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미스 함무라비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평점 :
현직 판사가 쓴 소설이라.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수위 적당히 조절된 가벼운 법 이야기겠거니, 하며.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몇 번을 왈칵하고, 눈물 콧물을 쏟아가며 읽었다.
공명정대한 시선이, 게다가 온기가 느껴지는 시선이 매우 좋았다.
법원.
누군가에게는 평생 단 한 번도 갈 일 없는 곳이고, 누군가에겐 울며 불며 사정하고 싶은 곳이고, 누군가에겐 악몽, 누군가에겐 영화 속 멋지거나 악랄한 캐릭터들이 드나드는 상상의 공간이다.
또 누군가에겐, 그냥 "회사"다. "우리 회사"라는 표현이 인상 깊었다.
그러나 냉담하기는커녕, 이 "회사" 이야기는 뜨거웠다.
왈칵 #1.
병원에서 아들을 잃은 억울한 사연을 지닌 할머니, 법원 앞에서 몇날며칠 시위를 하고 있다.
'내 아들을 살려내라!' 할머니 옆에 젊은 여자가 털썩 주저 앉아 훌쩍이고 있다. 할머니는 신들린 듯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고, 옆에서 끄윽끄윽 소리를 내며 우는 젊은 여자의 얼굴은 눈물 콧물 범벅이다. 박 판사다.
누군가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만으로도, 공감한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워질 수 있을까.
그 간단한 그것이 얼마나 어렵던가.
그런가하면, 박 판사가 그 공감력 때문에 사건 기록들이 모두 말을 걸어온다며 고통스러워 하는 장면 또한 놀라웠다.
억울하고 한맺힌 일들을 처리하는 것이 업인데, 그 일 모두에 내 일처럼 감정이입이 되어 버린다면, 그건 또 얼마나 잔인할까.
사람들은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을 가진 판결을 원할까,
투입과 산출, 논점과 관련없는 이야기는 고려하지 않는, 기계와 같은 판결을 원할까.
#2. 식당 종업원의 실수로 불판이 떨어진 사건. 숨은 이야기.
#3. 재산분쟁으로 법원까지 온 한 가족. 막내아들과 늙은 아버지의 눈물을 어찌 메마른 눈으로 볼 수 있으리.
시종일관 특권의식도, 자기비하도 없는 공명정대함이 좋았다.
아, 이런 시각 정말 좋다.
정의로운 사람만 등장하는 건 아니었다. 부정을 눈감으라고 하는 수석부장의 말은 "달콤한 솜사탕처럼" 나긋나긋했다.
그러나 딱 잘라 말할 수 있는 악인도, 선인도 없었다. 세상은 그런 거 아니겠나.
언뜻 느껴지는 판사라는 직업의 애환, 고민도 좋았다.
언젠가 조사에서 법원과 검찰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가 10점 만점에 3점대였다고, 반면 처음 보는 낯선 행인에 대한 신뢰도는 4점이었다는 말을 할 때는 판사로서의 회의가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 권력을 작다 말하지 않는다.
"법정에서 가장 강한 자는 어느 누구도 아니고, 바로 판사야. 바로 우리지. 그리고 가장 위험한 자도 우리고. 그걸 잊으면 안돼."
폭행이든, 희롱이든, 성 관련 사건들이 품고 있는 함의에 대한 이야기도 명쾌했다.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결국, 책은 사회적 책임에 대한 것으로 시각을 돌리고 있다.
가난을 목도한 임 판사는 생각한다.
"원인에 있어서 자유로운 행위라. 그런데 무엇이 '원인'이지? 무엇이 '행위'고? 그리고 '자유'란 놈은 또 뭐고. 자유의지를 전제로 인간에게 책임을 묻는 판사의 일이란 실은 다 허깨비 짓 같은 것은 아닐까."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지기 때문에 존엄한 것이다. 최소한 그것이 인간 사회의 약속이다. 그런데, 나약한 인간을 수렁 속에 방치하는 사회는 어떤 책임을 지는 걸까."
덧붙은 챕터의 제목 "나쁘고 추한 사람은 없다. 나쁘고 추한 상황이 있을 뿐"이라는 말은 그 사회의식을 담았다.
작가로부터 전해지는 온기.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책 읽는 내 마음을 데웠다.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겠지만 사람들의 눈에 띄는 것은 언론에 나오는 거창한 사건들, 튀는 일들뿐이다. 하지만 어느 분야든 대다수의 일하는 이들은 화려하지 않고 튀지도 않는 일들을 묵묵히 반복하고 있다. 그러기에 세상은 호들갑스러운 탄식과 성급한 절망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묵묵히 굴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