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여자들
록산 게이 지음, 김선형 옮김 / 사이행성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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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록산 게이의 <나쁜 페미니스트>에 큰 울림을 느꼈다. 그녀가 쓴 소설이 나온다니 읽어보지 않을 수 없다. 

21개의 단편 거의 모두에 걸쳐 살색이 찬연하다. 깊은 슬픔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그 슬픔이 반갑다. 깊은 슬픔을 마주한다는 것은, 때로 한없는 희망으로 향하는 방법임을 알고 있음으로.  

소설을 생각한다. 왜 인간은 허구의 이야기를, 그것도 끔찍한 이야기마저 지어내며 울고 사랑하는가. 

이야기가 되었을 때, 더이상 이것은 타자의 일이 아니다. 

여자들이라는 단서도 필요없다.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일로 지독한 슬픔에 젖어 숨조차 쉴 수 없는 누군가 있다면, 그것은 곧 우리 모두의 슬픔이 아닌가.


저자의 이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에 페미니스트가 쓴 소설이라는 꼬리표는 따라 다니겠지만, 그 어떤 배경을 떠나서 소설 자체로서도 매우 훌륭했다. 꼭 성뿐만이 아니라, 인종, 빈부, 교육 등 그녀가 관심을 기울이는 모든 주제들이 총망라된다.


<언니가 가면 나도 갈래>의 "피터 씨를 겪고 살아 돌아온 소녀들"은 거액으로 보상받지만, 그것은 "우리 삶의 가치"를 되돌려 주지 않는다. 

<물, 그 엄청난 무게>의 비앙카는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무엇으로 평생 버림받고, 희망은 매번 좌절된다.   

이 소설집의 제목이 된 <어려운 여자들>은 헤프거나, 불감증이거나, 미치거나 한 등의 여자들을 정의한다.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그 모두는 누구였는지.

<플로리다>의 다르고 또 같은 삶들. 이 짧은 단편에 여러개의 시점이 펼쳐진다.  

누군가를 가난하다고, 비만하다고,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로 무시하며 그것으로 살아갈 동력을 얻는 사람들. 

차별하다 못해, 젊고 건강한 백인의 노동을 질투하며, 동시에 불편함을 느끼는 아이러니.  

<라 네그라 블랑카>는 '흰 피부의 흑인 여자'를 뜻하는 스페인어라고 한다. 많은 단편에서 옅은 피부색을 지닌 혼혈 여성이 등장한다. 

누군가는 백인 처녀로 살아가는 것이 "종류를 막론하고 흑인 처녀로 지내는 것보다 무조건 훨씬 쉬웠"으므로, 그렇게 살아간다. 

대체 그 차이는 뭘까. 백인 같은 흑인, 흑인 같은 백인. 이미 사장되어야 마땅한 그 의미없는 기호. 

섬뜩하기까지 한 <우리 아버지의 죽음에 부쳐>는 그들만의 사랑, 그들만의 추모가 그려진다.  

어머니의 과도한 기대에 <나쁜 신부>가 되어버린 미키. 그 타락은 예정된 일은 아니었는지.  

"가망이 없는 연애를 할 때 제일 신나"하는 리베카와 사제관에 머물 용기도, 벗어날 용기도 없는 미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개방 결혼>은 씁쓸하다. 단 한 장 반으로 말하는 사랑과 결혼.

<어떤 격려>는 영화 [룸]에서 주인공의 절규를 떠올리게 한다. 착한 여자가 되라는 엄마의 가르침이 어떤 의미가 되었는지. 


쌍둥이에 대한 모티프는 많이 등장한다. <카인의 표식>에서 그녀의 남편(들)은 아버지로부터 학대받은 일란성 쌍둥이다. 

<어떻게>의 한나와 안나 역시 쌍둥이다. 

서로를 교감할 수 있는 쌍둥이라는 설정은 약한 자들의 연대를 상징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이를 잃은 상심도 여러번 변주된다. 다행히도, 모두 치유를 향해 간다. 

피부색 때문에 디트로이트에서 왔냐는 질문을 수십 번 들어야 하는 <노스 컨트리>의 케이트는 매그너스를 만나 치유되기 시작한다.

<끝까지 남김없이 부서져라>의 나타샤는 아이를 잃은 슬픔으로 스스로를 파괴하다 뜻밖의 아이를 만나고 치유의 여행을 결심한다. 

<나는 칼이다>는 쌍둥이와 상실, 그 모두 다 등장한다. 

그녀들은 더없는 일체감을 느낀다. "사람들은 우리한테 서로 뭔가 특별한 교감을 나누느냐고 묻는다. 우리는 아니라고, 그렇지 않다고 거짓말을 한다."


환상적인 분위기의 소설도 있었다. 돌 던지는 사람과 유리 아내의 사랑인 <유리 심장을 위한 레퀴엠>,

빨간 비행기 한 대로 날아가 태양을 없애버린 광부 하이럼의 이야기 <어둠의 희생제물>. 은유와 상징이 가득하다. 

"우리 세계를 바로 잡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다른 세계에 끔찍한 불균형을 초래할 의향"이 있는 사람들. 

세상을 바로잡는 것은 그들의 탐욕이 아니다. 

<고귀한 것들>은 탐욕으로 미국이 갈라져 버린 시점을 상정한다.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에서, 존 그레이는 우리가 가진 "거룩한 인간"이라는 환상을 깨고자 했다. 

우리의 악한 근성마저 똑바로 직시했을 때, 최악을 예방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것 아니겠나. 

에세이든, 소설이든, 인간의 이해심을 기대하고, 약한 자들의 연대를 촉구하는 록산 게이. 그녀의 이야기가 계속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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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
존 그레이 지음, 김승진 옮김 / 이후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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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호모 라피엔스homo rapiens란, 약탈하는 사람.

현생 인류 종을 뜻하는 호모 사피엔스를 '약탈하는' 이라는 뜻의 rapacious로 바꿔 패러디한 것이라고 한다. 


놀랍고, 날카롭고, 논쟁적인 책이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달리 자유의지가 있으며, 고로 선택하는 대로 살 수 있다는 말은 매우 익숙하다.

그러나 이 자유의지라는 개념은 과학이 아닌 종교로부터 기인했음을, 

그것도 휴머니스트들이 맹렬히 비난했던 기독교 신앙에서 나왔음을 저자는 지적하고 있다. 

휴머니즘은 과학이 아니라 종교이며, 진보는 환상임을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생물 종은 변화하는 환경과 무작위로 상호작용하는 유전자 조합에 불과하며, 자기 운명을 통제할 수 없다. 생물 종은 실존하지 않는다. 이는 인간도 마찬가지다. 

흔히, 동물은 태어나 짝을 찾고 음식을 구하다 죽지만, 인간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인격체이며, 우리의 행동은 스스로 선택에 의한 결과이며, 의식과 자아와 자유의지가 있어서 다른 모든 생명체보다 우월한 존재라고.

그러나 이는 오류일 뿐이라고 말한다.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문제는 거의 없다고. 

"우리는 이성이 우리의 삶을 이끈다고 믿고 싶어한다. 하지만 이성 그 자체도 단지 '의지'가 추동하는 힘에 밀려 움직이는 하인이다."

여기서 의지란, 계획하고 목적에 따라 의도한다는 의미의 의지가 아닌, 생명을 추동하는 근원적이고 맹목적인 에너지를 의미한다. 

"인간도 동물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인류'의 역사 같은 것은 존재할 수도 없다. 개별적인 사람들의 인생은 존재할 수 있지만 말이다. 인간이라는 종의 역사를 이야기한다면, 이는 각 인생들의 알 수 없는 총합을 뜻하는 것일 뿐이다.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의 삶은 행복하고 어떤 사람의 삶은 비루하다.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인식과 지각은 의식하는 능력이 있어야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자각이 있어야만 존재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감각과 인식은 동식물의 세계 어디에나 존재한다."

"우리는 자신이 일관되고 단일한 개체라고 믿으면서 행동한다. 하지만 우리는 분절된 것들의 연속체기 때문에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영속적인 자아'라는 생각을 없앨 수는 없지만, 실은 영속적인 자아가 아니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


거룩한 인간에 대한 환상은 역사적으로 수없이 깨져왔다.

"과학과 기술이 발달하면서, 살해의 테크닉도 발달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든다는 희망이 자라면서, 대규모 살해도 증가했다."

저자는 기술이 진보해도 인간 본성의 취약함은 바꿀 수 없다고 주장한다. 


변하지 않는 정의란 없음을 주장한다.

"소크라테스 철학과 기독교는 정의란 시간을 초월하며 영원하다는 생각을 권장한다. 그러나 사실 이 생각보다 더 영원하지 않은 것도 별로 없을 것이다."

"정의는 관습의 산물이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르다면, 인간의 여러 본능들이 서로 상충하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안전을 갈구하지만 쉽게 지루해한다. 평화를 사랑하지만 폭력을 열망하기도 한다. 생각하기를 원하지만 생각이 가져오는 불안을 싫어하고 두려워한다. 이런 모든 욕구를 다 충족할 수 있는 삶은 없다. 다행히, 철학의 역사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은 자기 기만이라는 선물 덕택에 자기 본성을 모른 채 번성한다."

"몇몇 사람들이 자유를 추구한다고 해서 모든 인간이 자유를 원할 것이라고 추론하는 것은, 날아다니는 물고기가 있다고 해서 나는 것이 물고기의 본성이라고 믿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이다." -루소에 대한 조제프 드 메스트르의 논평. 


이어지는 통렬한 인식. 

"호모 라피엔스는 많은 생물 중 하나일 뿐이고, 딱히 영원히 지속되어야 할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머지않아 인간 종은 멸종할 것이다. 인간이 사라지고 나면 지구는 회복될 것이다. 인간 종의 마지막 흔적이 사라진 후, 인간이 파괴하려고 했던 다른 많은 종이 다시 번성할 것이다. 또한 존재하지 않았던 또 다른 종들도 함께 번성할 것이다. 지구는 인간을 잊을 것이다. 삶의 놀이는 계속될 것이다."


"인간의 의지에 의해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의 근저에는 자신의 필멸성을 부정하려는 마음이 깔려 있다."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의 주장을 따라가다가, 이것은 절망적인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환상에서 벗어나 진실을 대면하는 것.

인간 본성의 취약함을 똑바로 바라보고, 경계하는 것. 그리고 좀 더 가벼워지는 것.


"오늘날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좋은 삶은, 과학과 기술을 한껏 활용하되, 그것이 우리에게 자유롭고 합리적이며 온전한 정신을 주리라는 환상에는 굴복하지 않는 삶이다. 평화를 추구하되, 전쟁 없는 세상이 오리라는 희망은 갖지 않는 삶이다. 자유를 추구하되, 자유라는 것이 무정부주의와 전제주의 사이에서 잠깐씩만 찾아오는 가치라는 점을 잊지 않는 삶이다. 

 좋은 삶이란 진보를 꿈꾸는 데 있지 않고 비극적인 우연성을 헤쳐 나가는 데 있다. 우리는 비극의 경험을 부정하는 종교와 철학에 길들여져 있다. 우리는 '행동'이 주는 위안에 기대지 않는 삶을 상상할 수 있을까? 아니면, 너무 무식하고 게을러서, 그런 삶을 꿈꾸지도 못하는 것일까?"


"인간은 세상을 구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절망할 일은 아니다. 세상은 구원될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다행히도 인간은 자신이 만들어 낸 세상에 살게 될 일이 결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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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한 계단 - 나를 흔들어 키운 불편한 지식들
채사장 지음 / 웨일북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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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표현에 의하면, "인문학적 수필"이다. 

또 "저자의 말"에 의하면, "당신이 표류하지 않고 항해하는 삶을 살기를" 바라며 씌여진 글. 

"다만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살기 위한 안내문이다. 


저자는 불편한 책을 찾아 읽을 것을 권한다.

불편함을 딛고 기존의 세계를 해체해야 더 높은 세계로 올라 갈 수 있으므로. 

저자가 인용한 니체의 말을 재인용한다.

"만약 네가 영혼의 평화와 행복을 원한다면, 믿어라. 다만 네가 진리의 사도가 되려 한다면, 질문하라."


저자의 개인적 경험과 어우러져, 방대한 지식들을 총망라해 설명하고 있다. 

열한 계단은 다음과 같다. 

문학-죄와 벌, 기독교-신약성서, 불교-붓다, 철학-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과학-우주, 이상-체 게바라, 현실-공산당 선언, 삶-메르세데스 소사, 죽음-티벳 사자의 서, 나-우파니샤드, 초월-경계를 넘어서. 

흥미롭게 읽은 부분도 있고, 몽롱한 정신으로 넘긴 부분도 있다. 

이미 매우 방대한 분야를 저자가 풀어 설명하고 요약했기 때문에 더이상의 정리는 어려울 듯하다. 


"이 모험은 나와 당신의 내면의 성장에 대한 기록이다." 

이런 말들은 책을 말랑말랑하게 보이게 하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 

가령, 츄리닝 바지에 광택 나는 검정색 구두를 신던 자신의 대학 시절을 이야기해 재미를 자아내다가, 거기서 끌어내는 것은 사뭇 날카롭다. 

그것엔 타고난 패션 감각의 부재도 있지만, 자기 세계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라고. 옷이 아닌 영혼의 문제에 집중하려 했다고. 

이런 "부담스러운 이상주의자들"은 악의적인 사람들보다 나을까?

저자는 말한다. 이들은 세상을 선/악, 정의/불의, 청결/불결로 나누며,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모든 것을 악, 불의, 불결로 타자화한다고. 

이것은 우월감과 선민의식이며, 그들이 나약하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배움이 부족하고, 세상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수용하지 못하며, 경제적 자립을 못하고, 현실 경험이 전무하기 때문에.

단, 한 때 이상주의자가 되는 것은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자존감의 근원을 품을 수 있게 하지만, 

평생을 이상주의자로 살거나, 한 번도 이상주의 자로 살아보지 못한 사람들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전자는 미성숙해보이고, 후자는 인간으로서의 매력을 찾을 수 없다."

생각해보면, 저자가 말하는 이상주의자들은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어떤 집단에 속해 있으면서 자신만은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한 때 이상주의자가 되느냐, 영원히 그것에 머무느냐.


리뷰 제목을 '어른'이 된다는 것, 이라고 썼다.

저자가 말하는 어른이 되는 과정을 의미한다기보다, 저자에게서 느껴지는 사명감을 생각했다.

잔소리나 훈장질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가만히 이야기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하는 것. 

타인을 교화시키고 영감을 주는 효과적인 방법. 

어른이 되어 살아간다는 것. 이런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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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몬드 (양장) - 제10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손원평 지음 / 창비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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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불행에 무덤덤한 사람들. 

세상에 불행은 너무나 많으므로. 모두 다 내것으로 여기면, 도저히 살아낼 수가 없으므로. 

그러나 그 불행이 내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어째서 나의 고통에, 내가 사랑하는 이의 고통에 그리도 무감할 수 있느냐고, 세상의 매정함에 억울해 한다.


감정 표현 불능증, 다른 말로 알렉시티미아.

윤재는 선천적으로 작은 편도체 때문에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한다. 

기쁨도, 공포도, 분노도 잘 느끼지 못하는 건 불편함을 가져오고, 때로 생존을 위험하게 하는 요소이지만, 

덕분에 "세상을 곧이 곧대로만 받아들였다."

거친 곤이를 만나고, 버림 받을까 두려워 강한 척 하는 그 아이의 모습을 알아보는 건 다름아닌 윤재다.  

"사람들은 곤이가 대체 어떤 앤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단지 아무도 곤이를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았을 뿐이다."


엄마, 할머니, 심박사, 도라. 

늘 손을 잡아주는 사람이 있었던 덕분일까.

무엇이 되고 싶은지 생각해 본 적 없는 윤재는 성장한다. 감정을 느끼기 시작하고, 하고 싶은 일이 생긴다.

"갑자기 마음속에 탁, 하고 작은 불씨가 켜졌다. 행간을 알고 싶었다. 작가들이 써 놓은 글의 의미를 정말 알 수 있는 사람이고 싶었다. 더 많은 사람을 알고 깊은 얘기를 나누고 인간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나 언젠간 글을 쓸 수 있을까. 나에 대해서."


책이나 영화를 보며 세상이 소름끼치게 무서워질 때가 있다. 

"엄마는 늘 집단생활에는 희생양이 필요하다고 얘기했었다."

그게 현실감 있게 느껴질 때 더욱. 

할머니는 말한다. "사람들은 원래 남과 다른 걸 배기질 못"한다고. 

책을 보며 제일 화가 났던 순간은, 천사의 얼굴을 한 악인 -철사- 때문이 아니었다. 

윤재가 가족을 잃었다고 공표하며, 아이들에게 격려의 박수를 유도하던 담임의 모습. 그때 나는 분노가 일었다. 

악의 없는 위해. 


하지만 이내 온당치 못한 공포를 잠재운다. 

사람은 너무 약해서 그런거니까.

너무 약해 강한 척 하려 하고, 미지의 존재가 무서워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도와주려다 실수하곤 하는 거니까.   

세상은 살 만한 곳이다, 분명. 

윤재는 책을 보며 생각한다.

"마치 이 세상에 정해진 답은 없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남들이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한다고 해서 꼭 정해진 대응을 할 필요도 없는 게 아닐까. 모두 다르니까, 나같이 '정상에서 벗어난 반응'도 누군가에겐 정답에 속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름이 조금 더 인정된다면, 좋겠다. 


책에 대한 이야기는 유독 마음에 드는 구절이 많았다. 

"할멈의 표현대로라면, 책방은 수천수만 명의 작가가 산 사람, 죽은 사람 구분 없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인구 밀도 높은 곳이다. 그러나 책들은 조용하다. 펼치기 전까진 죽어 있다가 펼치는 순간부터 이야기를 쏟아낸다. 조곤조곤, 딱 내가 원하는 만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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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지도 - 어느 불평꾼의 기발한 세계일주
에릭 와이너 지음, 김승욱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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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결론은 뭘까.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다? 물론 가능하지만, 가난한 행복의 허구에는 빠지지 않는다. 

행복으로 가는 길은 다양하다? 다양성 받고.

시원하게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의 행복은 전적으로, 철저히 다른 사람들과 관련되어 있다. 가족, 친구, 이웃, 게다가 우리가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무실 청소부까지도 모두. 행복은 명사도, 동사도 아니다. 접속사다. 연결 조직."


여행은 네덜란드에서 시작한다. 

마리화나가 허용된 네덜란드에서 저자는 생각한다. 

만약 인체에 무해하고, 부작용이 전혀 없는 기계가 있어서, 뇌를 자극하는 것으로 쾌락을 느낄 수 있다면, 이용할 것인가.

아니오, 를 택한다면, "우리는 행복을 성취하고 싶어 하지, 그냥 행복을 경험하기만 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는 방증이라고.

"네덜란드인들은 무슨 일에도 관용을 베푼다. 심지어 비관용에도 관용을 베푼다."

"관용은 훌륭하지만, 쉽사리 무관심으로 변질될 수 있다."


그 다음 목적지는 스위스. 완벽한 일 처리, 어딜가나 청결한 스위스.

"그(쇼펜하우어)의 믿음처럼 행복이 정말로 불행의 부재를 뜻하는 것이라면, 스위스인들이야말로 행복해야 마땅하다."

"프랑스에 와인이 있고, 독일에 맥주가 있다면, 스위스에는 권태가 있다. 그들은 권태를 완벽하게 다듬어 대량생산 했다."

저자가 만난 스위스인들은, 행복의 요소로 자연과의 깊은 유대감을 꼽는다. 

밤 10시 이후 변기를 내리거나 일요일에 자기 집 잔디를 깎는 것이 불법인 나라, 하지만 자살이 합법인 나라. 


국민행복지수는 1973년 부탄의 왕축 국왕이 최초로 퍼뜨린 개념이라고 한다. 부탄에서는 국가가 행복을 관리한다. 

그곳의 누군가는, "비현실적인 기대를 품지 않았기 때문"에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죽음을 가까이 하기에 행복하다고 말한다. 

"가난하지만 효율과 생산성의 신에게 무릎을 꿇지는 않는" 나라, 부탄. 

"미국에는 행복한 사람이 거의 없지만, 모두들 끊임없이 행복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부탄에서는 대부분의 사람이 행복하지만, 행복에 관해 이야기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이 나라에는 자기 성찰이 없다. 자기계발서도 없고, 안타깝게도  실존적인 고뇌도 없다."

더 나은 세상을 모르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라고, 가짜 행복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아니면, 알지 못해도 행복하면 그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부탄 사람들에게 행복은 집단적인 노력을 뜻한다."

"우리는 로빈슨 크루소의 행복을 믿지 않습니다. 모든 행복은 관계 속에 있어요."


이상적으로 보이는 나라만 찾아가지 않는다. 다음 나라는 카타르. 

"번쩍거리는 졸부들"의 나라. 

"석유와 천연가스라는 복권에 당첨"되자 겨우 50년전 고기잡고 진주잡던 일일랑 깡그리 잊고 온 세상 사람을 카타르인과 그 외 "하인"으로 나눠버린 나라. 

저자가 카타르인을 만나기까지 그 과정도 쉽지 않았다. 특별한 사람을 만나자는 게 아닌데. 미국에서 미국인을 만나고, 한국에서 한국인을 만나듯, 카타르에서 카타르인을 만나려고 한 것 뿐인데도, 부탁을 받은 아랍인 친구는 난색을 표한다. 

잭팟. 그들은 전보다 행복해진걸까. 

"예전에 카타르 사람들의 삶은 문화를 가꿀 수 없을 만큼 가혹했다. 지금은 문화를 가꾸기에는 삶이 너무 편안하다." 

"행복의 가장 큰 원천은 타인이다. 그럼 돈의 역할은 뭐지? 돈은 우리를 타인에게서 고립시킨다."


다음 국가는 실패를 찬양하는 나라,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흔히 따뜻한 나라를 낙원으로 상상하지만, 연구에 따르면 오히려 추운 나라가 더 행복하다고. 

"우리 인간은 서로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협력한다. 처음에는 순전히 이기적인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부분은 흐릿해지고 협력만 남는다. 우리가 남을 돕는 건 그럴 만한 능력이 있거나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나중에 보답을 받으려고 그런 행동을 하는 게 아니다. 이것을 가리키는 단어가 하나 있다. 사랑."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이 요상한 달나라 같은 땅에서 훌륭하게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고통을 가치 있는 것으로 바꾸는 데에도 성공했다. 심지어 행복해지기까지 했다."


행복한 사람들만 보다 보니 질려서 찾았다는 몰도바.

새치기와 부패, 불신이 만연해있다. 학생은 교수에게 돈을 주고 낙제를 면하고 학위를 산다.

신뢰란 찾기 힘들다. 슈퍼마켓도, 은행도, 이웃들도 믿지 않는다. 

몰도바인은 불행의 이유로 절대적 빈곤을 꼽는다. 저자는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다는 허무맹랑함을 주장할 생각은 없으나, 그 역시 사실임을 주시한다.

"문제는 몰도바인들이 자신을 나이지리아인이나 방글라데시인과 비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을 이탈리아인이나 독일인과 비교한다. 몰도바는 부자 동네에 사는 가난한 사람이다. 이런 처지에서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개인적 측면과도 직결해 생각할 수 있다. 

저자는 몰도바의 불행의 이유로 정체성의 부족을 꼽는다. 루마니아인도 아닌, 러시아인도 아닌 어정쩡한 몰도바의 처지. 

"몰도바인들이 불행한 건 자기가 누군지 모르기 때문이다. 자기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존재는 행복의 선행조건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저자는 몰도바에서 비교 우위의 행복감조차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한결 불행해진다. 그가 느낀 교훈은 이렇다.

교훈 1 ""내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다" 라는 태도는 삶의 철학이 아니라 정신병이다. 비관주의와 나란히 붙어 있는 병. 다른 사람의 문제는 곧 우리의 문제다."

교훈 2 "가난, 즉 상대적인 가난은 흔히 불행의 핑계가 된다. (..) 하지만 그들이 불행한 건 가난뿐만 아니라, 경제문제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 때문이기도 하다."


종교가 곧 생활이고 문화인 태국. 

내세의 세계관은 시야를 멀리로 확장시킨다. 지진해일로 수천명이 사망해도 정부를 비난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 운명을 마음대로 조절하지 못한다. 생각만 해도 무서운 일이지만, 해방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만약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소용이 없다면, 갑자기 삶의 무게가 훨씬 가벼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삶은 그냥 한바탕 놀이일 뿐이다."


그 외 영국, 인도, 미국이 나온다. 

부 혹은 그 어떤 조건도 행복과 필요충분조건을 맺고 있지 않다.

단지 국가와 사회는 그 가망성을 높이기 위해 노력할 의무가 있는 거고, 개인은 주어진 상황에서 행복해지려고 노력하는 것일 테다. 

책의 결론은 서두에서 이미 말했다. 이것은 저자의 결론.

본문에 인용되는 바에 의하면, 샤르트르는 완전히 반대되는 말, "지옥이란 바로 타인"이라 했다고. 

뻔한 말이지만, 선택은 각자의 몫이고, 나는 샤르트르가 안쓰러울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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