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땅의 이방인들 - 미국 우파는 무엇에 분노하고 어째서 혐오하는가 이매진 컨텍스트 62
앨리 러셀 혹실드 지음, 유강은 옮김 / 이매진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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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자신의 이익과 무관하거나, 심지어 반대되는 정책들을 지지하며 열올리는 친구를 오랫동안 이해할 수 없었다.

부의 재분배를 반대하고, 복지 확대를 반대하던 그. 

<자기 땅의 이방인들>은 그를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던져 준다.


부제는 <미국 우파는 무엇에 분노하고 어째서 혐오하는가>이다.

사회학자인 저자는 미국의 좌우가 갈수록 분열을 더해가는 현실,

특히 그 분열이 좌파가 왼쪽으로 이동한 때문이 아니라, 우파가 오른쪽으로 이동한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미국 전체에서 빨간색 주(공화당을 지지하는 주)는 더 가난하고, 10대 엄마와 이혼자가 더 많고, 건강 지표가 낮고, 비만율이 높고, 외상 관련 사망자가 많고, 저체중 신생아가 많고, 학교 입학률이 낮다. 평균해서 빨간색 주 사람들은 파란색 주(민주당을 지지하는 주)사람들보다 5년 일찍 사망한다. 실제로 루이지애나 주와 코네티컷 주의 기대수명에서 드러나는 차이는 미국과 니카라과 사이의 차이하고 똑같다."


많은 지표가 증명하듯, 우파를 지지하는 쪽이 더 가난하고, 환경오염에 시달리고 있음에도, 

그들이 복지확대에 반대하고, 환경보호청 축소(혹은 폐지)를 주장하는 정당을 지지하는 현상.

이것이 저자가 지목하는 '거대한 역설'이다.


"소농들이 몬산토에 표를 던진다? 길모퉁이 구멍가게 주인이 월마트에 표를 던진다? 동네 서점 주인이 아마존에 표를 던진다?"


저자가 찾아간 우파의 심장부, 루이지애나에서 저자는 그들 내면의 이야기를 듣고자 한다. 

그들에 관한 이야기들 중 인상 깊은 부분들을 추리면 이렇다. 


청정한 자연환경을 사랑했지만 석유 시추 및 유사 산업에 종사하며 그 환경을 오염시키는 일에 때때로 동참해야 했던 사람들,

그들은 일자리 혹은 환경,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린다.

또한, 지역을 거의 장악하다시피한 폭스뉴스는, 그 압박감을 가중시킨다. 

교회 역시 그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데 일조한다. 


무엇보다 저자가 소설처럼 구성한 그들 입장에서의 '내면의 이야기'는 굉장히 인상깊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꾼 사람들, 그들은 성실하고, 긍정적으로 살아왔다. 그럼에도 그 꿈은 아직 요원해보인다.  

그들의 인내심이 바닥날 때쯤, 새치기 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여성, 이민자, 난민, 공공 부문 노동자는 물론 멸종 위기의 동물이라는 갈색펠리컨까지. 

그들은 의심을 품게 된다. 누군가 새치기 하는 사람들을 돕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그들은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열심히 살아왔음에도 계속해 뒤로 밀린다고 여기는 그들은 이렇게 "자기 땅의 이방인들"이 되어간다. 

이방인 신세가 된 이들은, 그들끼리 하나로 뭉치며 다시 다수가 된 기쁨에 휩싸인다. 

그렇게, 트럼프는 이들을 자극하며 대통령이 된다. 


미국의 우파를 다뤘지만 한국의 내 지인들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 반갑기도 했다.

저자가 묘사하는 지역별 빈부의 차는 매우 사실적이어서 섬뜩하기도 했다. 

가령, 유기농산물을 구할 수 없다거나 온갖 튀김 메뉴가 그득하다거나, 길에 사람이 없다거나 하는 등의 섬세한 예. 


좌든 우든, 함께 살아가야 하는 동반자이다.

저자는 쌍방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연구를 시작했고, 이 책을 저술했음을 분명히 한다.  

자신과 다른 쪽을 희화화하거나 단지 우스개소리의 소재로 삼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좌우는 함께 정책을 결정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에, 서로를 토론과 설득의 대상으로 봄이 마땅하다.

미국을 집중적으로 다뤘으나, 좌우가 더욱 극심하게 분열되는 현상은 비단 어느 한 나라의 일이 아닐 것이다. 

한국의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많은 이들과 함께 읽고 싶은 책이다.


<자기 땅의 이방인들 - 앨리 러셀 혹실드 지음, 유강은 옮김/ 이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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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만 조금 뺐을 뿐인데 - 일본의 대표 지성 우치다 타츠루의 삶이 가벼워지는 일상인문 에세이
우치다 타츠루 지음, 전화윤 옮김 / 오아시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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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쾌한 대목들이 꽤 있다. 

가령, "오래 참을수록 꼰대가 됩니다"라는 꼭지라든가.

인간은 생각보다 쉽게 망가지므로, 견디기 힘든 인간관계는 재빨리 도망치라고 하기도 하고,

끊임없이 노력할 것을 강조하는 성취지향적인 현대 사회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제시하기도 한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저자가 언급한 하루키의 책 제목 재인용)"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불쾌함을 견디는 나'를 '그릇이 큰 사람'이라고 착각하면 그때부터 '꼰대가 되는 길'은 탄탄대로입니다. 그런 사람은 불쾌한 인간관계만을 계속 선택하게 됩니다."


불쾌한 인간관계를 버티지 말라는 것은, 가정에도 해당된다. 

사춘기 때 부모와의 갈등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므로, 참지 말고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불편한 내용도 더러 있다. 

비즈니스와 노동을 구분한다거나, 여성의 일에 대한 편견이 드러나기도 한다. 

남성이 자신의 성공에 대해 소탈한 반면, 여성은 자신의 성공에 대해 득의양양하다는 시각.

페미니즘이 주장하는 사회적 자원의 공정한 분배는, 결국 '분배되는 것에는 가치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사실 남성들은 '그런 것들(사회적 자원)'에 그다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자신이 정녕 왜 일을 해야 하는가 의문을 가져야 한다는 것엔 동의하지만,

젠더에 대한 시각은 영 동의할 수가 없었다.

그러한 부분은 남자는 남자답게, 여자는 여자답게, 라는 대목까지 이어진다.

불필요한 마찰을 최소화하기 위해 자신의 위치에 맞는 행동양식을 가져야 하며, 그로써 자신의 위치에서 책임을 다하란 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남자답게, 여자답게, 라는 구분이 그리도 명확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신체감수성이 떨어지고 있다는 시각, 생각없이 대중을 따르지 말아야 한다는 문제의식,

자본주의 하에서 모두 같은 것을 욕망하게 되는 것, 서로의 눈치를 보며 같아지려고 하는 것,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욕망하는 것에 대한 비판의식도 좋았다. 


핵가족화 될수록 타인에게 배타적이 되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시선도 인상 깊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유를 느끼면서 훨씬 깊은 곳에서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는 환상의 공동체를 어떻게 구축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내가 줄곧 고민하고 있는 주제입니다." 


나 역시 가족과 공동체에 대한 공상에 잠길 때가 있어서 위의 고민은 좋았다.

그러나 그 대책이 확대가족이라는 것엔 동의하진 않는다. 


"일본의 대표 지성", "지금 일본에서 가장 신뢰받는 철학자"라고 책은 소개하고 있다.

모든 내용에 동의할 수는 없지만, 현 사회를 바라보는 다른 이의 시각을 들여다보는 건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 작은 우물에 갇히지 않기 위하여.  


<힘만 조금 뺐을 뿐인데 - 우치다 타츠루 지음, 전화윤 옮김/ 오아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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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딸의 인생을 지배한다 - 모녀관계, 그 끝없는 애증의 늪에 관한 가이드북
사이토 다마키 지음, 김재원 옮김 / 꿈꾼문고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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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는 <모녀관계, 그 끝없는 애증의 늪에 관한 가이드북>이다. 


상징적 의미로서 '어머니 죽이기'가 왜 '아버지 죽이기'보다 그토록 어려운지에 대해 설명한다.

부자관계가 지배-피지배 혹은 그 전복이라는 상대적으로 단순한 구도인 반면, 모녀관계는 결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고.

"싸우려 해봤자 싸우는 방법마저 상대에게 배운 상태로는 진정으로 상대를 이길 수 없습니다. 어머니의 지배는 이처럼 이중 삼중으로 얽혀 있으며 심지어 무의식적으로 행해집니다. 정면으로 맞서도 승산이 없지요. 남은 방법은 거기서 도망치거나, 집을 나가거나, 혹은 다른 장소에서 어머니가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저자는 그 이전의 연구사례들을 다양하게 제시한다.

일례로, 현대 여성에게 어머니로 살아가는 길 외에 주어진 선택지가 너무 적기 때문에, 어머니를 부정하면 곧 자기 자신을 잃게 되기 때문에 이 복잡한 모녀관계가 발생한다는 이론이 있단다. 이들은 육아가 아버지의 책임이 된다면 부자 사이에도 똑같은 현상이 발생할 것이라는 주장한다고. 


저자는 이에 반대한다. 오히려 모녀문제가 어머니나 여성을 향한 억압이 덜해졌기 때문에 생겨난다고 주장한다.

"모녀관계의 복잡함은 억압구조 완화에 따라 어머니와 딸이 각자의 내성적 자아에 눈뜨기 시작하면서 비롯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어머니와 딸의 사회적 역할과 규범이 명확히 정해진 사회에서는 자아 간의 충돌 그 자체가 억압받았지요."

즉, 과거에 은폐되어 있던 문제가 근대화 이후 드러나게 된 것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그가 생각하는 문제의 핵심은 "딸을 지배하는 어머니"이다. 

어떤 식으로 발현되든, 그러니까 학대 관계이든, 일란성 모녀관계이든간에, 어머니의 능동성과 딸의 수동성이라는 조합이 근본 원인이라는 것.


"때로는 사랑 그 자체가 싸움의 양상을 띠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랑과 배려에서 비롯되는 싸움은 무척이나 끈질깁니다. 죽음이나 격리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지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녀의 싸움은 끝도 없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저자는 어머니와 딸의 관계를 지탱하는 것이 "감각적인 공감과 신체를 매개로 한 동일화"라고 주장한다. 

그것이 이 관계의 친밀함과 복잡함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남성다움'의 훈육은 관념적으로 이루어지기 쉬운 반면, '여성다움'을 훈육할 때는 주로 복장이나 행동 등 신체성을 위주로 이루어집니다. 너무 당연한 얘기지만 이것은 '그렇게 해야 한다'가 아닌,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그렇게 하기로 되어 있다(혹은 되어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신체적 동일화를 통한 훈육이 일시적 지배라면, 딸의 성공을 바라는 어머니의 욕망은 이차적 지배로 나아간다고 한다. 

"이차적 지배는 딸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는 헌신적 선의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보통의 지배와는 달라 보입니다. 그러나 딸의 입장에서 보면 똑같은 지배욕일 뿐이지요. 어머니에게 명백한 지배 의도가 있다면 의논이나 설득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자각없이 이루어지는 지배만큼 몹쓸 것은 없습니다. 지배에 반항하는 태도가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관계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책 말미, 복잡한 모녀관계에서 벗어나기 위한 해결책들을 제시한다.

스스로 복잡한 모녀관계의 표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한 번 이 해결책들을 들여다보는 것은 어떨까 한다. 

나 역시 한 명의 딸로서, 흥미롭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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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그림 - 그림 속 속살에 매혹되다
유경희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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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 얽힌 이야기들, 작가에 관한 이야기들을 보는 재미가 가득하다.


신화 속 인물이나 반인반수 등을 포함하지만 어쨌거나, 

사람을 그린 그림들이라 좋았다. 


강렬한 표지부터 이야기하자면, 고디바 부인의 이야기이다.

지역 영주이자 남편의 폭정으로 괴로워하는 백성들의 고통을 줄여주고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으로 마을 한 바퀴를 돌았던 고디바 부인.

책엔 여러명의 예술가가 구현한 작품들이 등장하는데, 

작품들을 감상하면서 내 취향을 확인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고디바 부인에 얽힌 이야기는, 이 책에 나오는 가장 소프트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남편에게 복수하기 위해 자식을 죽인 메데이아나 세례 요한의 잘린 머리를 들고 있는 살로메의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충격적이다.

지나간 시대를 담고 있기에 불편한 이야기들도 있다.

그러나 자꾸만 알고 싶고, 보고 싶은 것은, 예술이 가진 힘이 아닐지. 


나쁜 그림, 시선을 사로 잡는 강렬한 힘이 있는 이 그림들은, 결국 좋은 그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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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폭주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난주 옮김 / 바다출판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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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살 마루야마 겐지의 여행 에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십 대의 대부분을 소설에만 매달려 살다가, 오토바이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총 5장 중, 1장은 "바람과 도로의 사자"로 호주 사막을 오프로드 바이크로 30여일 달린 경험,

2장은 "폭주 오디세이"로 케냐의 사파리 랠리를 취재하며 경험한 기록,

3장은 "미드나이트 선, 백야"로 노르웨이의 바이크 여행기, 

4장은 "흐르고, 쏘다"로 미국 서부에 대한 여행기..라기보다는 생각들, 

5장 "동경과 두려움"은 바다에 관한 글을 쓰기 위해 거대한 유조선에 직접 탔던 경험이 쓰여졌다.


호주 사막에서의 바이크 여행은 모두가 말리는 위험천만한 일이었다고, "거의 매일 위험과 조우했다"고 강조되고 있다. 


"오토바이는 남자가 혼자서 타야 감동을 얻을 수 있다. 오토바이를 도피의 도구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 무언가를 추구하기 위한, 무언가를 잡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해야만 한다."


그가 학창시절 <백경Moby Dick>을 보고 "그때껏 읽은 책이 전부 쓰레기로 여겨질 정도로" 좋아했다는 것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많은 것을 담은 <모비딕>을 한 마디로 표현할 순 없지만, 어쨌든 첫장부터 나를 웃게 한건 주인공의 허세였다. 

이 책 역시 허세가 가득. 그 이야기를 하려면 끝도 없어 이것으로 접는다.


그는 남자와 여자의 성향에 대해 무 자르듯 정확하게 구분한다. 

그가 구분하는 인간은 세 종류. 남자와 여자, 여자에 가까운 타입의 남자다. 

불편한 부분이 많았던 게 사실이다.


"여자들 대부분은 지속적인 안정을 원한다. 여자에 아주 가까운 타입의 남자도 안정을 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정상적인 남자라면 똑같은 나날의 반복을 견디지 못한다."


"여자와 여자에 가까운 남자는 자기라는 존재를 그렇게 의심하지 않지만, 남자는 그렇지 않다."


"진정한 감동은 언제나 형태의 바깥쪽에 존재한다. 이것이 나의 지론이다. 그러나 그런 감동은 땀과 흙 범벅이다. 여자나 여자에 가까운 남자는 엄두를 내기가 쉽지 않다."


"이래서 여자와는 말을 섞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남자는 용기를 내지 않고는 할 수 없는 말을 여자는 아무렇지 않게 쓱 내뱉는다. 망설임이나 주저 따위는 애당초 알지 못한다는 말투다. 여자는 태어날 때부터 뉴트럴 기어 기능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일까."


"여자는 하늘하늘한 옷을 차려 입고 남자들이 하는 것을 바라보기만 해도 살아갈 수 있다. 남자들의 시선 하나로도 충실감과 감동을 얻을 수 있다."


"여자와 동성애자와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그들은 처음부터 자기만의 답을 갖고 있고, 타인의 의견을 구하는 것은 그 답을 긍정해 주기를 원할 때 뿐이다. 또 그들은 자신에게 유리한 말밖에 원하지 않는다."


와닿았던 그의 통찰들을 옮기자면 이러하다. 


"텐트 안에 누우면, 어떤 동물이든 이 대지에 함께 사는 불행한 동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략...) 인간과 마찬가지로, 왜 그런 꼴의 몸을 지니고 왜 이런 공간에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를 전혀 모르는 채, 열심히 살고 있었다."


"야생동물과 공존할 수 없으면 진정한 문명국가라고 할 수 없다."


"타인의 시선 속에서 사는 삶은 중단해야 한다. 정말 어리석은 짓이다. 또 타인을 말로 부정해 자신을 긍정하려는 태도도 허접하다. 타인의 삶을 문제 삼기 전에 자신의 삶을 확립해야 하는 것이다. 타인의 감동을 나눠가지려 하기 전에 스스로 감동을 찾아 나서야 한다."


소설가로서의 생각을 드러내기도 하는데, 이런 점은 그의 심지가 느껴지기도 한다.  


"술고래에 종일 움직이지 않고서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써 대는 소설가가 많다. 나는 그들의 생활을 도저히 흉내낼 수 없다. 그들의 작품을 간혹 읽어보는데, 역시 군데군데에서 피로감이 느껴진다. 허접한 스토리를 적당한 문장으로 엮어내고 있다. 자제력도 말을 듣지 않아 들떠 있다. 그런데 그런 작품을 좋다고 달려드는 독자가 세상에는 참 많다."


"들새와 들풀을 사랑하는 고상함과 선함만으로는 소설을 절대 쓸 수 없다. 그 점을 오해하는 문학 팬이 많은 듯하다. 그리고 그들의 오해 위에 성립한 일본 문학은 알게 모르게 왜곡되고 말았다. 작품의 주인공이기도 한 작가는 자신이 얼마나 나이브하고 마음씨 좋은 사람인지를 다투는 거짓 세계로 방향을 틀었다."


"나는 소설의 소재를 찾기 위해 외국에 가는 것이 아니다. 소설가에게 중요한 것은 소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바꾸는 것이다."


그의 성차별적인 발언 등이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다는 것을, 작가 스스로 분명하게 알았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런 위험한 글을 쓰는 작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한국의 장 모 소설가가, 쪽바리도 타는 노벨문학상을 한 번도 타보지 못한 한국이라며 개탄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런 표현이 좋다기보다, 논란이 될 수 있는 말이라도 내뱉을 수 있는 그 깡이 좋았다. 

모든 예술가에게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예술가는 그러했으면 좋겠다.

문제가 되든 말든, 세상을 놀라게 하든 말든, 제 안에 품은 생각들을 만천하에 드러낼 수 있는 용기. 


이 에세이에 만족하지 못하면서도, 그의 소설이 보고 싶어졌다.

이런 그의 시각들은 소설에서 어떤 방식으로 드러날 것인가. 교묘할 것인가, 혹은 드러나지 않을 것인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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