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례> * 이 글 시리즈의 처음인 “더블린 사람들 (序) - 꼼꼼한 텍스트 읽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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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철: 더블린 사람들, 문예출판사, 3판 1쇄, 1999. 2
김종건: 더블린 사람들 • 비평문, 범우사, 2판 4쇄, 2005. 8
김정환: 김정환 • 성은애, 더블린 사람들, 창작과 비평사, 2쇄 1995. 9
민태운: 조이스의 더블린: 더블린 사람들 읽기, 태학사, 2005. 4
전은경: 전은경 • 홍덕선 • 민태운, 조이스 문학의 길잡이: 더블린 사람들, 동인, 2005. 6
Gifford: Don Gifford, Joyce Annotated: Notes for ‘Dubliners’ and ‘A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Man’, 2nd ed.,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2
Brown: “James Joyce, Dubliners with an introduction and notes by Terence Brown, Penguin Classic, 1993”에 있는 테렌스 브라운 교수의 서문(introduction) 및 주석(notes).
(대조검토용으로 표시하고 있는 원문의 페이지도 이 책의 것이다.)
Companion: Derek Attridge ed., The Cambridge Companion to James Joyce, 2nd ed. 3rd printing,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6
(Gifford, Brown 등 외국 저자의 책이나 영문 웹사이트의 한글 번역은 모두 필자가 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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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목의 부정관사 번역
부정관사가 들어가는 제목을 가진 단편은 4개이다. 어떻게 번역했는지 보자.
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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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Encou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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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Little Clo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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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Painful C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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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Mo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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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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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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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한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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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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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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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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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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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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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혹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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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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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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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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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한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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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아픈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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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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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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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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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구름 한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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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아픈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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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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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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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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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구름 한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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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아픈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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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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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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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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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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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아픈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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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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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의 부정관사는 단수 가산명사 앞에 쓰여, ‘(1) 대상이 정해지지 않은, 동일 종류의 아무 거나 하나’라는 뜻으로 쓰이는 때가 있고, (2) 어떤(a certain, some) 이라는 뜻도 있다. 이는 대상은 정해졌지만 정체를 모를 때나 정체를 밝히고 싶지 않을 때 쓰는 말로, 화자와 청자 사이에 한쪽만 알고 있다고 추정될 때 쓰는 것임에 반해, 정관사 the는 화자와 청자의 인식 공유를 전제로 한다. (부정관사에는 다른 뜻도 있지만, 여기서는 위 둘이면 족하다).
우리말에서는 앞에 아무런 수식어가 없이 쓰인 단수명사가 일반적인 총칭이다. ‘사람’을 예로 들어보자. ‘(다른 동물과 구분되는) 종(種)으로서의 일반적인 사람’을 말할 때면 ‘사람’이라 하지 굳이 ‘사람들’이라 쓰지 아니하며, 영어와는 달리 ‘한 사람’이라고 하면 틀린다. 반면 영어에서는 복수명사인 ‘people’이 총칭의 대표이며, 단수명사인 ‘a person/the person’으로도 때에 따라 총칭을 나타낼 수 있다. 한편 ‘어떤 사람’은 위에서 설명한대로 당장은 정체가 밝혀지지 않지만 이제부터 차차 설명하려는 단수의 사람을 나타낸다. 그렇지만 앞에 관형사가 오면 좀 달라지는데, ‘아름다운 사람’만으로 ‘어떤 아름다운 사람’의 뜻을 가진다. 즉 우리말에서는 형용사(아름다운)만으로 ‘영어의 관사(어떤) + 형용사(아름다운)’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위의 제목을 보자. ‘encounter’는 ‘보통 만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뜻하지 않은 만남, 우연한 만남, 조우(遭遇)’라는 뜻이기에, ‘An Encounter’는 ‘우연한 만남, 뜻밖의 만남, 어떤 조우’가 적격이지, ‘하나의/어떤 우연한 만남’, ‘우연한 조우’는 모두 중복이라 어색하다. 그냥 ‘만남’만으로는 ‘우연’이라는 중요한 뜻이 빠지고, ‘만남 사람’은 괜히 한 걸음 더 나아간 꼴인데, ‘encounter’에 ‘만난 사람’이라는 뜻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영어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기억하자. 역자가 번역기교상, 글의 내용을 감안하여 ‘만난 사람’을 굳이 썼다면, 그것까지 우리가 뭐라 그럴 계제(階梯)는 아니다.
똑 같은 논리를 적용하면 ‘A Little Cloud’는, 번역상 ‘작은 구름 하나/한 점’ 식으로 ‘하나’란 걸 강조할 수는 있지만, ‘작은 구름’으로 족하다. ‘A Painful Case’의 번역에서는 아무도 ‘하나’, ‘어떤’이란 군더더기를 붙인 사람은 없다. 또 여주인공이 기차에 몸을 던진 사건만 두고 보면 비록 참혹하다고 할 수 있지만, 전체 스토리 전개 및 주제에 따라 ‘painful’은 ‘가슴 아픈’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A Mother’이 일반적인 어머니 이야기도 아니고, 우리 엄마 이야기도 아니고, 아무나 한 분의 어머니 이야기도 아닌 바에야, 왜 ‘어떤 어머니’가 좋겠다는 것인지는 이로써 설명된다.
2. the Wild West (p.11)
맨 첫 줄에 나오는 표현이다. 왜 두 군데 ‘W’가 하필이면 대문자이겠는가? “회장님의 방침” 때문은 아니고, ‘미국의 서부지방(김병철)’도, ‘황량한 서부지방(김종건)’도 아닌 ‘개척시대 미국 서부(김정환)’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미국 서부’도 아니고 ‘황량한’ 서부도 아닌, ‘변경(frontier) 마을과 농지 개척, 금은의 발견과 채굴, 술과 여자를 둘러싼 보안관과 악당의 총질이 난무하던’ 미국의 그 서부를 말할 때만 이렇게 쓰는 것이다.
3. The Union Jack, Pluck, The Halfpenny Marvel (p.11)
2의 바로 다음 줄에 나오는 잡지 제목이다.
『더 유니온 잭』,『플럭』,『더 하프페니 마블』 (김병철)
《유니언 잭》,《담력》,《하찮은 경탄》 (김종건)
『더 유니온 잭』,『플럭』,『더 하프페니 마블』 (김정환)
『영국국기(The Union Jack)』,『담력(Pluck)』,『반 페니 불가사의(The Halfpenny Marvel』 (전은경)
영문으로만 적은 것은 괄호로 우리말 뜻을 병기하면(비록 한영으로 순서는 바뀌었지만, 전은경처럼) 훨씬 실감이 날 것이다. 한편 김종건의 ‘유니언 잭’은 번역이 안된다는 건지, 번역할 필요도 없이 알고들 있을 것이라는 건지 모르겠다. 또《하찮은 경탄》의 뜻은 누가 봐도 《별볼일 없는 놀라움》 아니겠는가? 실제로는 《반 페니라는 싼 가격으로 살 수 있는 ‘놀라움’》이라는 잡진데……(전은경, p.88에 이 잡지의 표지 사진이 실려 있다)
3. He had a little library made up of old numbers of the Union Jack, Pluck, and The Halfpenny Marvel. (p.11)
2와 같은 문장으로, 같은 문장을 번역가들이 얼마나 서로 달리 받아들이는지를 보여주고 싶다. 김정환 쪽이 제일 부드럽다.
그는 책부스러기를 좀 가지고 있었는데∙∙∙∙∙∙따위의 지난 호의 잡지가 대부분이었다. (김병철)
그는∙∙∙∙∙∙하는 낡은 소년 잡지들로 가득 채워진 조그마한 서재를 갖고 있었다. (김종건)
그는∙∙∙∙∙∙같은 소년잡지의 지난 호들을 한보따리 갖고 있었다. (김정환)
4. … and the peaceful odour of Mrs Dillon was prevalent in the hall of the house. (p.11)
김병철 역본은 마치 딜론 부인의 냄새가 원문과는 반대로 나쁜 듯이 들린다.
집 현관방에는 딜론의 어머니가 풍기고 간 냄새가 코를 찔렀다. (김병철)
딜런 부인이 풍기고 간 아련한 냄새가 집의 현관 어디에나 어려 있었다. (김종건)
딜론 부인의 평안한 향기가 현관에 널리 퍼져 있었다. (김정환)
5. I could understand it( = 수업시간에 위의 소년모험잡지를 보는 것) if you were … National School boys. (p.12)
소년들이 드디어 수업시간에까지 숨기고 잡지책을 보다가 신부님에게 야단맞는 장면이다.
아일랜드의 교육제도는 우리나라나 미국과 다를 뿐만 아니라 영국과도 달라서 헷갈린다. 아일랜드 사람인 Brown교수에 따르면, 1830년대 초 영국 입법가들에 의해 수립된 아일랜드 교육제도에서 National School은 우리로 치면 ‘초등학교(Primary School)’의 개념이라 한다(Brown, pp.246-247). 김병철은 이를 영국의 공립학교로, 사립학교인 ‘public school, independent school, college’와 대비되는 개념인 ‘state school’로 생각하는 듯하다. 미국의 유명한 조이스 해설가인 Gifford(1919-2000. 전 Williams College 교수) 역시 이를 미국의 ‘public school’에 대응하는 개념(Gifford, pp.36-37)이라고 했는데, 이는 일부만 맞는 것이다. 왜냐하면 미국의 ‘공립 초등학교’만 아일랜드의 ‘National School’에 해당하고, ‘공립 중고등학교’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전국의 어린이들을 상대로 기초교육(a basic education with something of a practical emphasis for the majority of Irish Children)을 하는 학교를, 김정환처럼 직업 교육 위주의 국립학교(마치 국립기술중고등학교 정도로 들리지 않는가?) 라는 것도 이상하다. 영세 교육기관인 ‘공립 초등학교’와 비교했을 때, 주인공이 다니는 ‘사립 초등학교’ 소속이 느끼는 우월감을 나타내는 문장이다.
네가∙∙∙∙∙∙만일 공립학교 아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김병철)
만일 네가∙∙∙∙∙∙초등학교 학생이라면 이해할 수 있다만. (김종건)
너희들이 혹시 국립학교(직업교육 위주의 학교 – 역주) 학생들이라면 (김정환)
공립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본다는 것은 수치스럽다고 (전은경: 물론 이 책은 번역본이 아니고 해설서지만 이런 사실(facts)은, 강의할 때처럼 기억에 의존한다면 몰라도, 책으로 나올 때는 틀리면 안될 것이다. 반대로 해석했다.)
6. (Joe Dillon) and his fat younger brother Leo the idler(p.11)…
and Leo Dillon was to tell his brother to say he was sick. (p.13)
Dillon 형제 중에서 Joe가 형이고, Leo가 동생임을 알 수 있다. 아래를 보라.
레오 딜론은 동생한테 시켜 몸이 아프다고 말하기로 했다. (김병철)
7. 고유명사(地名)의 번역: the Canal Bridge, the Wharf Road, the Vitriol Works (pp.13-14)
운하 다리, 부둣가, 유산염 공장 (김병철)
운하교, 부둣가, 황산염 공장 (김종건)
커낼 브릿지, 와프로(路), 비트리올 공단 (김정환)
왕립 운하 다리(Royal Canal Bridge), 부두 도로(Wharf Road) (전은경)
이것도 보자: the Pigeon House, the North Strand Road(pp.13-14).
피진 하우스 발전소, 노스 스트랜드 가(街) (김병철)
피전하우스 발전소, 노스 스트랜드 가도 (김종건)
피젼 하우스, 노쓰 스트랜드 로 (김정환)
피전 하우스(Pigeon House), 북 해변 도로(North Strand Road) (전은경)
책 전체를 통해 나타나는 지명(地名) 고유명사 번역의 혼란 중 일부이다. 번역에 그나마 원칙이 있는 것은 김정환과 전은경인데, 나머지 두 사람은 편의대로 그냥 왔다 갔다(의역했다, 음역했다) 하는 데다가 그 혼란한 항목마저 똑 같다(필자가 이 두 번역본을 어디에선가 베낀 것으로 의심하는 이유 중 하나). 필자의 의견은 고유명사는 음역하되, 독자의 이해 편의를 위해 처음 나올 때만 괄호 안에 한글 뜻을 병기하고 그 다음부터는 그냥 고유명사로 취급해서 음만 적는 것이 합리적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예) 처음: 커낼 브리지(로얄 운하의 다리 중 하나), 그 다음부터 계속: 커낼 브리지
8. Mahony used slang freely, and spoke of Father Butler as Bunsen Burner. (p.14)
번역부터 먼저 보자.
머호니는 거리낌없이 상말을 썼으며, 버틀러 신부를 번저 영감이라고 불렀다. (김병철)
머호니는 속어를 마구 사용했으며, 버틀러 신부를 번저 영감이라고 불렀다. (김종건)
마호니는 은어를 거리낌없이 썼고 버틀러 신부를 번써 영감이라고 불렀다. (김정환)
이 부분이 판본 문제다. 초창기 판본에 나왔던 ‘old Bunser’는 후일 ‘old Bunsen(화끈한 분젠버너 같은 영감)’이 잘못 표기된 것으로 생각되었고, 이마저 스콜즈본에서는 아예 ‘Bunsen Burner’로 교정된다. ‘Bunsen Burner(분젠 버너)’는 1855년 독일의 ‘R.W. Bunsen’에 의해 발명된 강력한 가스 버너로, 화력이 좋아 화학실험실에서 사용되었고, 후일 각종 버너의 기본이 되었으며 ‘분젠등(燈)’이라고도 한다. 위의 책 역자들이나 그 시대와는 달리 요즘 독자들은 “검색창에 ‘분젠 버너’라고 쳐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이 버너의 화력을 버틀러 신부의 성질에 빗대고, ‘Butler-Burner’의 운율을 맞춘 별명으로, 이윤기 장편소설 『하늘의 문』에 나오는 성질 화끈한 외국신부님의 별명 ‘불칼 신부’라는 말과 얼추 비슷할 것 같다. ‘성질 화끈한 버너(세게 읽으면 빠나) 신부 버틀러’.
한편 이번 글부터 빼기로 한 임병윤 역본에는 ‘기차 화통 영감’이라 되어 있는데 이도 저도 아닌 근거 없는 번역이다.
조이스의 우리나라 번역은 이미 1930년대에 “The Boarding House(하숙집, 최정우 역)”, “Counterparts(샐러리맨, 양주동 역)”, 그리고 역자 미상의 “A Little Cloud”가 나옴으로써 시작되었다(역본 1, 작품 해설, p.308). 또 1960년에 부분 번역본인 『더블린 사람들(여석기, 나영균 공역, 동아출판사)』이 나왔고, 최초의 완역서는 역시 1960년에 나온 『따브린 사람들(박시인 역, 을유문화사)』이라 한다. 특히 이 후 번역본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아마 여기서 다른 역본들이 주로 베꼈다는 뜻이리라—필자)으로 생각되는 박시인 역본의 경우 적지 않은 오역과 원문 누락 등 부정확한 부분이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어 작품 이해에 지장을 줄 정도이며, 가독성과 작품 이해에서도 크게 미흡하다고 한다(좋은 번역, pp. 411-414). 필자의 사정상 이 초기 번역본들을 참조하지 못한 점은 아쉽다.
9…. I came back and examined the foreign sailors to see had any of them green eyes for I had some confused notion. (p.15)
우선 문법적으로 밑줄 부분을 생각해 보자. (to see) “Have they green eyes?(미국식으로는 하면 Do they have green eyes?)”를 간접화법으로 바꾸면, (to see) if any of them had green eyes가 되고, 여기에서 if를 생략하고 주어 동사 도치를 일으켰다고 생각하든지(If I were you를 Were I you로 도치하는 것과 같은 문법 현상), 아니면 직간접 화법이 혼합된 조이스 특유의 자유간접화법(free indirect discourse)으로 봐도 좋다.
한편 여기서 ‘green eyes’가 뜻하는 바를 모르면 문장의 속뜻 이해가 어려울 것이다. 호머의 서사시 주인공이자, 바로 조이스 필생의 테마인 오디세이(율리시스)가 바로 녹색 눈을 가졌다고 하며, 이는 ‘항해와 모험’을 암시한다는 것이 통설이지만, 역주를 단 책은 없다. 뒤에 다시 괴짜 영감이 ‘암록색 눈’을 가진 것까지 합해서 두 권의 해설서(민태운, 전은경)에는 언급이 된다.
10. “All right! All right!” (p.15)
김병철(p.28)의 번역이 재미 있고 옛날 생각이 나게 해서 옮겨 본다. “오라이! 오라이!”
옛날하고도 옛날, 전철이라고는 없던 시절, 시내 버스에 안내양(그때는 차장이라 했다)이 있었고, 버스가 대중 교통의 주종이라서, 출퇴근길, 등하굣길 버스는 엄청 붐볐다. 요즘 지하철 한창 붐빌 때는 저리 가라 할 정도였고, 차비 받는 것 외에도, 일본 지하철에서 사람 밀어 넣고 문 닫는다는 ‘push man’ 역할을 이 안내양들이 겸했었다. 마지막 승객을 다 밀어 넣은 안내양은 자신이 올라타기 직전에 꼭 차체를 손바닥으로 두들기며 외쳤다. “오라이! 오라이!” 요즘도 가끔 차량과 관련된 곳에서는 이 용어를 들을 수 있다.
11. when we reached the field we made at once for a sloping bank over the ridge of which we could see the Dodder. (p.16)
(우리는) 들판에 다다라 곧 경사진 둑 쪽으로 향했는데, 그 산마루 너머로 저만치 도더 강이 보였다. (김병철)
(우리는) 들판에 도착하자 이내 경사진 둑 쪽으로 향했다. 그곳 산등성이 너머로 도더 강을 볼 수 있었다. (김종건)
우리는 즉시 경사진 둑을 향해 갔고, 그 등성이 너머로 도더강(리피강의 지류 중 하나 – 역주)이 보였다. (김정환)
원래 문장을 둘로 쪼개보자(관계사절은 머리 속으로 이렇게 해보면 이해가 쉽다).
We made at once for a sloping bank.
We could see the Dodder over the ridge of the sloping bank.
‘sloping bank’가 두 번 나오므로 관계사를 이용하면 한 문장으로 만들 수 있다. 전치사 of의 목적어이므로 ‘of which’로 바꿀 수 있다. 의미단위인 ‘over the ridge of which’가 앞으로 나가면 원래 문장이 된다. 즉 ‘무엇의 ridge(능선)냐’ 하면 ‘경사진 둑의 마루/등마루/능선/등성이(ridge)’란 말이다. ‘ridge’를 경직되게 ‘산마루’로 해석하니까, 이런 번역이 나오는 것이다. 도대체 둑에 웬 ‘산마루, 산등성이’란 말이며, 그것도 똑 같이 틀리고 말만 살짝 바꾼 것이 앞의 두 책이다.
12. He was shabbily dressed in a suit of greenish-black and wore what we used to call a jerry hat. (p.16)
둑 경사면에 앉아 쉬고 있는 두 아이들 앞에 괴짜 영감이 나타난 장면이다.
(그는) 푸르스름한 검은 양복의 초라한 차림에, 제리모라고 우리가 늘 부르던 꼭대기가 높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김병철)
그는 푸르스름한 검정 양복을 초라하게 입고 있었고, 우리가 보통 제리 모자라 부르는 춤 높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김종건)
그는 꾀죄죄한 검은 녹색의 옷을 입었고 우리가 보통 날림 벙거지라고 부르는 춤 높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김정환)
중절모에 초라한 검푸른 빛 양복을 입고 (전은경)
Jerry hat은 ‘round, stiff felt hat’ (Gifford, p.39. Brown, p.250), 즉 ‘모양이 둥글고, 속에 심을 넣어 춤(모자의 꼭대기 = crown), 챙 또는 테두리(= brim) 등이 일그러지지 않고 단단하며, 양모, 동물의 털, 합성 섬유 등을 섞어 겉에 보풀이 일도록 짠 펠트 천으로 만든 춤이 높은 모자’로 우리말로는 ‘중산모(中山帽)’라고 한다. 이는, 원래는 실크(silk)로 만들고 품이 아주 높으며 귀족들만 쓰던 최고급모자였지만 요즘은 주로 마술사들이 재료보다는 모양만 흉내 내어 쓰는 ‘top hat(실크 해트)’보다는 격이 낮은 모자다. 설명은 길었지만 찰리 채플린 모자가 이 ‘jerry hat’이었으며, ‘derby hat, bowler hat’도 이와 같은 것이다. 앞의 두 책은 그런대로 직역해버렸지만, 이번에는 김정환이 이상한 번역을 했다. ‘벙거지’는 원래 우리나라 옛날 장수들의 ‘전립(戰笠)’을 말하였지만, 그냥 요즘은 ‘모자’라는 뜻으로도 쓰이며, ‘날림’이란 ‘모자를 머리 한쪽에 비뚜름하게 쓴 모양’을 일컫는다. ‘벙거지를 삐딱하게 쓴 외국사람’은 우리나라 민속촌에서나 볼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모자의 중간이 딱딱하지 않고 가장 격이 낮은 ‘중절모(中折帽 = soft felt hat, fedora)’ 따위야 ‘날림’으로도 쓰겠지만, ‘jerry hat’은 딱딱해서 ‘날림’으로 쓰기 어려울 뿐더러 원문에도 ‘날림’이란 말은 없다. 더구나 ‘벙거지’는 ‘춤이 높은 모자’도 아니다. 우리말 사용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글이란 앞뒤 전체가 호응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김정환이 이렇게 불쑥 순 우리말을 쓴 다른 예를 들면, ‘가납사니(gossip, p.37)’, ‘흘게 늦은(slatternly = 몸가짐이 헤픈, p.70) 외에도, ‘찬장(safe, p.8), 살강(sideboard, p.13), 찬장(sideboard, p. 233) 살강(sideboard, p.233)’처럼 같은 영어표현이 왔다 갔다 한 경우도 있다.
아래 사진은 앞에서부터 차례로 전립(벙거지), jerry hat(중산모, bowler hat, derby hat), 중절모(fedora), 그리고 실크 해트(top hat)이다.
13. I had to suggest going home by train before he regained any cheerfulness. (p.16)
이런 문장은 물론 뒤에서부터 해석하여 “~하기 전에 ~ 했어야만 했다”라고 해도 되지만, 문장에 따라 앞에서부터 해석하여 “ ~ 해야만 했고 그러자 ~ 했다”라고 하지 않으면 우스꽝스러울 때도 있다. 예를 보자.
그가 쾌활한 생각을 되찾아 장난을 하기 전에, 나는 갈 때는 기차를 타자고 제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김병철)
나는 그가 쾌활한 기분을 되찾기 전에 기차를 타고 집으로 가자고 제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종건)
이 두 번역은 마치 그가 다시 쾌할 해질까봐 겁이 나서/두려워(lest he should gain any cheerfulness, for fear that he should gain any cheerfulness, for fear of his regaining cheerfulness) 미리 기차 탈 것을 제안한 것처럼 들린다. 이 걱정이 기우가 아닌 것이 실제 그런 역본이 있다. 우리가 논의에서 빼버리기로 했지만 위 8에서 언급한 임병윤 역본을 한번만 더 보자.
녀석이 다시 놀 기분이 생기면 안된다 싶어 갈 때는 기차를 타고 가자고 재빨리 말했다.
제대로 된 자연스러운 번역과 비교해 보자.
내가 전차를 타고 가자고 제안하고 나서야 (그는)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김정환)
기차 대신에 갑자기 전차(?)*가 나온 것은 조금 이상하지만(이 번역본 다른 어디도 train을 전차로 번역한 곳은 없다. 전차는 ‘tram, streetcar, trolley car’이다.) 어쨌든 문장이 무슨 뜻인지는 명확해졌다.
“아, 기차나, 전차나 그게 그거 아니냐?”고 할 사람들을 위해 이 시기 더블린 근처의 전차(電車)에 대해 알아보자면, 우선 더블린 시내의 ‘tram(궤도 마차)’은 1890년대 말부터 1900년대 초 사이에 전차로 바뀌었으며(Gifford, p.162), 시 외곽의 경우 더블린 중심에서 남동쪽으로 향하는 더블린-킹스타운-달키(Dublin-Kingstown-Dalkey)를 잇는 간선도로인 ‘the Rock Road’의 한복판에 tramtrack(궤도길)이 있었고, 말이 끄는 궤도차가 운행되다가, 1896년부터 전차(electric tram/tramcar)가 운행되었다는 기록이 있다(Gifford, p.161). 하지만, 지금 “우연한 만남” 이야기는 대략 1890년대 초, 더블린 시내에서 북동쪽으로 가는 철도선인 ‘The Great Northern Railway’ 주변에서 진행되고 있다(Gifford, pp.24-25, 35). 증기기관이 산업혁명을 선도했던 만큼 1834년에 이미 건설이 시작된 아일랜드의 철도에서는 석탄을 연료로 증기기관차가 이끄는 열차가 다니고 있었다. 위 마차나 전차의 궤도(tramtrack, tramline, tramway)는 선로나 폭(幅)에서 철도(railway)와는 물론 다르다.
한편 Portrait의 2장 앞에 보면 바로 이 tramtrack 이야기가 나오는데, 시간상 이 때도 역시 1890년대 초이지만 위의 이야기보다는 순서상 앞선 시기이므로, 이 궤도 위로 말이 이끄는 마차가 다니던 때였다. “…he heard the mare’s hoofs clattering along the tramtrack on the Rock Road” (James Joyce, A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Man, edited with an Introduction and Notes by Seamus Deane, Penguin Classics, 2003, p.67). “이상옥 역, 젊은 예술가의 초상, 민음사, 1판 21쇄, 2007. 3, p.102”에는 위 문장이 “암말의 발굽이 로크 로(路)의 철길*을 뚜벅뚜벅 걸어갈 때”라고 번역되어 있다.
* 철길은 보통 철도(railway)를 말하지만, 마차 궤도 역시 쇠로 되어 있었으므로 철길로 간주할 수 있다. ‘로크 로의 궤도를 뚜벅뚜벅”은 좀 이상하다.
또 바로 뒤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from the window of the railway carriage, in which he had sat with his redeyed mother, Stephen had seen them( = 스티븐 가족의 이삿짐을 실은 마차) lumbering heavily along the Merrion Road.”(James Joyce, 위 책, p.68)”. “울어서 눈이 벌겋게 된 어머니와 함께 타고 있던 객차의 창을 통해서 스티븐은 그 마차들이 메리온 로(路)를 따라 무겁게 덜컥거리며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이상옥 역, 위의 책, p.103)”. 가세가 영락한 스티븐( = 조이스) 가족이 드디어 한갓진 중산층 교외 주택가인 Blackrock을 떠나 더블린 시내 빈민가로 이사를 가는 장면이다. ‘Merrion Road’는 위 단락의 ‘Rock Road’가 계속 이어지는 길로 해변과 철길 사이를 지나가기 때문에, 이삿짐은 짐마차에 실어 ‘Merrion Road’로 보내고, 철도로 가고 있는 주인공의 눈에 마침 차창을 통해 그 마차들이 보이는 우울한 풍경이다.
이야기가 너무 옆으로 흘렀다. 다시 번역으로 돌아가서 다른 걸 하나만 더 보자.
I had to call the name again before Mahony saw me and hallooed in answer. (p.20)
머호니가 나를 알아보고서 어, 하고 대답하기 전에 나는 또다시 그 이름을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김병철)
머호니가 나를 보고 ‘어이’하고 대답하기 전에 나는 다시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김종건)
내가 이름을 다시 한번 부르고 나서야 마호니는 나를 보았고 대답으로 큰 소리를 질렀다. (김정환)
14. 너무 비판만 하는 것은 한쪽 눈을 감은 것과 마찬가지이니, 필자 생각에 번역이 잘됐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한 군데 소개토록 하겠다.
하루 학교를 땡땡이치고 놀러 가기로 한 주인공 소년이 아침 일찍 약속장소인 다리에 와서 친구를 기다리는 장면이다. 비록 오후가 되면 엉망이 되겠지만 이 시점에서는 얼마나 기분이 부풀었겠는가?
It was a mild sunny morning in the first week of June. I sat up on the coping of the bridge, admiring my frail canvas shoes which I had diligently pipeclayed overnight and watching the docile horses pulling a tramload of business people up the hill. All the branches of the tall trees which lined the mall were gay with little light green leaves, and the sunlight slanted through them on to the water. The granite stone of the bridge was beginning to be warm, and I began to pat it with my hands in time to an air in my head. I was very happy. (p.13)
때는 6월 첫 주의 따뜻하고 맑은 아침이었다. 나는 다리 난간 꼭대기에 올라앉아 내가 밤새도록 열심히 백토칠을 한, 해지기 쉬운 운동화를 보면 감탄하거나, 또 일하러 가는 사람들을 가득 실은 마차를 언덕 위로 끌고 가는 유순한 말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산책길을 따라 쭉 늘어선 키 큰 나무들의 모든 가지들은 작고 연초록빛 나는 잎들로 반짝이는 듯 보였고, 햇빛은 비스듬히 그들 사이를 뚫고 물 위를 비추고 있었다. 다리의 화강암이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는 머리 속의 곡조에 박자를 맞추어 두 손으로 돌다리를 가볍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나는 사뭇 행복했다. (김종건)
* * *
소년의 나이는 첫 단편의 소년보다는 연장자로 보이는데, 나이는 명확히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8살이나 9살 정도로 추측된다. (전은경)
이 단편에서 소년들이 다니는 학교의 모델은 조이스 자신이 다녔던 벨베데어 칼리지(Belvedere College)로,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주간 학교(day school: 기숙 학교가 아님)이다(Gifford, p.36, Brown p.246). 비록 가정 형편 때문에 2년 정도 교육의 공백이 있었지만, 조이스가 이 학교에 입학한 것은 11세(1893년) 때였다.
독자 여러분께 “자매”와 이 “우연한 만남”의 주인공 소년의 극중 나이는 몇 살로 보이는지?
필자는 앞의 것에서는 7-8세, 뒤의 것에서는 10세 전후로 생각한다.
물론 위의 물음에는 의견은 있어도 정답이 있을 리 없고, 각자의 상상에 맡기는 것이 맞지만, 사람들은 조이스 책을 볼 때는 유난히 이런 걸 따지기 좋아하여, 어떤 책에 나오는 어떤 사람이 뒤의 어떤 책에 다시 나오며, 어떤 상점도 나오더라, 어떤 표현이 나오더라 등등 이러다 보니, 아무리 자서전적 요소가 강하다 하더라도 조이스의 유명한 책들이 주로 ‘소설’이라는 걸 잊어먹는 경향이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조이스 산업’(Joyce Industry: 조이스 책의 판매, 해설, 해설서의 판매, 대학에서의 학위 따기 및 수여, 관련 논문, 관광산업에 이르기까지 조이스와 관련된 사업을 흔히 이렇게 부른다)은 오늘날 너무 번창해서, 그 상품인 수많은 주석들이 오히려 온전한 독서를 방해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무를 너무 열심히 보면 숲을 놓치는 법이다. 우리가 다른 작가의 책을 볼 때도, 이렇게 많은 해설이 필요한지 생각해 보라. 물론 여기에는 조이스 자신의 기법인 self-referentiality(자기참조성)과 극도로 설명을 아낀 점도 작용하지만, 조이스 산업계가 부추긴 점도 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나라에서는 ‘제임스 조이스’ 하면 엄청나게 어려운 책을 쓴 괴물이나 돌아버린 천재 정도로 아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제임스∙∙∙, 누구?’라고 할 사람도 많다는 점에서 조이스 붐은 없다고 본다. 필자도 위와 같은 현학적인 경향에 빠지지 않도록 영어공부에 주력하고, 주석은 꼭 필요하든지 틀리게 알려진 부분만 언급하도록 노력하겠다. 이런 점에서 아래 시(詩)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시를 쓴 Patrick Kavanagh(1904-1967)는 조이스와 같은 아일랜드 출신으로, 어떤 조사에 따르면 예이츠(Yeats)에 뒤이어 아일랜드 사람이 좋아하는 시인 2위로 뽑힌 적이 있다고 한다.
Who killed James Joyce?
(누가 조이스를 죽였나?)
I said the commentator.
(내가 그랬어, 라고 평론가가 말했다.)
I killed James Joyce
(내가 그를 죽였다네)
for my dissertation.
(내 학위 논문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