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를 쓰다 슈테판 츠바이크 평전시리즈 3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원당희 옮김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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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츠바이크 평전시리즈 중 한권이다.

평전의 범주에 있다 해도 문학인 이상 그 어떤 형식도 가능하겠지만, 흔한 생몰일도 나오지 않는 평전이다.

내게 느껴지는 것은 슈테판 츠바이크의 열정적인 존경과.. 연민. 

그리고 니체에 대한 존경과.. 감히 연민도.

니체가 죽기 전, 이 사람 슈테판 츠바이크를 만났다면, 그의 고독이 조금은 덜해졌을까 객쩍은 상상도 해보며. 


첫 장의 제목은 "등장인물이 없는 비극". 

"니체의 비극은 배우들이나 상대역, 청중도 없이 그 자신의 영웅 비극만을 보여준다. 

 그뿐만 아니라 본래의 관람석, 풍경, 도구, 의상도 없어서, 마치 공기가 희박한 이념의 무대에서 홀로 연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고립, 고독, 저 끔찍한 침묵, 유리 안의 종처럼 그의 사유를 감싸고 있는 대답 없는 고독, 꽃이나 색채, 음향, 동물이나 인간도 없는 고독이 무대를 장식한다. 거기에는 신도 없으며, 돌처럼 굳어서 사멸하려는 원초세계의 고독이 지배적이다."


등장인물이 없는 비극이라니, 고독을 이토록 잘 설명할 수 있을까.

일찌감치 교수가 되고, 바그너의 후광으로 쉽게 유명세를 떨쳤으나, 곧 그는 철저한 혼자가 된다.

"그가 자신에 깊이 몰입하고 시대에 대해 외면할수록" 더욱. 

슈테판 츠바이크는 이 고독을 애초에 그가 원했던 것으로 보진 않는 모양이다.  

"점차 이 비극의 주인공은 불안해져서 허공에다 말하거나, 점점 더 크게 이야기한다. 반향이나 적어도 반발을 얻어내기 위해 점점 더 크게 외치고, 점점 더 제스처가 커진다."


그는 "경쟁자의 은총"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으므로 계속해 그 안으로 침잠해 들어가고,

"핏자국이 밴 넝마를 걸치고 운명과 싸우는 광인 프리드리히 니체는 헤라클레스처럼 반인반마의 괴물 네수스의 불타는 옷을 찢어버림으로써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는 이제 자신과 상대할 경쟁자가 없어서 "자기인식자, 무자비한 자기학대자"로서 자기 자신을 스스로 공격했다. 그는 자신의 광기에 쫓기며 시대와 세계를 넘어섰고, 자기 본질의 한계를 초월했다."


평생을 위경련, 편두통, 무기력증, 치질, 오한 등 온갖 질병에 시달려온 그에겐 고통마저도 연구 대상이다. 

"그는 늘 다른 사람보다 두 배의 고통을 앓았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는 고통을 두 배로 체험했기 때문이다. 즉, 한 번은 실제로 다른 한 번은 자기관찰의 과정에서 체험했기 때문이다."

그는 병 덕분에, 책으로부터의 구원을 얻었다고 말한다. 삶을 새롭게 발견했다고도. 

"니체는 온갖 고통을 기교나 육체적 위기의 부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올바른 인식을 통해서 극복했다."


슈테판 츠바이크가 말하길, 칸트의 진리에 대한 사랑은 진지하고 지속적이며 영속적이지만, 열정의 에로스가 결여되어 있다고 한다. 안전한 체계로서 구축되었다고.

그에 반해 니체, "그의 진리에 대한 자세는 철저히 마성적인 쾌감, 결코 만족이라고는 모르는 뜨겁고 신경질적이면서도 호기심 어린 쾌감의 형태를 지닌다."

니체는 어떤 것도 "'최종지식'일 수 없으며, 종국적 의미에서 진리는 소유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만족할 줄 모르는 호색한처럼, 니체는 끊임없이 진리를 추구하며 뛰어오르고 추락함으로써 하나의 비극을 만들어냈다고.


라이프니츠, 칸트, 헤겔, 쇼펜하우어 등의 학문적 본성의 인간들도 "몸과 마음, 운명까지 다 바쳐 인식을 얻기 위한 영웅적 투쟁에 뛰어든 것은 아니었"지만, 니체는 "모든 것을 다 바쳐 모험에 뛰어"드는 사람이었다고.


결국 어떤 것과도 타협할 수 없던 니체는 고독한 연구를 계속하며 진리를 탐구하나, 

죽기 전 15년간 허름한 방에서 방으로 옮겨다니며 은둔자로서 살다가 끝내 외로운 죽음을 맞는다. 

"열광적인 사고 자체가 자기목적이고 자기향유"였던 사람.

끊임없는 자기 변전을 거친 사람. 

시대의 열등감과 타협할 수 없던 천재.

유럽의 비극을 예견했으나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영원한 비극에 갇힌 사람.  

달력의 원년이 예수가 아닌 자신의 탄생일로 바뀌어야 한다고 요구한 사람. 

과대망상증 환자라는 낙인과 정신병자들의 전형적 자기과시를 지닌, 그러나 전대미문의 기적을 이룩한 사람.


꾹꾹 눌러쓴 듯, 한 문장 한 문장이 인상깊었다. 한 문장도 남김없이 근사했다.

니체를 알았다면 더욱 인상깊었을까.

니체를 몰라서, 과도한 천재는 시대를 놀래키기는커녕 스스로를 고립시킬 수밖에 없겠단 생각이 들었다.

니체 일생의 유일한 친구인 고독은, 슈테판 츠바이크의 손으로 재탄생되어, 상상만으로도 너무 외로워서 숨이 막혔다.  

내가 천재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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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빛
미야모토 테루 지음, 송태욱 옮김 / 바다출판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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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빛>은 총 네 개의 단편 소설이 실려 있다.

한 편도 빠짐없이, 죽음이 등장한다.


표제작 <환상의 빛>은, 자살한 남편을 향한 서간문 형식의 소설이었다. 

나로선 우울이나 자살을,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은 없는 대로, 하는 사람은 하는 대로, 

이미 결정되어진 것만 같다는 생각을 한다. 

이해한다 해도, 못한다 해도, 그것은 어느 쪽의 우열도 의미하지 않는다고도. 

자기파괴적 감정을 이해하는 것이 우월하겠는가,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우월하겠는가. 

모두 난센스. 


그렇게 우울이나 자살을 생각하지만, 남은 사람을 생각하면 복잡해질 수밖에. 

살아가야 한다는 수치심 속에서도 죽을 생각을 해본 적 없는 사람이라면 더욱이. 

(물론, 그 생각을 해봐야 한다는 것 또한 아니다.)


무엇보다 압권은 분위기 그 자체였다. 그 환상적인 분위기. 이것은 네 편의 단편 소설 모두 다 해당했다. 

줄거리나 재미, 의미 등, 소설의 다른 요소들을 배제한다 하더라도, 

그 분위기만으로도 독보적 위치를 차지할 자격이 있는 소설들. 


문학이 응당 그렇듯이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한 작품들이라 생각되고, 그러니 순전히 개인적 감상일 뿐이라는 것을 오랜만에 밝힌다. 


<밤 벚꽃> 

불륜을 저지른 남편과 이혼한지 이십 년, 외아들을 사고로 잃은지 일년 된 아야코.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어느 날, 번듯해보이는 청년이 찾아와 하루만 이층방에서 머물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어영부영 허락하자, 청년은 오늘 혼인신고서를 제출했다며 부인을 데려오고 아야코는 께림칙한 느낌을 갖게 된다.

밤, 동반자살이라는 무서운 상상이 되어 이층에 올라간 아야코는 그들의 대화를 듣게 된다.

"멀리 바다가 보이고 활짝 핀 벚꽃으로 둘러싸여 있고, 일박으로 갈 수 있는 곳이고, 

 게다가 예산은 5천 엔밖에 안 드는 곳. 당신의 그런 바람을 이룰 수 있는 곳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생각나지 않았거든." 

갓 결혼한 부부의 꿈의 장소, 아야코의 집. 

여자는 말한다. 

"전, 여자의 행복이란 정말, 부자 남자와 결혼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남의 말 하듯 하기는... 언젠가 이런 집에서 살 수 있게 해줘요."

"...응."

"...왠지 미덥지 않은 대답이네요."


자못 우습기까지 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아야코는 아아, 이거구나 하고 생각하면서도 

"대체 뭐가 이것인지 아야코로서도 분명히 알기는 어려웠지만, 그녀는 지금이라면 어떤 여자로도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게 당연한 것이 타인에게 얼마나 멀고 먼 꿈인지 알게 될 때의 당혹감.

내가 가진 것을 가지지 못해도, 그리고 가지지 않아도 행복한 이들을 보는 경외감.

잃어버릴 것도 없는 청춘과 잃어버린 것이 많은 노년의 대조. 

지금이라도 변할 수 있다는 것은.. 희망. 

그러나 남편의 불륜 따위 용서할 걸, 하는 결론은 내리지 않겠다. 

 

<박쥐>

유부남 고스케는 내연녀 요코를 만나러 가는 길에 고등학교 동창이었던 란도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고스케는 십 수년 전, 

폭력사건을 저지르곤 했던 불량학생 란도가 뜬금없이 여자를 만나러 가는 길에 함께 하자고 해 먼 길을 동행했던 적이 있다.

"그걸" 하고 오겠다는 란도를 기다리던 고스케는 하늘 위의 엄청난 박쥐 떼를 보고, 

소름이 끼쳐 집으로 돌아가버렸고, 얼마 안가 란도는 자퇴인지 퇴학인지를 했고 그 후로 소식을 들은 적도 없었다.

요코가 정원을 돌아보고 오길 기다리던 고스케. 

"나는 오랫동안 그 낙엽이 검게 뒤섞이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늦가을 저물녘에 흩날리는 낙엽은 십몇 년 전의 박쥐 바로 그것이었다. 

 아주 고요해져 있던 내 몸 안에서 크레인 소리가 울리고 어지럽게, 그리고 나긋나긋하게 서로 뒤엉키듯이 박쥐들이 뿜어져 나왔다."


인간은 반성할 줄 알아서 그나마 봐줄 만 하다.

자기성찰 할 줄 알아야 더 봐줄 만 하고.

요코에게 "아직, 나하고 헤어질 수는 없겠지?" 하고 묻는 꼬라지에서 욱할 뻔. 누가 누굴 천박하대. 솔직하면 위선적이라도 않지.


<침대차>

영업직 '나'는 내일 아침 큰 거래를 마무리 짓기 위해 밤 열차 침대칸을 탔다.

'나'도, 영업부의 상사도, 고대하던 큰 거래를 성사키셔도 성취감과 동시에 허망함을 맛본다. 


옆 침대 노인의 숨죽인 울음소리를 듣고, 이십몇 년 전 초등학교 동창을 떠올린다.

가쓰노리는 강에 빠져 실신 상태에 빠졌다가 살아났다. 발버둥쳤다면 그대로 물 속에 잠겨 죽을 수도 있었지만,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그는 자신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그로부터 십몇 년 후, 가쓰노리는 달리는 기차에서 떨어져 사망한다. 

가쓰노리의 할아버지는 "그때(강에 빠졌을 때) 죽었더라면 좋았을지도 모르지." 라고 말한다.


"그때 도사보리 강에 둥실둥실 떠서 기적적으로 목숨을 구한 가쓰노리에게, 그 후 주오혼센 열차에 탔을 때까지의 그 십몇 년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하고 나는 멍하니 생각하고 있었다."


그 십몇 년은 보너스 같은 것이었을까. 있어도 없어도 괜찮은.  

어쩌면, 가쓰노리의 죽음은 의도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환상의 빛을 본 후, 다시 보고만 싶어서.


어쩌면 살아있는 모두에게, 살아가는 이 세상은 언제까지나, 상실의 시대가 아닐까. 

누군지 몰라도 (번역서) 제목 한 번 잘 지었다. 상실의 시대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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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거짓말쟁이
E. 록하트 지음, 하윤숙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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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재미 십점 만점에 십점.

몰입도 또한 매우 강렬했다.

읽는 재미만 좋았던 것도 아니다. 

훌륭했다. 


부유한 백인 상류층 싱클레어 가(家).

여름이면 할아버지 소유의 섬에 모인다. 

할아버지 해리스 싱클레어의 세 딸 캐리, 베스, 페니. 그 딸들로부터 나온 7명의 손주들.

그 중 캐디, 조니, 미렌, 그리고 캐리의 의붓조카 갯은 매년 여름 함께 어울린다. 친구처럼, 어린 연인처럼. 

아이들과 달리, 재산 때문에 어른들의 분쟁은 끊이지 않는다. 

아직 그들의 세계로 편입되지 않은 케이든스, 조니, 미렌, 갯은 혼란을 느낀다.

열다섯의 여름, 캐디는 사고를 겪게 되고 그 후 기억에 문제가 생긴다. 

결국 찾게 되는 기억. 알게 되는 진실. 


마지막장을 넘기자마자 다시 앞으로 돌아갔다.

반전 그 자체로 놀랍다기보다, 소설로서 주는 즐거움이 매우 커서 다시 빨려들어가고 싶었다. 진실을 아는 상태로 다시.  

중간중간 삽입된 동화도 재미를 더한다. 

캐릭터도, 단순하지도 복잡하지도 않은 심리묘사도 명확하고 절묘했다.


인간의 탐욕, 뿌리깊은 편견과 차별, 정화에 관하여.

무엇보다, 모든 일이 벌어진 뒤의 아이들의 성숙한 태도가 근사하다.  

이 책의 성격상, 더 이야기하는 것은 감동받은 책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 같은 기분. 

한 대목만 발췌하고 마무리 하련다. 


더이상 싱클레어 가문의 일원이 되기 위해 노력할 수 없다며 떠나가는 아빠를 바라보던 케이든스의 아픔묘사. 

"이윽고 아빠가 권총을 꺼내 내 가슴을 쐈다. 나는 잔디밭에 서 있다가 쓰러졌다. 총알구멍이 크게 벌어졌고, 내 심장이 갈비뼈 밖으로 튀어나와 화단으로 떨어졌다. 벌어진 상처 사이로 피가 리듬을 타며 솟구쳤고,

내 눈에서도,

내 귀에서도,

내 입에서도 피가 났다.

소금처럼 짭짤한 맛이었다. 실패의 맛이라고 느꼈다. 사랑받지 못했다는 선연한 붉은 수치심이 우리 집 앞의 풀밭 속으로, 바닥 벽돌과 현관 계단으로 스며들었다. 내 심장은 모란꽃 사이에서 송어처럼 파닥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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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시간의 재발견 - 노력은 왜 우리를 배신하는가
안데르스 에릭슨.로버트 풀 지음, 강혜정 옮김 / 비즈니스북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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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시간의 법칙은 많은 사람에게 익숙할 것 같다. 

노력하는 자에게 반드시 결실 있나니, 뭐 이런 거.  

저자는 꼭 그렇지 않다는 것에 주목한다. 

부제 "노력은 왜 우리를 배신하는가".


결론적으로, 무조건적인 시간 투자가 반드시 좋은 결실을 보장하진 않는다는 것.

'올바른' 방법이 중요하다는 것이 핵심이다.


타고난 능력보다 노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기존에 알려진 1만 시간의 법칙과 동일하다.  

'타고나는' 것의 대표격으로 알려진 절대음감도 적절한 환경과 훈련이 수반되면 거의 모든 사람이 발전시킬 수 있다고.

"절대음감 자체가 타고난 재능이 아니라 '절대음감을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이 타고난 재능이다. 그리고 거의 모든 사람이 이런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말해도 무리가 없다."

우리의 뇌는 매우 적응력이 뛰어나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심지어 성인의 뇌도. 


저자는 '올바른 연습'이 있어야만 좋은 결실이 가능하다는 것을 주장한다.

어느 분야에서나 통하는 보편적 방법을 '의식적인 연습deliberate practice'이라 명명하고, 왜, 어떻게 효과적인지 설명한다.

'목적의식 있는 연습' 또한 중요하며, 이는 최종 목표인 '의식적인 연습'으로 가는 중간단계라고 한다. 

목적의식 있는 연습은, 명확하고 구체적 목표, 집중력, 피드백, 자신의 컴포트존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한다. 

물론 목적의식 있는 연습이 쉬운 것은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동기부여 또한 중요하다고. 


"어떤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되면 계속하라. 효과적이지 않으면 멈춰라. 분야 최고 실력자를 모방하는 방향으로 훈련을 잘 조절할수록, 훈련이 효과적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마지막으로 여건이 허락한다면 언제나 좋은 코치나 교사와 함께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저자는 발전하기 위해서 버려야 할 잘못된 통념 세가지도 제시한다.

하나. 인간의 능력이 유전적으로 규정된 특성에 의해 제한된다는 것. '난 못해'와 같은 생각을 버려라.

둘. 어떤 것을 열심히 하면 반드시 나아질 것이라는 생각. 같은 일을 같은 방법으로 반복하는 것은 정체와 점진적 쇠퇴로 가는 길일 뿐.

셋. 노력만 있으면 실력이 향상된다는 생각. 올바른 접근이 없다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의식적인 연습이 선행되지 않으면 발생할 수 있는 사례는 의미심장하다.

2005년 하버드 의학 대학원 연구진이 시행한 60건의 조사에 의하면, 거의 모든 의사들의 수행능력은 시간이 흐를수록 나빠지거나 정체되었다고. 적절한 의료 서비스 제공이라는 측면에서 나이와 경험이 많은 의사가 그렇지 못한 의사보다 못한 평가를 받았다는 것. 


길었지만 (내가 파악한) 핵심은 아래와 같다.  

"연습을 하는데 발전이 없다면 타고난 재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올바른 방법으로 연습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절대적인 시간은 필요하다"


결국은 (올바른)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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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 - 유쾌한 페미니스트의 경제학 뒤집어 보기
카트리네 마르살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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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부터 신선하고, 도발적이다.

부제는 <유쾌한 페미니스트의 경제학 뒤집어보기>. 

그 역할은 톡톡히 했다.

경제학도, 페미니즘도 잘 모르는 내겐, 다른 쪽을 들여다보게 하는 고마운 디딤돌. 


저자는 "오늘날 경제과학은 서구 사회를 주도하는 종교"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곳에 세상의 절반인 여성이 없다면, 이 어찌 큰 문제가 아니겠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말, "페미니즘은 늘 경제학의 문제였다."

"페미니즘은 지금도 돈의 문제다."


애덤 스미스의 경제학은 세상을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며, 예측이 가능하다고 바라보았다. 

그 유명한 '보이지 않는 손'. 애덤 스미스는 푸줏간 주인과 빵집 주인의 친절로 저녁 식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욕구가 교환을 통해 충족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작가의 발랄한 문제제기는 여기서 시작된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그렇다면 스테이크를 실제로 구운 것은 누구였을까?"


애덤 스미스가 푸줏간 주인, 빵집 주인, 양조장 주인에 주목할 때, 그들의 부인, 어머니, 혹은 누이들이 아이들을 돌보고 청소하고 요리하고 빨래하고 소 젖을 짜고 옷을 만들고 다림질 하던 일은 전혀 고려대상이 되지 않았다.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쓸 수 있도록 돌보는 일" 또한. 위의 모든 활동은 주류 경제학 모델의 '생산활동'에 열외되었다고. 

"보이지 않는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보이지 않는 성이 있다."


""1960년대 들어 여성들이 일하기 시작했다." 보통 이렇게들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여성들은 1960년대 혹은 2차 대전때부터 '일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다. 여성들은 항상 일을 하고 있었다."

"경제학자들은 남성이 자기 가사 도우미와 결혼하면 그 나라의 GDP가 감소하고, 자기 어머니를 양로원에 보내면 GDP가 상승한다고 농담을 하곤 한다." 

같은 일이 GDP에 포함되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사실을 짚는데 쓰인 문장이다. 어찌나 씁쓸한지.

세상을 정의하는 것은 남성, 남성이 하는 일은 의미있는 일로 간주되고, 여성의 일은 '그 외의 일'로서 간주되었다. 


남성이  '경제적 인간'의 역할을 맡는 동안, 여성에게는 사랑을 지키는 역할이 주어지고, 그것으로 인해 여성은 소외되었다.

나아가 경제학자들은 차별을 합리화하기 시작했다. 여성의 보수가 적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추정했다. 

게리 베커의 이론에 의하면, 여성은 양육과 집안일을 하기에 피곤하고, 그래서 직장에서 남성과 동일한 노력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더 낮은 보수를 주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다른 설명도 있다. 보수가 낮기 때문에 집안일을 더 많이 한다고. 그것이 합리적이므로.

"다시 말해, 여성의 보수가 낮은 것은 집안 일을 더 많이 해서고, 여성이 집안일을 더 많이 하는 것은 보수가 낮기 때문이다."


저자는 세상에 유일한 진리는 경제학 만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시장이 항상 옳을 것처럼 가정했던 경제학은 몇번의 대참사(대공황, 리먼브더러스 사태 등)로서 그 결함을 증명했다. 

또한, 인간이 항상 '경제적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결정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에 지배되는 면이 많다. 

"1930년대에 이미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감정과 충동, 광적인 오해가 경제를 추진시키기도, 또한 무너뜨리기도 한다고 언급"했고,

그 자신도 경제학자인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가 "신이 경제학자들을 만든 이유는 점성술사들이 더 높은 명성을 갖게 하기 위해서라고 꼬집었다"니, 말 다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경제과학은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경쟁을 인간의 핵심으로 바라보는 신자유주의는 빈부 격차를 더욱 심화시켰고, 부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집중되었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마저 근본적으로 바꿔버렸다.

"신은 모든 이와 함께 한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가장 돈이 많고 가장 큰 군대를 가진 사람들을 선택한다"고 말한 프랑스의 극작가 장 아누이의 말엔 웃을 수 없다. 부자들을 더욱 부자로 만들면 모두에게 이득이라는 논리는, 틀렸다.


"사람들이 항상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지는 않으며, 정의를 중요시하고, 선호도가 시간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을 증명한 행동경제학은 커다란 진보이긴 하나, "경제적 인간은 여전히 행동주의 경제학의 시발점"이므로 한계가 있다. 

또한, "사회 전반에 대한 시각이나 사람들간의 관계가 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관찰은 행동경제학의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경제학자들은 물질의 희소성 때문에 세상의 악, 고통, 심지어 죽음마저 발생한다 말했으나,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았다.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인간 사회는 경제 성장만으로는 더 행복해지기 힘들다."

사람은 외로워서 죽을 수 있고, 물질적 필요가 충족된다 하더라도 신생아는 안아주고 만져주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또한, 부자들도 도둑질을 한다는 것.

 

'경제적 인간'의 허상을 맹렬히 설파하던 책은, 후반부로 갈수록 더욱 명료하게 페미니즘을 말한다. 

여성이 "남성만큼 가치가 있다"거나, "남성을 보완한다"거나, "남성과 다를 바 없다"는 모든 논리는, 모두 여성성을 남성성의 한 종류로 묘사한다. 여성이 남성과 비슷하든 대조되든, 여성은 늘 남성과의 관계안에서 존재한다. 

"여성이 '남성과 다름없기' 때문에 가치있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조건부 평등이라는 의미다."

"여성은 남성과 다름없다고 증명하거나 남성을 보완할 수 있다고 증명해야 한다. 절대 여성이 중심이 되지 않는다. 한 가지 성별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학창시절 사회 수업 중 경제 주제가 나오면 막연히 솟아오르던 공포가 새삼 기억났다. 사회는 무서운 곳이며, 모두가 경쟁하므로, 너는 더 욕망하지 않으면, 더 그악스러워지지 않으면, 더욱 부지런하지 않으면 굶어죽고 말것이야. 공상 따윈 집어치워!

사회를 오직 경제학의 논리로서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한지 알려준 매우 고마운 책이다. 또한 그 경제학에서 여성이 얼마나 소외되어 있었는지를 알게 해준 반가운 책이기도 하다.


"사실 여성 해방은 다양한 형태의 자유가 널리 허용된다는 것을 뜻해야 했다. 여기에는 그냥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있는 자유도 포함된다."

그렇다.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이란 그런 것이었다. 

일차적으로 여성 해방을 말하고 있긴 하나, 궁극적으로 남녀 공히, 모두의 해방.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열자는 운동. 


"우리가 경제 이론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 사회를 주도하는 공식적인 세계관에 대한 이야기가 되었다.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이야기, 즉 우리가 누구이고, 우리가 왜 존재하며, 우리가 왜 일을 하는지를 밝히는 이야기 말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경제적 인간이다. 그리고 그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가 여성이 아니라는 점이다."

"여성들의 무보수 노동이 경제 모델에 포함되지 않으면, 우리는 그들의 보이지 않는 노동이 어떻게 빈곤과 성 불평등으로 이어지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애덤 스미스가 어머니를 필요로 하는가, 어머니가 애덤 스미스를 필요로 하는가?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의존한 채 살아가고, 따라서 사회는 생산하는 사람과 소비하는 사람을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 진실이다.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
"경제학은 우리가 두려움과 탐욕을 극복하도록 도와야 한다. 이 감정들을 악용해서는 안 된다."
"경제학은 관계를 모든 것의 근본으로 봐야 한다."
"경제학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려는 욕구와 이타심을 정반대의 개념으로 봐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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