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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지마! 나 영어책이야
문덕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7월
평점 :
품절
지긋지긋한 영어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수가 있을까? 그럴 경우 십상은 영어사용으로 의사소통하기 위한 책이 아니라 영어에 관한 지식을 늘어놓은 책 또는 체계적인 학습서가 아니라 단편적인 흥미 위주의 책이기 쉽다. 이는 인간이 만들어낸 사유체계 가운데 가장 복잡한 것이 언어라는 데서 오는 어쩔 수 없는 한계로 보인다. 재미있게 설명하기에는 영어든 우리말이든 언어라는 놈은 너무 복잡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책이 진짜 재미있다고 생각되든지, 그렇게 광고한다면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멀어지기 쉽다는 것이 서평자의 생각이다.
영어를 단어로만 한정할 경우는 그나마 조화(造化)를 부릴 여지가 있는데, 지금은 ‘새로 쓰고 그린’이란 접두어가 붙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어 1, 2 (한호림, 디자인하우스)”라는 책은, 어려운 2가지 사명(학습과 재미) 양쪽을 동시에 충족시켜 주는 탁월한 책이었다. ‘어원(語源: etymology)’ 해설과 테마별 분류라는 2가지 학습방법을 택하고, 저자 자신의 삽화와 사진에 의한 박물기(博物記)적 설명은 단어공부를 중심으로 영어에 대한 교양을 넓혀주기에 충분했다. 더구나 이 책만으로 마치 모든 영어가 다 된다는 호들갑이 없었다는 점이 더욱 드문 미덕이었다.
테마별 분류라는 한 가지 방법이기는 해도, 인간과 생물(사람의 몸, 몸의 상태, 질병, 병원과 의사, 감각, 동물, 식물), 감정과 성격(기쁨과 슬픔, 놀람과 공포, 질투∙실망∙화, 성격과 품성, 정직과 부정직), 생활과 여행(주택, 의복, 음식, 쇼핑, 스포츠와 레저, 여행), 이런 분류 하에 저자가 골라낸 1,000개의 단어를 이야기 식으로 풀고 유명 만화가의 illustration을 곁들이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한 형식을 보여주니까, 혹시 이 책에서도 바로 그런 미덕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대학교수가 쓴 책 속 추천사를 보면 “대학생 수준의 교양어휘(educated vocabulary)의 가장 체계적인 교양입문서이며, 가장 필수적이라고 할만한 1천 개를 뽑아낸 안목에 놀라고, 흥미롭게 구성한 재능에 찬탄을 금하지 못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 책의 1,000개 단어가 가장 필수적이라는(예를 들어 사용빈도 조사나 corpus에 의한 통계) 근거가 전혀 없고, 위의 분류가 가장 체계적이라는 확신도 없으며, 영어책치고는 재미있는 이야기지만 재미가 그만그만한 소설책보다도 못하고, 자주 보아 친근한 만화가의 삽화도 한몫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추천사의 일부 부분에는 선뜻 공감이 가지 않지만, 괜찮은 교양단어책이라는 점에는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책 앞, 뒤, 속 무차별로 등장하는 책에 대한 광고문구는, 실망뿐만 아니라 과연 저자의 집필 의도도 이랬을까? 하는 의문을 주기에 충분하다. 이는 단순한 광고 수사(修辭) 문제가 아니라, 책의 독자층이나 학습의 성격을 규정하기 때문에 학습서에서는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고등학생 또는 대학 초년생을 위한 교양 성장소설인 헤르만 헷세의 '수레바퀴 밑에서'나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같은 소설을 '어린이, 노인, 고모, 삼촌, 남녀노소'를 위한 책이라고 광고한다면 얼마나 한심한 일이 되겠는가?
단 1,000개의 단어로 “회화도, 시험도, 공부도, 직장도 못할 게 없으면” 그 참 얼마나 좋겠나? 달랑 1,000개로 “나의 영어운명을 바꾸어 놓을 수 있으면” 또 얼마나 좋겠나? 하지만 현실이 그럴까? 단 1,000개로 모든 것을 운운하면 그 값을 치르는 법이다. 즉, 테마별로 모은 단어가 가장 기초적인 것에서 고급단어에 이르기까지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98페이지~106페이지의 ‘기쁨과 슬픔’ 부분을 보자. 감정을 설명하면서 emotion, joy, sorrow, cry, smile, envy, laugh, joke, regret같은 쉬운 단어를 빼놓을 수 없지만, ludicrous, compunction, pathetic, whimper, appease같은 고급 토플이나 SAT 수준 단어가 나오기도 한다. 이런 특성 때문에 “노인도, 아이도, 삼촌도, 고모도” 같이 볼 수 있을지는 몰라도(자기가 아는 단어가 가끔 나오면 얼마나 으쓱하겠는가?),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단계적인 학습을 필요로 하는 “중딩, 고딩, 대딩, 직딩”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을지는 극히 의심스럽다. 아까 추천사의 "이 책은 대학 수준의 교양 영어책"이라는 언급에 대해서는 평자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어느 정도 영어학습이 된 사람들이, 이 책을 통해 그 동안 생각하지 못했던 카테고리(category)별 단어정리를 하며, 어휘에 대한 심화지식의 기초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마치 남녀노소에게 필요한 책인 것처럼 광고하는 것은 과연 옳을까?
게다가 1편의 성공(?)에 힘 입어 최근 나온 2편은 1편에서 다루지 못한 세상사의 다른 부분(문화와 사고, 정치, 경제 등등)을 1편처럼 1,000개 단어로 해결한다면서 비슷한 문구를 통해 광고하고 있다. 어이쿠, 이를 어쩌나? 애초 광고의 호들갑과는 달리 벌써 필수단어가 2,000개로 늘었네? 앞으로 얼마나 더 늘어나는 것일까?
이 책은 ‘영어책’이 맞다. 하지만 ‘영어책’이 바로 이 책은 아니다. 언어사용의 4가지 측면인 Listening, Speaking, Reading, Writing의 기초를 형성하는 3가지 토대(vocabulary, grammar, pronunciation) 중, 단어에 관한 약간 재미있는 교양서 중의 하나일 뿐이며, 그것도 아무나가 아니라 일정 수준 이상의 학습자를 대상으로 한 것이다.
이런 상황은 한 가지 물음을 떠올리게 한다. 저자는 책 내용에만 책임이 있고, 그걸 어떻게 광고하든 그 점은 출판사 자유라서 저자의 의도와는 무관한 것일까? 베스트셀러로 뜨기만 하면 행복한 것일까?
(蛇足 1) Richard Harris씨는 누구인가?
책 안표지에 보면 ‘감수(監修)’했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몇 페이지 뒤 ‘추천사’에 보면 Writer라고 되어 있다. '저자'라는 말인지 그냥 직업이 '작가'라는 말인지 모르겠다. 게다가 “… I have made certain that any reader, especially beginners, will learn a great deal of English, as well as about Western culture, on each and every page.”라고 썼는데 이를 “이 책을 읽는 분들, 특히 초급자들은 서양 문화는 물론 영어에 관한 많은 지식과 정보를 이 책의 모든 페이지에서 배우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라고 번역해 두었다. ‘make certain that’은 ‘내용을 확신한다 ( = be certain that)’가 아니라 ‘자신이 확실하게 만들었다’는 뜻인데, 어찌 ‘감수자’가 감히(?) 이런 말을 쓸 수 있는지 궁금하다.
(蛇足 2) 평자는 이 책 제목을 보고 '웃지마'의 뜻이 '장난이 아니니까, 심각히 받아 들여줘'로 따라서 전체 제목은 '나도 심각한 영어책입니다' 정도로 생각했었는데, 광고문구를 보니까 그게 아닌 것 같다. '전 국민을 웃긴' 영어책, 그만큼 '재밌는 영어책'이므로 웃다고 배꼽이 빠질 수 있으니 주의할 것, 뭐 이런 정도로 생각하나 본데, 이쯤 되면 자화자찬이나 오해도 심각한 중증이다. 딱딱한 학술서적이나 교과서에 비해 조금 나을지는 몰라도, 진짜 웃음이나 해학과는 거리가 먼 이 책을 진짜 웃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더 웃긴다는 말. 물론 사람마다 느낌이야 다르겠지만, 평자가 이 책을 읽으면서 주로 한 생각은, '어찌 이리 유치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