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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멸 ㅣ Italian Novel to Film 2
알베르토 모라비아 지음, 정란기 옮김 / 본북스 / 201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사소한 오해로 시작되어 자신의 꿈을 포기(할 뻔)한다는 점에서 영화 [라라랜드]도 떠올렸고,
뜨겁게 사랑하는, 그러나 역시 또 그놈의 오해 때문에 모든 것을 망쳐버린다는 데서 이언 매큐언의 <체실 비치에서>도 떠올렸다.
감정을 이렇게나 섬세하게 그려낼 수 있다는 점에서 슈테판 츠바이크의 <연민>도 떠올렸다.
그러나, 경멸은 경멸이다.
<경멸>은, <경멸>이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극작가인 나(리카르도 몰티니)는 에밀리아와 결혼한 후, 아파트 대출금을 갚기 위해 원치 않는 영화 시나리오 작업을 하게 된다.
문학에 대한 야망을 잠시 접고 어쩔 수 없이 하는 임시직이라 생각했던 시나리오 일이 오히려 업이 되어가고, '나'는 이런 처지를 비관한다.
영화 제작자 바티스타는 에밀리아에 대한 관심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에밀리아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는 나를 경멸한다.
나는 에밀리아의 사랑이 왜 식어가는지 알지 못한다.
다툼 이후 에밀리아는 떠나고, 그녀는 바티스타 옆에서 교통사고로 즉사한다.
에밀리아는 바티스타의 집요한 추근거림에 고통스러워하며 "혐오와 간청이 뒤섞인 힘없는 눈길"로 남편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러나 몰티니는 끝내 모른다. 그 구조 요청을 무시한다.
몰티니는 에밀리아의 사랑이 변하는 걸 느끼면서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씁쓸한 것은, 독자인 내 모든 상황 판단은 몰티니의 관찰로부터 이뤄진다는 것이다.
보면 알 수 있는 것을, 그만은 모른다. 이쯤 되면, 모르고 싶은 것은 아닐까.
그의 이성의 마비는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일부러라도 그의 변명을 만들어주고 싶은 심정이다.
그는 -착각이었지만- 그녀를 위해 분에 넘치는 아파트를 장만하고, 남은 할부금을 갚을 생각에 불안에 휩싸였다.
집이 생겨 기뻐하는 그녀를 보며, 그는 자신이 "집을 사준 사람"이기 때문에 사랑받는다고까지 느낀다.
그 오해는 곧 환멸의 시작이 된다.
그는 돈의 출처나 금전상황을 묻지 않는 에밀리아에게 반감을 품기 시작한다.
"내가 겪는 고충에 비해 지극히 평온하고 만족스러워하는 것은 그녀가 이기적이라는 증거였고, 무감각해져서 내가 겪는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녀에 대한 미움은 자기 연민으로 이어진다.
"따분한 가정이라는 함정에 빠져버린 불쌍한 인간, 아내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자신을 속이고 돈 때문에 힘들어하면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불쌍한 젊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처지가 이렇게 된 것은 이상이나 취미가 같아서 나의 야망을 이해하는 여자와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단지 아름다웠을 뿐 배운 것 없는 단순한 타이피스트였다."
한심한 자기 연민을 듣다보면, 그의 편을 들어주기가 쉽지 않다.
그가 셀 수 없이 주장하는 오로지 '그녀를 위한 것'이었다는 말, 오직 그녀를 위해 희생했다는 말은 과연 진실이기만 할까.
꿈꾸던 문학적 야망을 성취할 수 없을까봐 불안해 빠져나갈 구멍을 찾은 것은 아닐까.
그 스스로 부를 탐하고, 그 부를 거머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바티스타의 흑심을 보면서도 눈 감아버린 것은 아닌가.
몰티니와 에밀리아의 다툼은 현실적이어서 날카로웠다.
집 때문에 자신을 사랑한다 말하냐는 그의 질문에 그녀는 모욕감을 느끼며, 자신에게 집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외친다.
이까짓 집, 이라는 그녀의 말에, 그는 자신의 모든 희생과 노력이 짓밟히는 고통을 느낀다.
그는 집이 그들의 결혼생활을 상징하며, 그 집을 위해 하고 싶은 대부분의 일을 그만두었고, 야망까지 포기했다고 스스로 믿고 있다.
이쯤되면, 그 집에 연연하고 있는 것, 집이 자신의 모든 것인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뜨겁게 사랑하던 부부는, 그 알량한 집 때문에, 상대가 그 집을 간절히 원한다는 착각 때문에 서로를 목조르고 있다.
에밀리아는 말한다. 당신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이 집이 소중한 듯 말했다고. 모두가 억울하다.
그들의 사랑에 문제가 생겼음을 감지한 후, 그는 집요하게 그녀를 추궁한다. 나를 사랑하느냐고.
그러나 본질엔 가까이 가지 않는다.
에밀리아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를 찾는다. 심지어, 사랑하지 않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급기야, 그는 바티스타가 그녀에게 육체적으로 접근하는 장면을 두 눈으로 목격한다.
그 순간, 부부의 두 눈이 마주친다. 그러니까, 그녀 또한 그가 이 모든 광경을 보았을을 인지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이 일을 핑계 삼아 시나리오 일을 그만둘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스스로를 "교양있고 학식 있는 사람으로 예술 작업을 하는 극작가"라고 생각하는 그.
에밀리아를 "그녀의 학력이나 교양은 노동자들 수준이었다. 말하자면 그녀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그렇듯 기본적인 상식만 갖고 있었다"고 말하는 그.
그의 고매한 지적 능력은, 지금 무얼 하고 있는가.
더이상 들어주기 힘든 그의 말.
"내가 이렇게 된 건 당신 때문이란 걸 알아야 해. 당신 때문에, 당신이 나를 대하는 태도나 생각을 고치기 위해서라는 걸."
행동없는 생각. 오로지 생각. 그것이 당신의 알량한 지성인가.
"나의 지성은 나의 자존심이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근거다.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내가 생각해야 할 문제가 무엇이든, 지력을 총동원해서 용감하게 대결하는 것이 나의 의무였다. 하지만 그저 낙담할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나는 명백하고 분명한 태도를 취하기 위해 아내가 나를 경멸하는 그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당신의 잘나고 고결한 이성은 마비되었다.
에밀리아는 말한다.
"난 당신이 남자답지 못하다는 것밖에 몰라. 당신은 남자답게 굴지 못했어."
수컷 정도가 아니라, 동물의 본성조차 마비된 건 아닐까.
행동하지 않는 지식인, 혹은 지성인,
뻔뻔하고 몰염치한 자본(바티스타).
현대사회의 일면을 보는 듯한 기분도 들어 서글펐다.
돈의 논리로 감성이, 동물로서의 본능마저 마비되어간다. 그것이 이성인가.
그들의 다툼은, 또한 언제 어디서나 벌어지는 일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안타까웠다.
함께 행복하기 위한 일들이 주객이 전도되어, 그 일로 인해 불행을 어깨에 짊어지는 일로 변모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에밀리아가 죽은 뒤 몰티니, 그는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죽지도 않는다.
"죽으면 삶에서 얻지 못했던 순수성을 되찾을지 모른다" 운운하지만, 죽고 싶다는 건 생각일뿐이고, 자살은 행동 아니겠나.
그에게 행동은 어울리지 않는다.
"살기 힘들다고 자살하면 안돼. 죽는다면 다 에밀리아 탓이야"라고 중얼거리는 꼴이라니.
끝내 남탓. 지성미 끝내주는 구랴!
그는 환각과도 같은 그녀의 환상을 만나기 시작한다.
유령같은, 그러나 너무나 현실적인.
너무나 사랑했으므로.
그 사랑은.. 공허했다.
몰티니와 함께 일하게 된 영화감독 레인골드는 오디세이를 프로이트 이론으로 새롭게 해석해 들려주고,
그의 해석 속에서, 몰티니는 완전히 율리시스이다.
몰티니는 그 해석을 부정하고, 율리시스에 태도에 적대감을 드러낸다.
책장을 덮자마자 느껴지는 것은 쓴맛이다.
자본주의가, 사랑이, 자기합리화가 쓰다.
이렇게 잘 쓰여진 경멸이라니. 쓰다.
"정리하자면, 우선 페넬로페는 율리시스가 구혼자들의 잘못된 행동을 방관하고 당당한 왕이자 남편의 태도를 보이지 않아 경멸하게 됐고, 다음은 아내의 이런 경멸이 율리시스가 트로이 전쟁에 출전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며, 세번째는 자기를 경멸하는 아내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율리시스가 귀환을 미룬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페넬로페의 존경과 사랑을 다시 얻기 위해 율리시스가 구혼자 모두를 학살한 거죠." "사실 율리시스는 아내 곁으로 돌아가는 걸 두려워한 사나이였어요. 그의 잠재된 의식은 아내 곁으로 돌아가는 게 싫어서 앞길에 장애물이 생기길 바랐고, 또 그렇게 된 거죠. 율리시스의 모험정신은 조금이나마 고향에 늦게 돌아가고 싶은 그의 무의식적 욕망을 의미하는 데 지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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