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바닥
조 R. 랜스데일 지음, 박미영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이제는 노인이 되어 요양원에 있는 해리가 약 70년전, 1933-34년 사이에 벌어졌던 일을 회상하는 내용이다.

그를 통해 듣는 그 시절은 야만의 시대라고 밖에 볼 수 없다.


흑인은 죽여도 법에 저촉되지 않던 시절, 

단지 흑인 여자와 결혼했다는 이유로 백인 남자도 벌거벗겨지고 린치를 당하던 시절.

"현재 흑인들에게 있어 유일한 차이점은 주인 맘대로 팔아버릴 수 없다는 것뿐이다."

의사라는 작자가 말하기를, "흑인과 백인은 따로 분리해야 해. 성경에도 그렇게 나온다고.", 

"흑인 여자들을 도대체 어찌 구분하나." 당당히 떠드는 시대. 

"그는 흑인과 백인은 진정으로 근본에서부터 다르고, 그게 누구에게나 명백한 사실이라 확신했다."

흑인은 백인이라면 어린아이에게도 -도련님으로 번역되든, 미서로 번역되든- 존칭을 써야 하고,

흑인 아이조차 "깜둥이 총"(새총)이란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그것이 폭력이라는 의식조차 아직 없던 시대. 

개와 노새도 시종일관 이름으로 불리는데, 흑인에겐 그 정도 존중도 없던 폭력의 시대.


어느 날, 해리는 흑인 여자의 시체를 발견하게 되고, 연이어 몇 구의 시체가 마을에서 발견된다. 

처음 흑인 여성의 시체가 발견될 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으나, 

살인이 계속되니 백인 여자가 죽을 수도 있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이 사건에 주목하게 된다.

죄없는 흑인 모즈가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늙은 깜둥이를 목매달고는, 지들 잘난 줄 아는 백인 쓰레기들"에 의해 살해당한다.

지역 경관인 아버지는 이에 죄책감과 스스로의 한계를 느끼기도 한다. 그 안의 내재된 차별도 고백하며. 


결국 연쇄살인범은 잡히지만, 그 사건과 연관된 몇몇 죽음들은 깔끔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추정만이 가능할 뿐. 

"확실히 알아낼 방도는 없다. 인생은 그런 것이다. 할머니가 읽던 추리소설과는 다르다. 모든 게 딱 맞아떨어지진 않는다."


잘 모르고 KKK단에 들어갔다가 그들의 만행을 보고 빠져나온 유태인의 이야기도 인상깊다. 

자신이 유태인인 걸 들켰다면 자신 역시 당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한명이라도 악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온 건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인간은 꼭 나를 대입해야만 깨달을 수 있는가 생각해보게 된다.

공감능력을 믿어본다. 당하지 않았어도, 당할 가망성이 없어도, 그래도 알 수는 없을까. 부디, 있을 것이라고.


책은 <앵무새 죽이기>를 떠올리게 했다. 성장소설과 인종차별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만의 압권은 장르 소설로서의 몰입도였다. 마지막 장까지 넘치는 긴박감. 


대체로 어린 시절이 이야기되고 있고, 드물게 화자의 현재가 드러난다.

"사람이 이렇게 오래 살아야 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삶을 살 수 없다면, 그저 생명을 소진하며 산소를 빨아들이고 똥을 싸는 것일 뿐이다. 

 어쩌면 중요한 것은 나이가 아니라 건강일지도 모르겠다. 건강하게 오래 산다면 문제될 것 없다. 하지만 건강 없이 오래 산다면, 생지옥이다. 

 이제는 과거만 중요하게 여겨질 뿐이다. 그것만 살아있는 듯 느껴진다. 그것만이 내 영혼을 지탱할 수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소 비관적이었다.

그 야만의 세월을 보낸 사람이, 시체를 직접 목도하고, 심지어 피해 당사자가 될 뻔 했던 사람이 마냥 낙천적이어도 어색하기 그지 없겠지만, 나는 낙천성을 바랐나.

그의 비관 역시 서늘한 책의 분위기에 일조했다. 한여름에 읽기 좋은 책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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