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 - 유쾌한 페미니스트의 경제학 뒤집어 보기
카트리네 마르살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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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부터 신선하고, 도발적이다.

부제는 <유쾌한 페미니스트의 경제학 뒤집어보기>. 

그 역할은 톡톡히 했다.

경제학도, 페미니즘도 잘 모르는 내겐, 다른 쪽을 들여다보게 하는 고마운 디딤돌. 


저자는 "오늘날 경제과학은 서구 사회를 주도하는 종교"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곳에 세상의 절반인 여성이 없다면, 이 어찌 큰 문제가 아니겠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말, "페미니즘은 늘 경제학의 문제였다."

"페미니즘은 지금도 돈의 문제다."


애덤 스미스의 경제학은 세상을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며, 예측이 가능하다고 바라보았다. 

그 유명한 '보이지 않는 손'. 애덤 스미스는 푸줏간 주인과 빵집 주인의 친절로 저녁 식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욕구가 교환을 통해 충족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작가의 발랄한 문제제기는 여기서 시작된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그렇다면 스테이크를 실제로 구운 것은 누구였을까?"


애덤 스미스가 푸줏간 주인, 빵집 주인, 양조장 주인에 주목할 때, 그들의 부인, 어머니, 혹은 누이들이 아이들을 돌보고 청소하고 요리하고 빨래하고 소 젖을 짜고 옷을 만들고 다림질 하던 일은 전혀 고려대상이 되지 않았다.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쓸 수 있도록 돌보는 일" 또한. 위의 모든 활동은 주류 경제학 모델의 '생산활동'에 열외되었다고. 

"보이지 않는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보이지 않는 성이 있다."


""1960년대 들어 여성들이 일하기 시작했다." 보통 이렇게들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여성들은 1960년대 혹은 2차 대전때부터 '일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다. 여성들은 항상 일을 하고 있었다."

"경제학자들은 남성이 자기 가사 도우미와 결혼하면 그 나라의 GDP가 감소하고, 자기 어머니를 양로원에 보내면 GDP가 상승한다고 농담을 하곤 한다." 

같은 일이 GDP에 포함되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사실을 짚는데 쓰인 문장이다. 어찌나 씁쓸한지.

세상을 정의하는 것은 남성, 남성이 하는 일은 의미있는 일로 간주되고, 여성의 일은 '그 외의 일'로서 간주되었다. 


남성이  '경제적 인간'의 역할을 맡는 동안, 여성에게는 사랑을 지키는 역할이 주어지고, 그것으로 인해 여성은 소외되었다.

나아가 경제학자들은 차별을 합리화하기 시작했다. 여성의 보수가 적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추정했다. 

게리 베커의 이론에 의하면, 여성은 양육과 집안일을 하기에 피곤하고, 그래서 직장에서 남성과 동일한 노력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더 낮은 보수를 주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다른 설명도 있다. 보수가 낮기 때문에 집안일을 더 많이 한다고. 그것이 합리적이므로.

"다시 말해, 여성의 보수가 낮은 것은 집안 일을 더 많이 해서고, 여성이 집안일을 더 많이 하는 것은 보수가 낮기 때문이다."


저자는 세상에 유일한 진리는 경제학 만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시장이 항상 옳을 것처럼 가정했던 경제학은 몇번의 대참사(대공황, 리먼브더러스 사태 등)로서 그 결함을 증명했다. 

또한, 인간이 항상 '경제적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결정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에 지배되는 면이 많다. 

"1930년대에 이미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감정과 충동, 광적인 오해가 경제를 추진시키기도, 또한 무너뜨리기도 한다고 언급"했고,

그 자신도 경제학자인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가 "신이 경제학자들을 만든 이유는 점성술사들이 더 높은 명성을 갖게 하기 위해서라고 꼬집었다"니, 말 다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경제과학은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경쟁을 인간의 핵심으로 바라보는 신자유주의는 빈부 격차를 더욱 심화시켰고, 부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집중되었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마저 근본적으로 바꿔버렸다.

"신은 모든 이와 함께 한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가장 돈이 많고 가장 큰 군대를 가진 사람들을 선택한다"고 말한 프랑스의 극작가 장 아누이의 말엔 웃을 수 없다. 부자들을 더욱 부자로 만들면 모두에게 이득이라는 논리는, 틀렸다.


"사람들이 항상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지는 않으며, 정의를 중요시하고, 선호도가 시간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을 증명한 행동경제학은 커다란 진보이긴 하나, "경제적 인간은 여전히 행동주의 경제학의 시발점"이므로 한계가 있다. 

또한, "사회 전반에 대한 시각이나 사람들간의 관계가 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관찰은 행동경제학의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경제학자들은 물질의 희소성 때문에 세상의 악, 고통, 심지어 죽음마저 발생한다 말했으나,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았다.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인간 사회는 경제 성장만으로는 더 행복해지기 힘들다."

사람은 외로워서 죽을 수 있고, 물질적 필요가 충족된다 하더라도 신생아는 안아주고 만져주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또한, 부자들도 도둑질을 한다는 것.

 

'경제적 인간'의 허상을 맹렬히 설파하던 책은, 후반부로 갈수록 더욱 명료하게 페미니즘을 말한다. 

여성이 "남성만큼 가치가 있다"거나, "남성을 보완한다"거나, "남성과 다를 바 없다"는 모든 논리는, 모두 여성성을 남성성의 한 종류로 묘사한다. 여성이 남성과 비슷하든 대조되든, 여성은 늘 남성과의 관계안에서 존재한다. 

"여성이 '남성과 다름없기' 때문에 가치있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조건부 평등이라는 의미다."

"여성은 남성과 다름없다고 증명하거나 남성을 보완할 수 있다고 증명해야 한다. 절대 여성이 중심이 되지 않는다. 한 가지 성별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학창시절 사회 수업 중 경제 주제가 나오면 막연히 솟아오르던 공포가 새삼 기억났다. 사회는 무서운 곳이며, 모두가 경쟁하므로, 너는 더 욕망하지 않으면, 더 그악스러워지지 않으면, 더욱 부지런하지 않으면 굶어죽고 말것이야. 공상 따윈 집어치워!

사회를 오직 경제학의 논리로서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한지 알려준 매우 고마운 책이다. 또한 그 경제학에서 여성이 얼마나 소외되어 있었는지를 알게 해준 반가운 책이기도 하다.


"사실 여성 해방은 다양한 형태의 자유가 널리 허용된다는 것을 뜻해야 했다. 여기에는 그냥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있는 자유도 포함된다."

그렇다.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이란 그런 것이었다. 

일차적으로 여성 해방을 말하고 있긴 하나, 궁극적으로 남녀 공히, 모두의 해방.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열자는 운동. 


"우리가 경제 이론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 사회를 주도하는 공식적인 세계관에 대한 이야기가 되었다.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이야기, 즉 우리가 누구이고, 우리가 왜 존재하며, 우리가 왜 일을 하는지를 밝히는 이야기 말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경제적 인간이다. 그리고 그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가 여성이 아니라는 점이다."

"여성들의 무보수 노동이 경제 모델에 포함되지 않으면, 우리는 그들의 보이지 않는 노동이 어떻게 빈곤과 성 불평등으로 이어지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애덤 스미스가 어머니를 필요로 하는가, 어머니가 애덤 스미스를 필요로 하는가?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의존한 채 살아가고, 따라서 사회는 생산하는 사람과 소비하는 사람을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 진실이다.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
"경제학은 우리가 두려움과 탐욕을 극복하도록 도와야 한다. 이 감정들을 악용해서는 안 된다."
"경제학은 관계를 모든 것의 근본으로 봐야 한다."
"경제학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려는 욕구와 이타심을 정반대의 개념으로 봐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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