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바닥
조 R. 랜스데일 지음, 박미영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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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제는 노인이 되어 요양원에 있는 해리가 약 70년전, 1933-34년 사이에 벌어졌던 일을 회상하는 내용이다.

그를 통해 듣는 그 시절은 야만의 시대라고 밖에 볼 수 없다.


흑인은 죽여도 법에 저촉되지 않던 시절, 

단지 흑인 여자와 결혼했다는 이유로 백인 남자도 벌거벗겨지고 린치를 당하던 시절.

"현재 흑인들에게 있어 유일한 차이점은 주인 맘대로 팔아버릴 수 없다는 것뿐이다."

의사라는 작자가 말하기를, "흑인과 백인은 따로 분리해야 해. 성경에도 그렇게 나온다고.", 

"흑인 여자들을 도대체 어찌 구분하나." 당당히 떠드는 시대. 

"그는 흑인과 백인은 진정으로 근본에서부터 다르고, 그게 누구에게나 명백한 사실이라 확신했다."

흑인은 백인이라면 어린아이에게도 -도련님으로 번역되든, 미서로 번역되든- 존칭을 써야 하고,

흑인 아이조차 "깜둥이 총"(새총)이란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그것이 폭력이라는 의식조차 아직 없던 시대. 

개와 노새도 시종일관 이름으로 불리는데, 흑인에겐 그 정도 존중도 없던 폭력의 시대.


어느 날, 해리는 흑인 여자의 시체를 발견하게 되고, 연이어 몇 구의 시체가 마을에서 발견된다. 

처음 흑인 여성의 시체가 발견될 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으나, 

살인이 계속되니 백인 여자가 죽을 수도 있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이 사건에 주목하게 된다.

죄없는 흑인 모즈가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늙은 깜둥이를 목매달고는, 지들 잘난 줄 아는 백인 쓰레기들"에 의해 살해당한다.

지역 경관인 아버지는 이에 죄책감과 스스로의 한계를 느끼기도 한다. 그 안의 내재된 차별도 고백하며. 


결국 연쇄살인범은 잡히지만, 그 사건과 연관된 몇몇 죽음들은 깔끔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추정만이 가능할 뿐. 

"확실히 알아낼 방도는 없다. 인생은 그런 것이다. 할머니가 읽던 추리소설과는 다르다. 모든 게 딱 맞아떨어지진 않는다."


잘 모르고 KKK단에 들어갔다가 그들의 만행을 보고 빠져나온 유태인의 이야기도 인상깊다. 

자신이 유태인인 걸 들켰다면 자신 역시 당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한명이라도 악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온 건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인간은 꼭 나를 대입해야만 깨달을 수 있는가 생각해보게 된다.

공감능력을 믿어본다. 당하지 않았어도, 당할 가망성이 없어도, 그래도 알 수는 없을까. 부디, 있을 것이라고.


책은 <앵무새 죽이기>를 떠올리게 했다. 성장소설과 인종차별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만의 압권은 장르 소설로서의 몰입도였다. 마지막 장까지 넘치는 긴박감. 


대체로 어린 시절이 이야기되고 있고, 드물게 화자의 현재가 드러난다.

"사람이 이렇게 오래 살아야 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삶을 살 수 없다면, 그저 생명을 소진하며 산소를 빨아들이고 똥을 싸는 것일 뿐이다. 

 어쩌면 중요한 것은 나이가 아니라 건강일지도 모르겠다. 건강하게 오래 산다면 문제될 것 없다. 하지만 건강 없이 오래 산다면, 생지옥이다. 

 이제는 과거만 중요하게 여겨질 뿐이다. 그것만 살아있는 듯 느껴진다. 그것만이 내 영혼을 지탱할 수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소 비관적이었다.

그 야만의 세월을 보낸 사람이, 시체를 직접 목도하고, 심지어 피해 당사자가 될 뻔 했던 사람이 마냥 낙천적이어도 어색하기 그지 없겠지만, 나는 낙천성을 바랐나.

그의 비관 역시 서늘한 책의 분위기에 일조했다. 한여름에 읽기 좋은 책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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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함무라비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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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판사가 쓴 소설이라.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수위 적당히 조절된 가벼운 법 이야기겠거니, 하며.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몇 번을 왈칵하고, 눈물 콧물을 쏟아가며 읽었다. 

공명정대한 시선이, 게다가 온기가 느껴지는 시선이 매우 좋았다. 


법원. 

누군가에게는 평생 단 한 번도 갈 일 없는 곳이고, 누군가에겐 울며 불며 사정하고 싶은 곳이고, 누군가에겐 악몽, 누군가에겐 영화 속 멋지거나 악랄한 캐릭터들이 드나드는 상상의 공간이다.  

또 누군가에겐, 그냥 "회사"다. "우리 회사"라는 표현이 인상 깊었다.

그러나 냉담하기는커녕, 이 "회사" 이야기는 뜨거웠다.


왈칵 #1.

병원에서 아들을 잃은 억울한 사연을 지닌 할머니, 법원 앞에서 몇날며칠 시위를 하고 있다. 

'내 아들을 살려내라!' 할머니 옆에 젊은 여자가 털썩 주저 앉아 훌쩍이고 있다. 할머니는 신들린 듯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고, 옆에서 끄윽끄윽 소리를 내며 우는 젊은 여자의 얼굴은 눈물 콧물 범벅이다. 박 판사다.

누군가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만으로도, 공감한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워질 수 있을까.

그 간단한 그것이 얼마나 어렵던가. 

그런가하면, 박 판사가 그 공감력 때문에 사건 기록들이 모두 말을 걸어온다며 고통스러워 하는 장면 또한 놀라웠다. 

억울하고 한맺힌 일들을 처리하는 것이 업인데, 그 일 모두에 내 일처럼 감정이입이 되어 버린다면, 그건 또 얼마나 잔인할까. 

사람들은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을 가진 판결을 원할까, 

투입과 산출, 논점과 관련없는 이야기는 고려하지 않는, 기계와 같은 판결을 원할까. 


#2. 식당 종업원의 실수로 불판이 떨어진 사건. 숨은 이야기.


#3. 재산분쟁으로 법원까지 온 한 가족. 막내아들과 늙은 아버지의 눈물을 어찌 메마른 눈으로 볼 수 있으리.


시종일관 특권의식도, 자기비하도 없는 공명정대함이 좋았다.

아, 이런 시각 정말 좋다. 

정의로운 사람만 등장하는 건 아니었다. 부정을 눈감으라고 하는 수석부장의 말은 "달콤한 솜사탕처럼" 나긋나긋했다.

그러나 딱 잘라 말할 수 있는 악인도, 선인도 없었다. 세상은 그런 거 아니겠나.

언뜻 느껴지는 판사라는 직업의 애환, 고민도 좋았다. 

언젠가 조사에서 법원과 검찰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가 10점 만점에 3점대였다고, 반면 처음 보는 낯선 행인에 대한 신뢰도는 4점이었다는 말을 할 때는 판사로서의 회의가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 권력을 작다 말하지 않는다.

"법정에서 가장 강한 자는 어느 누구도 아니고, 바로 판사야. 바로 우리지. 그리고 가장 위험한 자도 우리고. 그걸 잊으면 안돼."


폭행이든, 희롱이든, 성 관련 사건들이 품고 있는 함의에 대한 이야기도 명쾌했다.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결국, 책은 사회적 책임에 대한 것으로 시각을 돌리고 있다. 

가난을 목도한 임 판사는 생각한다.

"원인에 있어서 자유로운 행위라. 그런데 무엇이 '원인'이지? 무엇이 '행위'고? 그리고 '자유'란 놈은 또 뭐고. 자유의지를 전제로 인간에게 책임을 묻는 판사의 일이란 실은 다 허깨비 짓 같은 것은 아닐까."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지기 때문에 존엄한 것이다. 최소한 그것이 인간 사회의 약속이다. 그런데, 나약한 인간을 수렁 속에 방치하는 사회는 어떤 책임을 지는 걸까."

덧붙은 챕터의 제목 "나쁘고 추한 사람은 없다. 나쁘고 추한 상황이 있을 뿐"이라는 말은 그 사회의식을 담았다.

작가로부터 전해지는 온기.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책 읽는 내 마음을 데웠다.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겠지만 사람들의 눈에 띄는 것은 언론에 나오는 거창한 사건들, 튀는 일들뿐이다. 하지만 어느 분야든 대다수의 일하는 이들은 화려하지 않고 튀지도 않는 일들을 묵묵히 반복하고 있다. 그러기에 세상은 호들갑스러운 탄식과 성급한 절망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묵묵히 굴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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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베카
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 이상원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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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938년에 출간된 소설.

1907년생 대프니 듀 모리에, 그녀의 머릿 속엔 무엇이 있었을지 궁금해진다. 


일찍이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가난하고 어린 '나'는, 한 부인의 '동반자'라는 이름으로 시종에 가까운 노릇을 하며 생활한다.

어느 날 우연히 맨덜리라는 대저택의 주인 맥심을 만나 사랑하게 되고, 그와 결혼하고, 맨덜리로 간다.

아름다운 맨덜리를 사랑하기도 전에, 맨덜리의 모든 것은 맥심의 죽은 전 부인 레베카에게 장악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나'에게 호의적인 프랭크조차 "제 평생 본 중에 가장 아름다운 분"이었다고 일컫는 레베카. 

'나'는 죽은 레베카에게 휘둘리기 시작한다. 꿈조차 한번도 보지도 못한 그녀에게 지배당한다. 

사람도, 사물도, 모든 것은 '나'에게 레베카를 상기시킨다.

레베카는 어떤 여인이었을까. '나'는 이 상황을, 누군가의 대타와 같은 자리를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 

받아들일 것인가, 개척할 것인가. 

어느 날 레베카의 (또 다른) 시신이 발견되고, 그녀의 죽음에 얽힌 진실이 밝혀진다. 


맥심을 만나 결혼하는 장면까진 평범한 로맨스 소설이었다.  가난하고 어린 소녀, 부유하고 나이든 남자를 만나 결혼.  

그런데 시종일관 따라 다니는 섬뜩한 기분은 뭘까.

책날개를 참고하면 대프니 듀 모리에는 '서스펜스의 여왕'이라 불린단다. 그 말 완전 실감. 


오로지 '나'의 관점에서 씌어져 있음에도, 책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것은 이미 죽어 존재하지 않는 여인, 레베카다. 

결국 이 게임의 승자는 누구일까.

맥심은 레베카가 모든 것을 다 내다보았고, 조종했으며, 그래서 마지막까지 웃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결국 그녀의 승리라고. 

맥심 부부는 끝내 두려움에 떨며 산다. 

"두려움, 근거 없는 공포를 가라앉히려 안간힘을 쓰면서 느끼는 (이제는 다행히도 진정되었지만) 내밀한 불안감 같은 것이 어느 새 삶의 동반자가 되었다."


맥심의 입을 통해서라면 교활함의 상징으로 보이는 레베카, 그녀는 악인이었을까. 

"세상 누구도 날 막을 수는 없어"라고 당당히 말하던 그녀. 

모두들 사랑에 빠지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들던 매력 넘치는 그녀.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던, 그 어떤 남자보다 뛰어나 그들을 경멸했던 레베카. 투쟁하듯 살았던 그녀. 

"남자들을 상대하는 게 그분께는 게임에 불과했어요." "우스운 일이라고요." "집에 돌아오면 침대 위에 앉아 남자들을 비웃곤 하셨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당찬 레베카, 그녀가 무서워한 것은 오직 한가지다. 늙고 병들어 죽는다는 것. 

"죽을 때는 빨리 가고 싶어. 촛불이 꺼지듯 순간적으로"


그런 그녀에게, 세상은 아름다웠을까. 굳이 레베카의 이야기를 들어보지 않아도 보이는 것들.

맥심이 '나'에게 청혼할 때, 그는 토스트를 먹고 있다. 

"당신은 이제 반 호퍼 부인이 아니라 내 동반자가 되는 거요. 맡은 일은 거의 똑같다고 보면 되오. 서재의 새 책, 응접실의 꽃들, 저녁 식사 후의 카드놀이는 나 역시 좋아하니까. 내게 차를 따라줄 사람도 있으면 좋겠고. 한 가지 차이라면 난 택솔이 아니라 에노를 쓴다는 거요. 내가 좋아하는 치약이 떨어지지 않도록 신경 써줘요."

이 정도는 로맨틱하다고 쳐줘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시종 아가씨의 급격한 신분 상승이니까. 

그러나 레베카가 그 삶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나'는 생각한다. 

"이건 내가 재스퍼를 대할 때와 똑같잖아." 

재스퍼는 개다.

"지금 나는 재스퍼처럼 굴고 있어. 그는 생각날 때마다 나를 어루만지고 그럼 난 기분이 좋아지지. 그는 내가 재스퍼를 좋아하듯 나를 좋아하는 거야."

"말 잘 듣는 개라면 만족하고 엎드려 더 이상 귀찮게 굴지 말아야 할 것이었다. 나는 또다시 재스퍼가 되었다."


이런 상황을, 레베카가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레베카와 사랑했다고 믿는 협잡꾼 파벨의 말은 소름끼친다. 

"난 사회주의자 기질이 좀 있어. 어째서 남자들은 여자를 나눠 갖지 못하고 죽여버리는지 이해가 안 간단 말일세. 사실 그 두가지에는 차이도 없는데 말이야. 재미보는 거야 똑같지. 미녀는 자동차 타이어처럼 닳는 존재가 아니거든. 오히려 쓰면 쓸수록 더 좋아지지."


그런 삶 속에서, '나'는 남편과 함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남편이 집을 떠나면 무한한 자유를 느낀다. 

그의 기분이 괜찮은지, 지루한 것은 아닌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할 필요도 없는, 아무 것도 신경쓰지 않을 수 있는 자유.

"남편은 결국 아버지랑 그리 다를 것 없는 존재요. 세상에는 당신이 몰랐으면 싶은 종류의 일이 있소."


레베카의 장악력은 대단했다.

부정하고 타락한 여자인 동시에, 매혹적인,

그 열정으로 죽음을 파멸이자 불멸로 만든, 레베카.


1938년에 출간된 소설을 2017년에 읽는다는 것. 

시간은 그냥 흐르지 않았다. 

그 세월을 보내고도 당당히 위엄을 드러내는 소설은 또 다른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그때의 레베카는 악녀였을까. 시대를 잘못 타고난 불운아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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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멸 Italian Novel to Film 2
알베르토 모라비아 지음, 정란기 옮김 / 본북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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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소한 오해로 시작되어 자신의 꿈을 포기(할 뻔)한다는 점에서 영화 [라라랜드]도 떠올렸고,

뜨겁게 사랑하는, 그러나 역시 또 그놈의 오해 때문에 모든 것을 망쳐버린다는 데서 이언 매큐언의 <체실 비치에서>도 떠올렸다.

감정을 이렇게나 섬세하게 그려낼 수 있다는 점에서 슈테판 츠바이크의 <연민>도 떠올렸다. 

그러나, 경멸은 경멸이다.

<경멸>은, <경멸>이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극작가인 나(리카르도 몰티니)는 에밀리아와 결혼한 후, 아파트 대출금을 갚기 위해 원치 않는 영화 시나리오 작업을 하게 된다.

문학에 대한 야망을 잠시 접고 어쩔 수 없이 하는 임시직이라 생각했던 시나리오 일이 오히려 업이 되어가고,  '나'는 이런 처지를 비관한다. 

영화 제작자 바티스타는 에밀리아에 대한 관심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에밀리아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는 나를 경멸한다. 

나는 에밀리아의 사랑이 왜 식어가는지 알지 못한다.

다툼 이후 에밀리아는 떠나고, 그녀는 바티스타 옆에서 교통사고로 즉사한다.


에밀리아는 바티스타의 집요한 추근거림에 고통스러워하며 "혐오와 간청이 뒤섞인 힘없는 눈길"로 남편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러나 몰티니는 끝내 모른다. 그 구조 요청을 무시한다. 

몰티니는 에밀리아의 사랑이 변하는 걸 느끼면서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씁쓸한 것은, 독자인 내 모든 상황 판단은 몰티니의 관찰로부터 이뤄진다는 것이다.

보면 알 수 있는 것을, 그만은 모른다. 이쯤 되면, 모르고 싶은 것은 아닐까. 


그의 이성의 마비는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일부러라도 그의 변명을 만들어주고 싶은 심정이다. 

그는 -착각이었지만- 그녀를 위해 분에 넘치는 아파트를 장만하고, 남은 할부금을 갚을 생각에 불안에 휩싸였다. 

집이 생겨 기뻐하는 그녀를 보며, 그는 자신이 "집을 사준 사람"이기 때문에 사랑받는다고까지 느낀다.

그 오해는 곧 환멸의 시작이 된다. 

그는 돈의 출처나 금전상황을 묻지 않는 에밀리아에게 반감을 품기 시작한다.  

"내가 겪는 고충에 비해 지극히 평온하고 만족스러워하는 것은 그녀가 이기적이라는 증거였고, 무감각해져서 내가 겪는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녀에 대한 미움은 자기 연민으로 이어진다. 

"따분한 가정이라는 함정에 빠져버린 불쌍한 인간, 아내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자신을 속이고 돈 때문에 힘들어하면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불쌍한 젊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처지가 이렇게 된 것은 이상이나 취미가 같아서 나의 야망을 이해하는 여자와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단지 아름다웠을 뿐 배운 것 없는 단순한 타이피스트였다."


한심한 자기 연민을 듣다보면, 그의 편을 들어주기가 쉽지 않다.

그가 셀 수 없이 주장하는 오로지 '그녀를 위한 것'이었다는 말, 오직 그녀를 위해 희생했다는 말은 과연 진실이기만 할까. 

꿈꾸던 문학적 야망을 성취할 수 없을까봐 불안해 빠져나갈 구멍을 찾은 것은 아닐까. 

그 스스로 부를 탐하고, 그 부를 거머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바티스타의 흑심을 보면서도 눈 감아버린 것은 아닌가. 


몰티니와 에밀리아의 다툼은 현실적이어서 날카로웠다. 

집 때문에 자신을 사랑한다 말하냐는 그의 질문에 그녀는 모욕감을 느끼며, 자신에게 집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외친다. 

이까짓 집, 이라는 그녀의 말에, 그는 자신의 모든 희생과 노력이 짓밟히는 고통을 느낀다. 

그는 집이 그들의 결혼생활을 상징하며, 그 집을 위해 하고 싶은 대부분의 일을 그만두었고, 야망까지 포기했다고 스스로 믿고 있다.

이쯤되면, 그 집에 연연하고 있는 것, 집이 자신의 모든 것인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뜨겁게 사랑하던 부부는, 그 알량한 집 때문에, 상대가 그 집을 간절히 원한다는 착각 때문에 서로를 목조르고 있다. 

에밀리아는 말한다. 당신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이 집이 소중한 듯 말했다고.  모두가 억울하다.

 

그들의 사랑에 문제가 생겼음을 감지한 후, 그는 집요하게 그녀를 추궁한다. 나를 사랑하느냐고. 

그러나 본질엔 가까이 가지 않는다. 

에밀리아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를 찾는다. 심지어, 사랑하지 않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급기야, 그는 바티스타가 그녀에게 육체적으로 접근하는 장면을 두 눈으로 목격한다.

그 순간, 부부의 두 눈이 마주친다. 그러니까, 그녀 또한 그가 이 모든 광경을 보았을을 인지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이 일을 핑계 삼아 시나리오 일을 그만둘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스스로를 "교양있고 학식 있는 사람으로 예술 작업을 하는 극작가"라고 생각하는 그.

에밀리아를 "그녀의 학력이나 교양은 노동자들 수준이었다. 말하자면 그녀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그렇듯 기본적인 상식만 갖고 있었다"고 말하는 그. 

그의 고매한 지적 능력은, 지금 무얼 하고 있는가. 


더이상 들어주기 힘든 그의 말.

"내가 이렇게 된 건 당신 때문이란 걸 알아야 해. 당신 때문에, 당신이 나를 대하는 태도나 생각을 고치기 위해서라는 걸."


행동없는 생각. 오로지 생각. 그것이 당신의 알량한 지성인가.

"나의 지성은 나의 자존심이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근거다.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내가 생각해야 할 문제가 무엇이든, 지력을 총동원해서 용감하게 대결하는 것이 나의 의무였다. 하지만 그저 낙담할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나는 명백하고 분명한 태도를 취하기 위해 아내가 나를 경멸하는 그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당신의 잘나고 고결한 이성은 마비되었다. 


에밀리아는 말한다. 

"난 당신이 남자답지 못하다는 것밖에 몰라. 당신은 남자답게 굴지 못했어."

수컷 정도가 아니라, 동물의 본성조차 마비된 건 아닐까. 


행동하지 않는 지식인, 혹은 지성인,

뻔뻔하고 몰염치한 자본(바티스타). 

현대사회의 일면을 보는 듯한 기분도 들어 서글펐다. 

돈의 논리로 감성이, 동물로서의 본능마저 마비되어간다. 그것이 이성인가.

그들의 다툼은, 또한 언제 어디서나 벌어지는 일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안타까웠다. 

함께 행복하기 위한 일들이 주객이 전도되어, 그 일로 인해 불행을 어깨에 짊어지는 일로 변모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에밀리아가 죽은 뒤 몰티니, 그는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죽지도 않는다.

"죽으면 삶에서 얻지 못했던 순수성을 되찾을지 모른다" 운운하지만, 죽고 싶다는 건 생각일뿐이고, 자살은 행동 아니겠나.

그에게 행동은 어울리지 않는다. 

"살기 힘들다고 자살하면 안돼. 죽는다면 다 에밀리아 탓이야"라고 중얼거리는 꼴이라니.

끝내 남탓. 지성미 끝내주는 구랴!


그는 환각과도 같은 그녀의 환상을 만나기 시작한다.

유령같은, 그러나 너무나 현실적인.

너무나 사랑했으므로.

그 사랑은.. 공허했다. 


몰티니와 함께 일하게 된 영화감독 레인골드는 오디세이를 프로이트 이론으로 새롭게 해석해 들려주고,

그의 해석 속에서, 몰티니는 완전히 율리시스이다.

몰티니는 그 해석을 부정하고, 율리시스에 태도에 적대감을 드러낸다. 


책장을 덮자마자 느껴지는 것은 쓴맛이다. 

자본주의가, 사랑이, 자기합리화가 쓰다.

이렇게 잘 쓰여진 경멸이라니. 쓰다. 




"정리하자면, 우선 페넬로페는 율리시스가 구혼자들의 잘못된 행동을 방관하고 당당한 왕이자 남편의 태도를 보이지 않아 경멸하게 됐고, 다음은 아내의 이런 경멸이 율리시스가 트로이 전쟁에 출전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며, 세번째는 자기를 경멸하는 아내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율리시스가 귀환을 미룬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페넬로페의 존경과 사랑을 다시 얻기 위해 율리시스가 구혼자 모두를 학살한 거죠."
"사실 율리시스는 아내 곁으로 돌아가는 걸 두려워한 사나이였어요. 그의 잠재된 의식은 아내 곁으로 돌아가는 게 싫어서 앞길에 장애물이 생기길 바랐고, 또 그렇게 된 거죠. 율리시스의 모험정신은 조금이나마 고향에 늦게 돌아가고 싶은 그의 무의식적 욕망을 의미하는 데 지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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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붉게 피던 집
송시우 지음 / 시공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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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칸방에 온가족이 모여 살고, 아궁이에 연탄을 때 난방을 하던 시절. 

쉬는 날이면 안채와 별채, 문간방까지,

다닥다닥 한집에 세들어 살던 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앉아 음식을 나누며 하하호호 담소를 나누고, 

마당에선 빨간 고무다라이에서 아이들이 물장난하던  그 시절.

지나온 그 시절은 따뜻하고 훈훈한 추억이기만 할까.


주인공 수빈은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대중문화평론가 현수빈의 유년기행"이란 이름으로 칼럼을 쓰기 시작한다.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망했던 옆방 총각의 이야기를 보고 그녀를 찾아온 은퇴한 전직 경찰.

수빈은 그녀가 의도하지 않은 뜻밖의 이야기들과 마주하게 된다.


이야기를 구성하는 두가지 큰 비밀은 진작 예상할 수 있었지만, 이야기를 힘있게 끌고 나가는데는 아무런 부족함이 없었다. 

아니, 그건 오히려 이 책의 장점이 되었다.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막판에 맥락없이 던져주는 비밀 폭탄보다는, 

이렇게 정보를 노출시키면서도 조밀한 그물망들로 흥미가 빠져나갈 수 없게 하는 책이 더 좋다. 


끝까지 재미있게 볼 수 있었다.

이웃이자 가족같았던 사람들. 그 안의 애증, 분노, 사랑, 죄책감.. 그 복잡한 감정들.  

누군가에겐 추억. 누군가에겐 악몽. 


아주 가끔 문장이 어색하다 싶을 때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흠 잡을 데 없이 좋았다.

촘촘한 구성, 등장인물 각각이 품은 저마다의 이야기. 

등골이 서늘하면서도 몰입하며 끝까지 헤어나올 수 없는 매력.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는 책이다. 

저만의 비밀을 품고 있는 사람들, 선하기도 악하기도 한 사람들. 인간이란 원래 그런 존재 아니던가. 


우리의 언어, 우리의 문학이 있다는 것이 참 좋다. 

검증된 해외 유수의 작품들도 물론 좋지만, 소설의 배경을 내 기억과 함께 떠올리며 볼 수 있다는 것도 한국문학의 뺄 수 없는 즐거움.

뜬금없는 내 어린시절의 기억까지 소환하며, 묘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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