의 통일성(unity as a whole)을 가진, 단편으로 이루어진 장편이다.
<범례> * 이 글 시리즈의 처음인 “더블린 사람들 (序) - 꼼꼼한 텍스트 읽기” 참조. |
김병철: 더블린 사람들, 문예출판사, 3판 1쇄, 1999. 2
김종건: 더블린 사람들 • 비평문, 범우사, 2판 4쇄, 2005. 8
김정환: 김정환 • 성은애, 더블린 사람들, 창작과 비평사, 2쇄 1995. 9
임병윤: 더블린 사람들, 소담출판사, 초판 1쇄, 2005. 7
민태운: 조이스의 더블린: 더블린 사람들 읽기, 태학사, 2005. 4
전은경: 전은경 • 홍덕선 • 민태운, 조이스 문학의 길잡이: 더블린 사람들, 동인, 2005. 6
Gifford: Don Gifford, Joyce Annotated: Notes for ‘Dubliners’ and ‘A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Man’, 2nd ed.,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2
Brown: “James Joyce, Dubliners with an introduction and notes by Terence Brown, Penguin Classic, 1993”에 있는 테렌스 브라운 교수의 서문(introduction) 및 주석(notes).
(대조검토용으로 표시하고 있는 원문의 페이지도 이 책의 것이다.)
Companion: Derek Attridge ed., The Cambridge Companion to James Joyce, 2nd ed. 3rd printing,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6
(Gifford, Brown 등 외국 저자의 책이나 영문 웹사이트의 한글 번역은 모두 필자가 한 것) |
1. 제목 – 복수형 명사의 취급
우리말에서 명사의 복수형 어미(‘들’)는 셀 수 있는 명사라도 앞에 수사(數詞)가 없을 경우에만 쓰이고, 앞에 수사가 있으면 중복(redundancy)으로 보아 쓰지 않는다. 즉, ‘두 사람들’이 아니라 ‘두 사람’으로 쓰지만, ‘사람들, 그 사람들’은 ‘한 사람, 그 사람’과 구분을 위해 쓴다. 또 자체로 복수의 의미를 지닌 ‘자매’* 같은 말에 대해 ‘들’을 붙이면 이는 ‘여러 집에서 온 자매 1, 자매 2…’의 뜻이 되지만, 워낙 요즘은 영어 영향으로 구분 없이들 쓰니까(아래의 ‘자매들’, ‘두 건달들’, ‘두 한량들’) 굳이 이걸 시비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마지막 “The Dead”의 번역은 내용 해석과도 관계되므로 단복수 여부가 중요하다**. 넷은 복수로, 둘은 단수로 썼는데, 이 내용 및 다른 몇몇 제목은 그 이야기를 다룰 때 다시 거론하겠다.
구분 |
Dubliners |
The Sisters |
Two Gallants |
Counterparts |
The Dead |
김병철 |
더블린 사람들 |
자매 |
두 부랑자 |
분풀이 |
사자(死者) |
김종건 |
더블린 사람들 |
자매들 |
두 건달들 |
짝패들*** |
죽은 사람들 |
김정환 |
더블린 사람들 |
자매 |
두 건달 |
상응 |
죽은 사람들 |
임병윤 |
더블린 사람들 |
자매 |
두 건달들 |
분풀이 |
사자(死者) |
민태운 |
더블린 사람들 |
자매 |
두 한량들 |
대응 |
죽은 사람들 |
전은경 |
더블린 사람들 |
자매 |
두 한량 |
대응 |
죽은 사람들 |
* 다음은 국립국어연구원의 표준국어대사전(네이버에 탑재되어 있다) 설명이다.
자매(姉妹) [명사] : 여자끼리의 동기(同氣). 언니와 아우 사이를 이른다.
그녀들은 꼭 닮은 쌍둥이 자매다.
두 계집아이는 항상 붙어 다녀서 마치 자매처럼 보였다.
** “필자는 이야기 속의 실제로 죽은 사람들과, 육체적으로 살아 있으면서도 정신적으로 죽은 삶들을 통칭함으로써, 이 제목을 복수로 읽는다.” (김종건, pp.370-371)
*** 짝패는 짝을 이루는 둘 중 하나, 또는 둘 다를 가리킬 수 있다.
2. Malapropism (말의 오용: 誤用)
문법적으로 틀린 문장(비문: 非文)이 아니라, 헷갈리는 비슷한 단어를 대신 씀으로써 우스워진 표현을 말하며, 화자(話者)의 낮은 지식수준을 암시하거나 또는 풍자를 위한 기법이다. 우리 쪽에도 이런 것이 있는데, ‘흥미진진(興味津津)’을 ‘흥미률률(興味律律)’로, ‘호시탐탐(虎視眈眈)’을 ‘호시침침(虎視沈沈)’으로 쓴다면(실제 1974년 “우리들의 시대”라는 청춘소설-요새말로 고딩소설이다-에서 “별들의 고향”, “고래사냥”, “길 없는 길”, “잃어버린 왕국”, “왕도의 비밀”의 작가 최인호가 썼던 표현으로 필자 기억에 남아있다), 이는 헷갈리는 한자음을 이용한 malapropism이다. 전편을 통해 이 첫 번째 이야기에서 두 번, 나중에 "선거사무실에서의 파넬 추모일(Ivy Day in the Committee Room)에서 한번 나오며, 여기서는 화자인 Eliza 할머니의 낮은 교육수준을 암시한다. 역주로 달아줘야 번역본을 보는 독자들이 이해를 할 수 있지만, 번역본 중에서는 한 군데만 역주를 단 책이 딱 한 권, 두 군데 다 역주를 단 책은 하나도 없었다. 한편 해설서 두 권을 보면 변죽만 울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수업시간에 다룰 계획으로 보이는데*, 영어교수님들 수업 밑천까지 터는 것 같아 약간 죄송하다.
* 프리만스 저널(Freeman’s Journal)을 프리만스 제너럴(Freeman’s General)이라고 하는 둥 두 번이나 말을 오용함으로써 무식을 드러낸다. (민태운, p.38)
* 일라이저는 몇 번 잘못된 어휘를 사용하고 있다. 그곳을 지적하고, 그와 같이 잘못된 어휘를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은경, p. 79, 토론 주제 4번 문제)
(1) the Freeman’s General (p.8) ⇒ the Freeman’s Journal (and National Press):
“A Mother(pp.142-143)”: 김병철(p.192-193), 김종건(pp.175-176), 김정환(pp.182-184), 임병윤(pp.236-238)에도 나오고, “Grace(p.157, p.172)”: 김병철(p.211, p.230) 김종건(p.191, p.208), 김정환(p.201, p.220), 임병윤(p.258, p.285)에도 나오는 실제 더블린 일간지 이름으로 중하층 카톨릭계 민족주의 신문. 교회사 및 성직자의 사망에 관한 기사를 많이 실었다고 한다. 역자들이 조금만 더 꼼꼼했더라도 하는 아쉬움이 있다.
『프리맨즈 저널』(김병철, p.17) 역주 없이 아예 고쳐서 번역해버렸다.
《프리먼즈 제너럴》(김종건, p.28) “더블린에서 발간되는 주요 일간지 《프리먼즈 저널》을 잘못 말한듯함”이라고 각주를 달았다.
『프리맨즈 제너럴』지(誌) (김정환, p.14) 역주가 없을뿐더러 한자도 틀렸다. 일간지(일간신문)의 지는 ‘종이 紙’를 쓰고, 잡지의 지는 ‘기록할 誌’를 쓰는데, 일간신문을 ‘誌’라고 했다.
《프리먼즈 제너럴》(임병윤, p.22) 아무 설명이 없다.
(2) If we could only get one of them new-fangled carriages that makes no noise that Father O’Rourke told him about - them with the rheumatic wheels - for the day cheap, he said, at Johnny Rush’s over the way there…(p.9)
오로크 신부님이 오빠에게 얘기한, 바퀴에 바람을 넣은 그 소리나지 않는 신식마차 하나를 저 길 건너 조니 러시네 가게에서 그날 하루 싸게 빌려서… (김병철, p.19)
오러크 신부님이 오라버님한테 말한 적이 있는, 바람 넣은 바퀴가 달린 그 신식 마차를 길 건너 조니 러쉬 상점에서 하루 동안 값싸게 빌려가지고…(김종건, p.29)
오루크 신부님이 그에게 얘기해주었다는 그 소리 안 나는 최신형 마차, 바퀴에 바람을 넣은 푹신푹신한 그 마차를 우리가 한 대 구할 수만 있었으면… (김정환, p.16)
오로크 신부님이 이야기해준, 소리 나지 않는 고무바퀴로 가는, 그 최신식 마차를 길 건너편 조니 러시네 가게에서 하루 동안 싸게 빌리기만 하면…(임병윤, p.24)
‘rheumatic’이란 단어는 ‘류머티즘에 걸린’이란 뜻이 전부다. 역주를 단 책는 없지만 어쨌든 ‘바람을 넣은’으로 번역은 되어 있고, 한술 더 떠 ‘고무로 만든’으로 해놓은 책도 있다(어딘가에서 베낀 증거 중 하나). 이는 발음이 비슷한 ‘pneumatic(공기의, 공기가 들어있는, 압축공기가 든)’이란 단어를 malapropism으로 쓴 것으로 보통 해석하며, 또 이를 인정하면서도, 그냥 되지도 않는 넌센스로 볼 수 있다는 사람도 있다. (Brown, p.244). “류머티즘에 걸린 바퀴”라면 주제인 ‘마비’와도 잘 관련되므로, 필자는 Brown의 단서의견에는 찬성하지 않는데, 유명한 조이스 전기인, “Richard Ellmann, James Joyce, 2nd edition, Oxford University Press Paperback with corrections, 1983, p.43”에 보면 이런 문구가 있기 때문이다.
“Joyce has in mind the fact that Eddie Boardman(*조이스가 North Richmond Street, Dublin에 살던 12살 때, 같은 동네의 친구 – 필자) was famous through all north Dublin because his was the first pneumatic-tired bicycle in the neighborhood.”
3. the third stroke (p.1)
‘stroke’는 ‘뇌졸중(apoplexy) (전은경, p.62)’이 가장 가까운 뜻이지만, 쉽게 ‘발작(김정환 p.5, 전은경 p.57)’이라는 표현도 쓸 수 있다. 뇌졸중이 모두 ‘뇌출혈( = 뇌일혈. bleeding/hemorrhage in brain) (임병윤 p.9)’인 것은 아니지만, ‘졸도( = faint, swoon, syncope) (김병철 p.7, 김종건 p.19)’는 그보다 더 먼 느낌이다. 보통 발작의 결과가 마비이지만, 거꾸로 (일부 견해에 따르면 조이스 자신을 평생 괴롭히고 삶과 문학을 결정지은*) ‘paresis(매독성 진행마비)’에서 발작이 온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Gifford, p.29)
* Kathleen Ferris, James Joyce and the Burden of Disease, Lexington: The University Press of Kentucky, 1995. (이 책을 요약한 Vivian Pigott의 아래 웹 페이지 글에서 재인용. 이는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원 조이스 강의 보고서지만 웹 페이지의 특성상 언제까지 계속 실려있을지는 알 수 없다.)
(http://www.uncg.edu/eng/courses/relangen/eng657/reports/vpiggott.htm)
4. It(=Paralysis) had always sounded strangely in my ears, like the word gnomon in the Euclid and the word simony in the Catechism. But now it sounded to me like the name of some maleficent and sinful being. It filled me with fear, and yet I longed to be nearer to it and to look upon its deadly work. (p.1)
유명한 구절이다. 다른 책들은 비교적 원문에 충실한 번역을 한 반면, 임병윤의 번역은 젊은 층의 기호에 맞게 매끄러울 지는 몰라도 충실성이 많이 떨어지므로, 영어학도들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책 전체를 통해 그의 이런 경향은 계속된다.
그것(=마비)은 유클리드 기하학의 경절형(磬折形: 평행사변형의 한 귀퉁이에서 닮은꼴의 평행사변형 하나를 잘라낸 모양-역주)*이나 교리문답의 성직매매라는 단어처럼 언제나 내 귀에 이상하게 들렸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어떤 나쁜 짓을 하는 죄받을 존재의 이름처럼 내게 들렸다. 그것이 나를 두려움으로 가득 채웠고, 그런데도 난 좀더 가까이 가서 그것의 치명적인 작업을 구경하고 싶었다. (김정환, p.5)
그건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말하는 노몬(gnomon, 평행사변형의 한 모서리를 전체와 닮은 꼴로 잘라낸 그 나머지 부분)이라는 말이나 교리문답서에 나오는 시모니(simony, 성직매매죄)라는 말처럼, 알 듯하면서도 아주 헷갈려버리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말이 뭔가 죄악으로 가득 찬 존재들이 겪어야 하는 숙명적인 업보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자 온 몸에 소름이 돋으면서, 그 무시무시한 고통이 과연 어떤 느낌일까 하는 생각 속으로 점점 빨려 들어가는 것이었다. (임병윤, p.10)
* ‘경절형(磬折形)’이 김정환의 역주대로 ‘평행사변형의 한 귀퉁이에서 닮은꼴의 평행사변형 하나를 잘라낸 모양’이라는 것은 어디서 나온 이야긴지, 그 근거가 궁금하다. ‘경절(磬折)’은 “석경(石磬)처럼 몸을 90도로 꺾어 삼가 공경하는 예를 표하는 것. 석경은 고대의 악기(樂器)로서 모양이 기역자처럼 생겼음(네이버 용어사전)’이 필자가 찾아본 내용이다. 이에 따르면, ‘경절형’은 아무리 gnomon처럼 이상하게 들리는 효과는 있어도 그 다른 뜻인 ‘해시계의 침(침과 땅 위의 그림자는 항상 기역자, 즉 90도를 이룬다. ‘경절형 해시계’란 용어도 확인할 수 있었다)’이다. 그렇다면 gnomon은 그냥 ‘노몬’으로 번역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인터넷을 검색해봐도 더 이상 뜻은 나오지 않지만, 혹 우리나라, 일본, 아니면 중국의 수학계(數學界)에서 이런 생경한 용어를 쓰는지는 모르겠다. 아시는 분 있으면 댓글로 달아주시길.
5. -… Let him learn to box his corner. That’s what I’m always saying to that Rosicrucian there. (p.2)
우선 ‘box his corner’는 무슨 뜻일까? Gifford(p.30)에 따르면 여기서 ‘corner’는 ‘share(몫)’ 또는 ‘proceeds(수익)’을 뜻하는 slang(속어)이라고 한다. 또 ‘box’는 동사일 때 ‘상자 같은 곳에 채워 넣다’. 따라서, ‘자기 몫을 하다, 세상사에 영악해지다(go out and learn to make a living and get ahead in the world)’는 뜻. 뒤의 “저기 있는 저 장미십자회원 같은 애”란 바로 앞의 ‘him’이며, 이 이야기의 화자(I)인 소년이다. ‘box his corner’의 번역은 김정환만 그나마 비슷하게 했고, 뒤의 Rosicrucian 번역에서도 김정환을 제외하고는 모두 마치 소년이 정말 장미십자회원이라고 여기는 듯하다. 하지만 소년의 몽상적인 면을 놀리면서 이대로 가면 향후 성직으로 진출할지 모른다는 암시라고 봐야 한다. (Gifford, p.30, Brown, pp.239-240)
“아이들이란 아이들 분에 맞도록 해야죠. 이건 내가 밤낮 여기 이 장미십자회원에게 말하고 있는 말입니다.” (김병철, p.10)
“아이들은 제 분수를 지킬 줄 알도록 해야 해요. 이건 내가 언제나 이 장미십자회원*한테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김종건, p.21): *근세 유럽에 있었던 신비주의적 국제 비밀결사 회원. 그들은 세속적 관심에서 탈피하여 일종의 심미론을 그 이상으로 삼았음.
“제 앞가림은 제가 하도록 해야 한다는 거죠. 저는 항상 저 장미십자회원(1866년경 다시 유행한 중세의 교파 중 하나. 세속적인데 무관심하며, 사변적이고 몽상적이라는 의미 – 역주) 같은 애한테 맨날 그래요.” (김정환, p.7)
“애들은 애들답게 자라야 한다는 거죠. 이건 제가 장미십자회원인 저 조카애에게 정말 귀가 따갑도록 하는 이야기랍니다.” (임병윤, p.13)
6. …I felt that I too was smiling feebly as if to absolve the simoniac of his sin. (p.3)
플린 신부가 죽었다는 것을 안 바로 그날 밤 소년이 잠을 잘 때 꿈을 꾸는 장면이다. 신부의 성직매매죄(simony)를 사면(absolve)할 수 있는 것은 교황만이 할 수 있다고 한다.
마치 성직매매자로서의 그의 죄를 씻어주려는 듯이 나도 한없이 미소를 짓고 있음을 느꼈다. (김병철, p.11) : ‘한없이’는 ‘힘없이’의 오기/오타/오식일 것이다.
나 또한 마치 그의 성직매매의 죄를 사면(赦免)이라도 해주는 듯 픽픽 웃고 있음을 알았다. (김종건, p.22) : ‘사면’이라는 용어는 정확하지만, ‘픽픽’이란 여기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나 자신도 희미하게, 마치 성직매매자의 죄를 사해주는 것처럼 미소짓고 있다는 걸 느꼈다. (김정환, p.8)
덩달아 실없이 웃음을 흘리고 있는 내 얼굴이 보였는데, 마치 그가 저지른 성직매매죄도 뭐 그럴 수 있다는 표정이었다. (임병윤, p.14) : 역시 번역의 충실도 면에서 떨어진다. 아무리 읽기 쉬어도 충실도 없는 가독성은 영어학도에게는 가치가 없다. 또 진지한 문학 독자라면 충실하면서도 가독성이 높은 번역을 원하지 않겠는가?
7. Great Britain Street(p.3), July 1st, 1895(p.4), Irishtown (p.9)
소년이 다음날 아침 그레이트 브리튼(대영제국)가에 있는 플린 신부의 상가(喪家)로 가서 신부가 1895년 7월 1일 사망했음을 안다. 영국의 지배를 상징하는 이름을 가진 거리가 사실은 당시 더블린 최하층민이 사는 빈민가이며, 카톨릭에서도 거의 축출(파문?)당한 신부가, 원래 이 근처 아이리시타운에서 태어났다가, 인생유전을 거쳐 다시 말년에 여기서 비참하게 살았다는 사실은, 당시 영국과 카톨릭의 공모, 유착에 의한 아일랜드 지배의 불모성과 순환을 풍자한 것이라고 보인다. 이 거리는 지금은 아일랜드 애국자이자 조이스의 영웅이었던 Charles Stewart Parnell(13번째 단편 “Ivy Day in the Committee Room” 참고)의 이름을 따서 Parnell Street가 되었다고 한다(Gifford, p.31, Brown, p.240). 한편 이 날이 카톨릭의 축일(The Church Feast of the Most Precious Blood)이자, 1690년 보인 전투(Battle of Boyne)에서 카톨릭 아일랜드가 영국에 져서 식민지로 전락한 날짜라는 의미가 있는데(Gifford p.18, Brown p.240), 이에 대한 역주/해설은 번역본 아무데도 없지만, 민태운의 해설서( p.37)에는 언급되어 있다. 또 ‘Irishtown’은 고유명사인데 김종건을 제외하고는 모두 번역을 ‘아이리시 타운’으로 띄어서 했다.
김병철(pp.11, 19), 김종건(pp.22-23, 29), 김정환(pp.8-9,16), 임병윤(pp.14-15, p.24)
8. The reading of the card persuaded me that he was dead and I was disturbed to find myself at check. (p.4)
“(플린 신부의 상가에 붙어 있는 사망을 알리는 )카드를 보고 비로소 신부의 죽음을 확신하게 되고, 그러자 자신이 (신부가 정말 죽었나) 확인/점검(check: an act of inspecting or verifying)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기분이 나빠졌다”는 뜻이다. 소년이 여기 온 목적이 무엇인지, 왜 몇 줄 뒤 “슬프지도 않고 오히려 해방감을 느낀다”고 했는지 앞뒤 문맥을 생각해 보면, ‘at check’를 ‘checking the death of the Father’로 보아야 할 것이지만, 그런 역자는 아무도 없고, 모두 하나같이 ‘checked by something’으로 보았는데, 한 사람이 틀리면 죽 틀린다는 것이 확인된다. 어째 ‘돌려 베끼기’라는 의심이 들지 않는가?
이 카드를 읽고 나니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비로소 실감이 나서, 나는 별안간 길이 막힌 것만 같아 그 집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고 잠시 망설였다. (김병철, p.12) : check의 다른 뜻인 ‘방해, 저지, 억제’로 잘못 해석하다 보니 원문에도 없는 엉뚱한 구절이 추가되었다.
이 쪽지를 읽고 나자 그분이 정말 돌아가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 자신이 어떤 방해를 받고 있는 듯한 성가신 느낌도 들었다. (김종건, p.23)
그 쪽지를 읽으니 비로소 그가 죽었다는 것이 실감났고 나는 무엇엔가 제지당한 느낌에 혼란스러웠다. (김정환, p.9)
카드의 내용을 보고 나자 비로소 그가 죽었다는 걸 실감하였는데, 뭔가가 앞을 가로막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집 안으로 들어서기가 망설여졌다. (임병윤, p.15)
9. I walked away slowly along the sunny side of the street, reading all the theatrical advertisements in the shopwindows as I went. (p.4)
‘theatrical’은 ‘theater’의 형용사이기도 하지만, ‘exaggerated(과장된), histrionic(연극조의)’이란 뜻도 있어, ‘theatrical advertisements’는 ‘극장/연극 광고’일 수도 있지만, ‘과장된/연극조의 광고’일 수도 있다. 당시 이 거리(Great Britain Street. 위의 7 참고)가 빈민가로서 영세한 상점이 많았다는 것과, 우리나라에서도 옛날 60년대 구멍가게 유리창에는 주로 극장의 영화광고로 도배되었다는 사실에서 유추하여 ‘극장광고’ 쪽으로 기울기는 해도(상품이나 가게 자체 광고가 나온 것은 훨씬 뒤다), 정확히 어느 쪽인지는 필자도 자신이 없다.
김병철(p.12), 김종건(p.24), 임병윤(p.16)은 ‘극장 광고’로, 김정환은 ‘연극조의 광고(p.10)’로 번역했다.
10. He had studied in the Irish college in Rome…He had told me stories…about Napoleon Bonaparte…(p.5)
텍스트에는 ‘college’가 소문자로 되어 있지만, ‘the Irish college in Rome’은 사실 고유명사다. 로마에 여러 개의 아일랜드계 신학교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1628년에 설립된 것이 딱 하나 있었으며, 19세기말에는 가장 촉망받는 신부들만 여기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어느 책에도 역주가 없고 모두 그냥 보통명사로 취급하여 번역했다. Gifford(서문 p.viii 및 p.31의 해설에서는 아예 중간의 College를 대문자로 시작한다). Brown(p.241) 및 아래 사이트를 참조하라. 민태운에서만 이 사실이 반영되어 있다.
http://en.wikipedia.org/wiki/Irish_College_in_Rome
http://www.newadvent.org/cathen/08157a.htm
또 바로 뒤 뜬금없이 나온 나폴레옹 이야기도 이와 관련이 있는데, 이는 1789년 나폴레옹이 이 학교를 폐교시켰기 때문이다. 1828년 이 학교는 다시 문을 열었다(Gifford, p.33 및 위 사이트 참조). 이 사실 역시 역주로 단 책은 없다.
로마의 아일랜드계 신학교 (김병철, p.13)
로마의 아일랜드계 대학 (김종건, p.24)
로마의 아일랜드 성직자들을 위한 대학 (김정환, p.10)
로마에 있는 아일랜드계 신학교 (임병윤, p.17)
로마에 있는 아일랜드 신학대학(Irish College) (민태운, p.37)
11. The duties of the priest towards the Eucharist and towards the secrecy of the confessional seemed so grave to me… (p.5)
여기서 ‘confessional’은 명사로 뜻은 ‘고해소, 고해실’이다. 김정환만 제대로 번역했다.
성찬식과 고해의 비밀에 관한 신부의 여러 가지 의무가 나에게는 엄숙하게 생각되어서 (김병철, p.13)
성찬식과 고해의 비밀에 관한 신부의 여러 가지 의무가 나에게는 너무나 준엄하게 느껴졌기(김종건, p.24)
성체성사에 대한, 그리고 고해소의 비밀에 대한 사제의 의무는 어찌나 장중해보였던지 (김정환, p.11)
성찬식을 주재하는 지위에 다다르기까지, 또 비밀을 끝까지 안고 가야 하는 고해성사를 담당하는 자리에 이르기까지 성직자들이 지켜야 하는 그 많은 의무들이 너무나 힘겹게 느껴졌기 (임병윤, p.17) : 역시 충실하지 않은 대충 번역으로 원문에 없는 이상한 표현이 삽입되었다.
12. Nannie received us in the hall; and, as it would have been unseemly to have shouted at her, my aunt shook hands with her for all. (p.6)
뒤의 문맥을 보면 Nannie는 ‘귀가 멀거나 좋지 못한(deaf or hearing impaired)’ 상태이다(another paralysis!). 따라서 보통 때 같으면 큰 소리를 질러 인사했겠지만, 상가에 와서 그렇게 하기가 뭣했으므로 이번에는 그저 손을 잡는 것으로 끝냈다는 뜻의 문장이다(for all = once and for all = for once in a way = just for this once). 1904년 8월 “The Irish Homestead”라는 잡지에 실린 이 단편의 원본을 보면, 아예 Nannie가 “almost stone deaf”라서 “it was no use saying anything to her”이라고 나온다(Gifford, pp.289-293에 1904년 원본이 실려 있고, 이는 인터넷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다). 1914년 첫 출간된 책에 실린 지금의 텍스트는 1906년 5-6월 사이에 개작한 것이라고 한다. (Gifford, p.30, Brown, p.227)
그녀에게 큰 소리를 지른다는 것도 이런 경우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 아주머니는 그냥 내니의 손만 잡고 말았다 (김병철, p.14)
그녀에게 큰 소리로 이야기하는 것이 어울리지 않았기에 아주머니는 그녀와 악수를 함으로써 모든 뜻을 알렸다 (김종건, p.25)
그녀한테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이 볼썽사나울 것이므로 아주머니는 그녀와 그냥 악수만 했다 (김정환, p.12)
그녀에게 큰 소리로 애도를 표한다는 것이 왠지 이상할 것 같아서인지, 숙모님은 하릴없이 내니의 손만 잡고 있었다. (임병윤, p.19)
13. So one night he was wanted for to go on a call and they couldn't find him anywhere. They looked high up and low down; and still they couldn't see a sight of him anywhere. So then the clerk suggested to try the chapel. So then they got the keys and opened the chapel and the clerk and Father O'Rourke and another priest that was there brought in a light for to look for him. (p.10)
굵은 부분 양쪽 다 문법적으로 for가 필요한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for to’는 ‘in order to/so as to’ 정도의 뜻으로 쓰였으며, 필자가 보기에는 이 말을 하는 Eliza의 지식수준을 나타내는 비문으로 생각된다. ‘so then’이나 ‘and’가 어색하게 계속되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앞 12에서 말한 1904년본(the Irish Homestead version)을 한번 보자.
One night he was wanted, and they looked high up and down and couldn’t find him. Then the clerk suggested the chapel. So they opened the chapel (it was late at night), and brought a light to look for him. (Gifford, p.293)
그런데 이는 조이스가 일부러 화자의 수준에 맞춘 말을 하는 것으로, 마지막 단편 “The Dead”에서 관리인의 딸 Lily가(하녀 정도로 생각됨) “The men that is now is only all palaver(p.178)”라고 주어, 동사의 수의 일치를 틀리는 것과 같은 기법이며, ‘narrated monologue’, ‘free indirect discourse’, ‘empathetic narrative’, ‘stylistic inflection, 또는 the "Uncle Charles Principle"* 등 여러 가지로 불린다. 2년 전의 원본과는 확실히 달라진 문체 기법의 발달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 Uncle Charles Principle: 조이스 연구자 Hugh Kenner가 Joyce's Voices (Faber and Faber, 1978)란 책에서 쓴 표현으로, “소설 속 인물(= Uncle Charles)이 저자 같은 선택을 하기 시작하여 작가의 글 쓰는 스타일을 전염시킨다(the fictional character begins to make authorial choices, that the character "infects" the prose style of the writer)”는 뜻. 월러스 그레이 교수의 http://www.mendele.com/WWD/WWD.dubintro.html 에서 재인용.
14. “They say it(= breaking of the chalice) was the boy’s fault…” (p.10)
죽은 플린 신부가 성찬배를 깨뜨린 이후로 정신이 이상해졌는데, 이는 ‘the boy(여기서는 복사服事가 가장 정확한 용어)’의 잘못이라는 Eliza의 말이다. ‘the boy’는 대개 성찬식의 시중을 드는 ‘일하는 아이(김병철, p.20)’, ‘복사(服事, 김종건 p.29, 민태운 p.36)’, ‘소년(김정환, p.17)’, ‘시동(侍童, 전은경, p.71)’ 등으로 해석하며, 외국 선학들도 여기에는 특별한 의미를 두지는 않는다. 그런데, 임병윤은 본문에서는 ‘같이 있던 애(p.25)’로 해석하며, 역자 후기에서는 대담하게 속내를 토로한다. (pp.392-394)
“ 그래도 번역을 하면서 좀더 자세하게, 또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옮기고 싶어 입과 손이 들먹거리던 순간들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자매」에서 줄거리가 끝나갈 무렵 엘리자가 플린 신부가 성배를 깨뜨리게 된 사연을 이야기하면서 “… it was the boy’s fault…”(‘같이 있던 애가 잘못해서 그랬다고 하더군요’라고 번역되어 있다)라고 하는데, 이 작품에서 the boy는 여기 딱 한번 언급될 뿐이다.
그러면 the boy가 누구인지 분명히 밝혀져야 작품 전체의 내용이 보다 명확하게 이해되고 나아가 주인공인 소년의 심리상태까지 정확하게 느낄 수 있다. 이때 the boy는 막연히 신부와 같이 있던 아이를 지칭하지만, 엘리자와 숙모의 대화를 보면 두 사람 모두 이 아이가 누군지 알고 있다는 느낌이다(물론 영문법적으로는 정관사 the의 표현으로 이 사실이 바로 드러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면 이 아이는 누굴까? 바로 주인공 소년이다. 그렇지만 조이스의 의도로 보면 the boy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싶지 않은 것 같다….(중략)…즉, the boy를 통해 플린 신부의 죽음에 대한 소년의 죄의식을 이해할 수 있으며, 꿈속에서 플린 신부와 만나는 장면과 플린 신부의 성직매매에 대한 관용의 심리 역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플린 신부의 죽음을 확인하고 난 뒤에, 플린 신부의 자신의 잘못에 대한 부담감을 떨치고 양지바른 길을 따라 극장 포스터를 즐기면서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걸어가는 모습까지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다 이 부분에 이르러 엘리자의 말에 의해 문득 자신의 과오가 드러나며 이를 받는 숙모의 말에서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소년 자신으로 인해 플린 신부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 바로 the boy가 이런 모든 정황과 심리상태를 연결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부분이 바로 번역의 어려움이며 한계인 듯하다. 조이스의 작품은 특히 이런 표현들과 상징이 많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렵고, 또 이해하기 어려운 만큼 재미도 없는 것일 거다.”
우선 “영문법적으로는 정관사 the의 표현으로 이 사실( = 그 소년의 진짜 정체)이 바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은 오해다. 꼭 정체가 밝혀진 소년이라기보다, “그냥 아무 소년이 아니라 성찬식에서 시중 드는 소년 = 아무 복사”라는 뜻으로도 ‘the boy’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다음 문장을 보자.
Then I saw a car park by the side of the road. The driver was asleep.
여기서 ‘the driver’가 꼭 신분이 밝혀져 있어 ‘the’를 썼을까? 그게 아니라 앞의 차의 운전수이기 때문에 관련 내용(그냥 아무 운전수가 아닌 앞에 나온 차의 아무 운전수)에 의해 지시 대상이 결정된 경우이다. 이는 정관사 사용 중에서 가장 미묘한 것으로 “앞에 나온 명사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 명사 앞에 사용되며, 영어로는 associative anaphoric use(관련조응적 사용 - 필자)라고 칭한다(영어관사의 문법, 한학성, 태학사, 수정판 2쇄, 2003. 9, pp.71-73). 이런 관점에서, ‘the boy’는 꼭 주변 사람들이 다 정체를 아는(대상이 결정된) 소년일 수도 있지만, 앞의 신부와 성배와의 관련에서 지시 대상이 결정된, ‘그냥 아무 소년이 아닌 아무 복사(服事)’도 될 수 있는 것이다.
“The boy is an acolyte or server who assists the celebrant(사제) at the altar.” (Gifford, p.34, Brown, p.244)
물론 이 ‘the boy’를 바로 화자인 주인공 소년으로 보는 것은 가능하고, 더 나아가 성찬배를 깨뜨린 것이 성찬식에서가 아니라, 아무도 없는 제의실(vestry) 또는 성구실(sacristy)에서 플린 신부가 (아마도 반강제로) 소년과 성적 교섭을 가지려다가 그런 것으로까지 볼 수 있으며(타락한 동성애), 이렇게 되면 플린 신부의 타락과 꿈속에서의 플린 신부 모습이 암시하는 성적 의미를 쉽게 꿰뚫어 설명할 수 있으므로, 확실히 매력적이다. 필자도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이렇게 쉽게 단정짓는 것은 이 단편 전체의 핵심 개념 중 하나인 ‘gnomon’을 너무 가볍게 볼 위험이 있다. ‘closure’란 말이 있는데, ‘종결, 토론 종결’의 뜻 외에도, 게스탈트 심리학에서는 “빠진 부분을 채워 넣어 전체를 만들어내는 것’을 일컫는다. 시기적으로 조이스가 이 심리학에 영향을 받았을 리는 없지만 이 개념을 빌려 설명하자면, “누구나 gnomon을 보고 나름대로의 판단으로 closure할 위험, 또는 즐거움은 항상 있다”는 것이다(아래 gnomon그림 참조). 다시 말해 “여기서 빠진 부분을 규모가 작고 닮은꼴의 평행사변형으로 메우면 반드시 원래의 큰 평행사변형으로 회복되어야 한다”는 믿음은 너무 기계론, 결정론에 휘둘린 19세기적 사고라서, 조이스가 추구했던 modernism 또는 post modernism과는 대척점(對蹠點, antipode)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물론 평행사변형일 수도 있지만, 삼각형일 수도 있으며, 또 원형인들 어떻고, 원래부터 빠진 게 없었다면 또 어떤가? 어떤 하나의 상징 해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마다 스스로 상상력을 불러 일으켜 생각하도록 맡겨두는 것이 바로 ‘모더니즘적 불확정(modernistic indeterminacy*)’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단편을 이 소설에서 가장 난해한 것 중 하나로(민태운, p.31), 또는 이 소설을 Ulysses의 전조로 보기도 하는 것이다.
* “조이스에게는 상징이란 그렇게 중요하지도, 따라서 신성하지도 않았고, 또 정해진 진실에 도달하는 방법도 아니었다. 상징을 뒤쫓는 주석가들은 예이츠적인 본질주의나 초월주의에서 나온 기계론적이고 종종 통속적인 해석을 제시하는데, 조이스적인 방법론의 미묘한 불확정성과 세속성과는 맞지 않는다 (For Joyce, a symbol was not so essential and therefore sacred a thing, nor was it a means to definitive truths (the symbol-hunting exegetes offer a mechanical and often vulgarized version of the Yeatsian essentialism and transcendentalism, out of key with the subtle indeterminacy and this worldliness of the Joycean method). (Brown, xxxiii)
“더블린 사람들의 첫 번째 이야기는 열다섯 개의 단편모음 가운데서 가장 붙잡기 어려운 놈이다. 비평가들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는 마치 물고기와 같아서, (잡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비평가의 손에서 빠져나가 암시, 풍자로 가득한 불투명한 웅덩이 속으로 도망쳐버린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이 이야기 속의 소년과 마찬가지로, 아직도 이 이야기로부터 “의미를 짜내려” 애쓰고 있다. (The first story of the Dubliners is the most elusive of the set of fifteen stories. Despite many critics’ efforts, the story behaves like a fish, wriggling its way out of the critic’s hand to recede into a pool of allusions, innuendo and opacity. After 100 years, we are – just like the boy in the story – still struggling to “extract meaning” from this story.)” (Carsten Blauth*, Father Flynn and the Boy: A Relationship in Joyce’s ‘The Sisters’, Trinity College/Dublin, School of English; Course: Anglo-English Literature; 1993/94 (Revised Essay), http://www.james-joyce.de/d_essays.shtml)
* Carsten Blauth, 첫 번째 글에서 소개했던 웹 사이트 www.james-joyce.de의 운영자. 독일 Trier 대학 졸업. Trinity College에서 David Norris 및 Terrence Brown 밑에서 수학. 현재 Romania에 거주.
더구나 “…이 부분에 이르러 엘리자의 말에 의해 문득 자신의 과오가 드러나며 이를 받는 숙모의 말에서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소년 자신으로 인해 플린 신부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라는 해석은 필자가 보기에는 통속적인 에피파니(현현: 顯現, 계시: 啓示) 포착에 지나지 않는다.
* epiphany: 찾아온 동방박사 세 사람에게 구유의 예수가 신성(divinity)을 드러낸 일. 조이스는 이를 “사물의 영혼 또는 본질이 외양이라는 허물을 벗고 우리에게 갑작스런 정신적 계시를 보이는 순간(a sudden spiritual manifestation when the soul or whatness of an object leaps to us from the vestment of appearance)”의 뜻으로 사용한다(Stephen Hero, Gifford, p.2에서 재인용).
“드디어 조이스의 어떤 작품이 무엇에 ‘관한’ 것이고, 또는 그 구조, 또는 도덕적 입장이 무어며, 또는 그 작품에서 상징이 가진 힘을 다 알았다고 주장하는 어떤 비평/해설이라도, 따라서, 믿으면 안될 것이고,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왜냐하면, 지금 바로 그 작품을 읽음에 있어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거나, 작품의 완전한 이해라는 불가능한 목적을 향해 당신이 다가갈 때 (독서의) 즐거움을 배가시키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말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지금이든 언제인지 모를 미래에서든, 그 작품을 읽는 다른 모든 방법을 배제해버릴 그런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Any critical text which claims to tell you (at last) what a work of Joyce’s is ‘about’, or what its structure, or its moral position, or its symbolic force, ‘is’, has to be mistrusted, therefore; not because it will not be useful to you in a reading of the work in question, adding to your pleasure as you move toward that impossible goal total understanding, but because it is making a claim that, taken literally, would exclude all other ways of reading the work, now and in the unpredictable future.” (Derek Attridge, Companion, p.3)
이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 별로 언급하고 싶지 않은 임병윤 번역본을 지금까지 논의에 포함해 왔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가독성만 앞세우고 충실성을 경시한 번역은 우리 목적인 영어공부와 맞지 않으므로, 다음 글부터는 이 번역본을 빼도록 하겠다.
(봐서 알겠지만, 대개 책의 순서대로 따르고 있고, 단편들이라 번역본에서 어디쯤인지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따라서 다음부터는 번역본은 역자 이름만 표시하고, 페이지수는 생략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