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 - 13세기에서 21세기까지 그림을 통해 읽는 독서의 역사, 개정판
슈테판 볼만 지음, 조이한.김정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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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는 "13세기에서 21세기까지 그림을 통해 읽는 독서의 역사"이다. 

성경을 든 성녀 마리아부터 율리시즈를 읽는 메릴린 먼로까지, 제목에 충실하다. 

책 읽는 여성들의 그림(드물게 사진)들이 펼쳐진다. 


책 읽는 여자, 위험하지 않을리가 있나.

역사의 동반자로 여기지 않는다면, 그 어떤 깨침도 위험할 수밖에.

이따금, 시대를 감안한다 해도 유독 지나치게 여성을 억압한 사람(혹은 집단)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들)가 여성을 유별나게 무서워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도 든다. 대체 여성에게서 무엇을 보았기에? 


독서는 역사적으로 자주, 부정적으로 묘사되었다. 특히 여자의 독서는. 

"책을 읽는 여자는 어떤 사람도 들어올 수 없는 자신만의 자유 공간을 획득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통해 독립적인 자존심 또한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밖에도 세상에 대한 자기 나름의 상을 만들어냈으며, 그것은 출생과 전통으로 매개된 모습이나 남자가 보는 모습과는 분명 일치하지 않았을 것이다."

독서란, "사회를 통한 통제, 그리고 가장 가까운 공동체 - 이를테면 가족이나 가정 공동체, 종교 공동체- 의 통제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한 상황에서, 종교재판의 희생자가 주로 여성과 책이었다는 점은 놀랍지도 않다. 

"글을 읽고 쓸 줄 알고, 무엇인가를 아는 여자 그리고 그 같은 지식을 담은 책, 그들은 위험하다. "그것을 내다버려!" 남자로 이루어진 정치가, 독재자, 지배자, 경찰, 관리들은 쓰여진 단어를 종종 경멸한다."


진시황은 책을 불태웠다. 수많은 독재자들도. 

"책을 읽는 사람은 깊이 생각을 하게 되고,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독자적 생각을 갖게 된다. 자신의 독자적 생각을 가진 사람은 대열에서 벗어나고, 대열을 벗어나는 자는 적이 된다."

독서의 의의를 짚어보며, 나의 독서의 효용을 생각해보게도 한다. 


독서가 곧 생각을 가져다 주진 않지만, 확률을 높여주는 것은 확실하다.

위험한 사람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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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부엉이
사데크 헤다야트 지음, 배수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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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케트의 <몰로이>와 배수아의 <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를 떠올렸다. 

초현실주의. 내러티브를 찾기 힘든 구성. 이야기 된 것들이 계속해서 부정되고, 내가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이 나이기도 한 상황 등. 

이 책의 역자이기도 한 배수아의 <알려지지..>는, 이 책에 대한 오마주라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아, 얼마나 근사한가. 

작품을 사랑하고, 그 사랑의 방식으로 이루어진 또 하나의 창작!


화자는 아편 중독자다. 

내러티브를 말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필통 화가인 '나'는 늘 같은 그림을 그린다. 그 그림의 기원은 알 수 없다. 

어느 날, 우연히 밖을 내다봤다가 자신이 늘 그리는 그림 속 장면을 실제로 목격하게 된다. 

소녀와 곱사등이 노인. 소녀는 그의 방에 찾아와 죽고, 그는 시체를 토막내 노인의 도움을 받아 매장한다. 

이렇게 말하면 장르적으로 이상하게 여겨질지도.

이건 어떤가. 소녀는 아내이기도 하고, 필통 화가는 노인이기도 하다. 


"내가 겁내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나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채로 내일 죽게 되는 일이다. 살아오면서 나는 추악한 입을 벌린 커다란 구덩이가 타인들과 나를 갈라놓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오직 침묵할 것, 마음속의 생각을 결코 입 밖에 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언젠가부터 시간은 내게서 멀리 물러나, 이상하게도 나와 무관한 별개의 생명체처럼 자기 스스로 살아갔다. 시간과 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엄청난 심연이 입을 벌린 채 가로놓여 있으므로 나는 내 인생의 불행한 방관자가 되어버렸다."

"한때 나였던 인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설사 내가 그를 다시 불러내서 대화를 시도해본다고 해도 우리는 서로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는 먼 과거에 내가 알던 한 사람에 불과했고, 지금 나는 그와 더 이상 아무런 공통점이 없었다."


이란에선 출판 금지되었다는데, 뭘 그렇게까지 해야했나 싶다. 묘하게 빠져드는 블랙홀 같으면서도 맥을 찾기 힘든 이 소설이, 그 문화권에선 오히려 쉽게 읽히려나.

초현실주의 속에서 잘 갖춰진 의미를 찾아낸다는 게 내겐 쉽지 않지만, 읽는 것 자체만으로도 추리소설 못지 않은 긴장감과 몰입을 불러 일으킨다. 


번역에 관해서.

배수아는 분명 번역을 적극적인(?) 활동으로 인식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소설가인 자질이 백분 발휘되는 것이겠지만 어떠한 이질감도 느낄 수 없어 마치 그녀의 작품을 보는 것만 같았다. 

낯선 배경, 이국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요소들이 계속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헤다야트 역시 여러 문학을 번역해 이란에 소개했다고 하는데.. 그녀의 창작도, 번역도, 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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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의 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8
헨릭 입센 지음, 안미란 옮김 / 민음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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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페미니즘 희곡으로 평가받는 작품, <인형의 집>.

주인공은 다람쥐와 종달새로 불리는 여자, 노라다. 


남편: 저런, 저런. 그렇다고 노래하는 종달새가 날개를 축 늘어뜨려서야 안 되지, 응? 저기 다람쥐가 기분이 상했네? 

        (지갑을 연다.) 노라, 여기 뭐가 있을 것 같아?

노라: (급히 몸을 돌린다.) 돈이요!


작정하고 곡해를 해볼까. 

대놓고 돈밝혀도 종달새에 다람쥐라니, 역시 여자는 이쁘면 만사형통이랄까.


그녀의 돈, 돈, 돈은 계속되고, 종달새 타령도 계속된다. 

"낭비꾼 새는 귀엽지. 하지만 돈이 아주 많이 들어. 이런 새를 키우는 게 남자에게 얼마나 돈이 드는 일인지."

농담처럼 말했지만, 그런 거다. 당시의 시대상. 여자의 역할. 남자의 역할. 늘 말하지만, 이런 환경에서 가련한 건 여자만이 아니다.

그런데, 과연 그 때 뿐인가.

1828년생 헨리크 입센은 종달종달종달새를 이야기하고, 1942년생 에리카 종 역시 "남편 품 안에서 어리광이나 부리는 재주 많은 어린애"라는 표현을 썼다. 2017년생은 이런 남녀상을 상상도 할 수 없겠지? (...) 없을까? 


한 때는 적나라한 사실주의 표현이었을지도 모를 대사들이, 이제는 해도 너무 낯이 간지러워 완전히 몰입하는 방식의 독서는 되지 않는다.

집중은 하되 몇걸음 떨어져 방관하듯 보게 됐다. 이 또한 의미있었다. 


"노라, 노라. 당신은 여자라 어쩔 수가 없어." 

"당신은 정말 딱한 아이야. 당신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지. (...중략...) 그래, 당신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 피가 그러니까. 그래, 그래, 노라, 이건 유전이야." 

19세기가 이렇게 오욕의 시대였다니.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돈타령하는 종달새가 되어야 했던 노라의 비밀이 밝혀진다. 

그녀는 남편이 병에 걸린 동안 그를 돌보기 위해 큰 돈을 빌렸고, 빌리는 과정에 아버지의 명의를 불법적으로 도용했다. 

힘들게 돈을 갚고 있지만, 불법을 저지른 빌미로 채권자에게 모종의 협박과 회유를 받는 중이다. 

노라는 돈을 갚기 위해 절약하고, 글을 써서 돈을 벌기도 했고, 그로 인해 즐거움을 느끼기도 했다. 

"그렇게 일을 하고 돈을 버는 건 참 즐거웠지. 내가 꼭 남자가 된 것 같았어."

하지만 그때도 딱히 깨달음을 얻지는 못했다. 


모든 일이 탄로나고 급작스럽게 해결된다. 그때, 남편의 태도를 보고 불현듯 노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그녀의 선택은 극적이다. 남편과 아이를 두고, 독립 선언을 선언한다. 

더이상 아버지의 인형으로, 남편의 인형으로 살지 않을 것을 공표한다. 

"나는 당신에게 재주를 부리는 것으로 먹고 살았던 거예요. 하지만 당신이 그렇게 원했던 거죠. 당신과 아버지는 내게 큰 잘못을 했어요. 당신들은 내가 아무것도 되지 못한데 대해 책임이 있어요."

"아니오. 행복한 적은 없었어요. 행복한 줄 알았죠. 하지만 한 번도 행복한 적은 없었어요."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책임을 들먹이며 그녀를 붙드는 남편에게, 

"그 말은 더이상 믿지 않아요. 나는 내가 우선적으로 당신과 마찬가지로 인간이라고 믿어요. 최소한, 그렇게 되려고 노력할 거예요."

"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하고 설명을 찾아야 해요."


노라의 친구 린데 부인은 조금 달라 보인다. 

어머니와 동생들을 부양한 그녀. 그 방법이 결혼이라는 것은 참 아이러니하지만, 어쨌든 종달새로 살아온 것은 아니다. 

그러나. 평범한 인간은 시대를 완전히 거부하기란 힘들다. 

남편이 없어지자 삶의 의미를 잃은 여자. 당신을 위해 일할 수 있게 해달라는, 독특한 프로포즈. 

"나는 살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해요. 내 평생, 내가 기억할 수 있는 동안은 언제나 일을 했지요. 그리고 그건 나에게 가장 큰, 유일한 기쁨이었어요. 하지만 이제 나는 혼자만 이 세상에 남았고, 너무나 공허하고 외로워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일하는 건, 그건 전혀 기쁨을 주지 않지요. 크로그스타드 씨, 내가 무언가, 누군가를 위해 일할 수 있도록 해 줘요."


아무리 극이라지만 너무 극적이어서 찡한 감동을 받긴 힘들었다.

단 하루만에 종달새에서 페미니스트로 돌변해 제 삶을 찾겠다는 여인,

어쩌면 현실이 이렇게 극적일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극이 이렇게 극적이면 한걸음 물러서게 된다. 

감정을 다 써가며 몰입하기보다는, 명확한 메시지를 건져올리는 독서가 되었다.


최초의 페미니즘 희곡이라면, 충분히 의미있지 않은가. 

그리고 오히려 한걸음 떨어져 볼 수 있기에, 지금의 첨예한 페미니즘이 불편한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이때보다 나아진 상황이니 지금의 페미니즘은 필요없다고 곡해할 이가 설마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여성해방, 나아가 인간해방을 이때부터 끊임없이 부르짖었기에 세상은 조금씩 나아졌다고 생각한다. 

멈추는 순간, 회귀할지도 모른다. 그 시대는 누구에게도 자유를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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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안규남 옮김 / 동녘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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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최상위 부자 1%가 전세계 자산의 40% 소유, 상위 10%의 부자가 전세계 부의 85% 차지, 하위 50%는 전세계 부의 겨우 1% 차지. 

카타르의 1인당 평균 소득은 짐바브웨의 그것의 428배, 전세계 최고 부자 10명의 부는 세계 5위 경제대국인 프랑스의 경제 규모와 거의 같다 등등.

전세계에 넓게 퍼진 불평등을 수치로 말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지겹게 들어서 이제 감흥조차 없을 지경. 

2007년 미국의 금융 위기 이후, 그 현상은 심화되었다. 

"재앙의 채찍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가해진 것이 아니라 집요할 정도로 선택적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부자는 더욱 부유하게, 빈자는 더욱 가난해지게 되었다. 

"오늘날 불평등은 자체의 논리와 추진력에 의해 계속 심화된다."

아이의 장래마저 사회적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 

자유시장 경제학의 기본 논리, 즉 개인의 이윤 추구가 동시에 공익을 위한 최선의 메커니즘을 제공한다는 주장은 거짓으로 밝혀졌다.

낙수 효과는 없었다.

"부자들이 더 부유해짐으로써 사회에 이바지한다는 통설은 의도적인 거짓말과 고의적인 도덕적 맹목의 조합일 뿐." 

사회적 불평등의 냉혹한 현실은, 이 경제 모델은 결국 자멸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엘리트주의가 효율적이고, 배제는 사회의 건강을 위해 필요하고, 부에 대한 욕망은 삶의 향상에 이바지하며, 절망은 불가피하다는 거짓 믿음들.

이는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굴복하는 우리의 습관이고, 집단적 빈곤이 영속화될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상황을 깰 수 있음을 저자는 주장한다.

"좋든 싫든 간에, 우리가 호모 엘리겐스homo eligens의 종 즉 선택하는 동물에 속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구조화된" 사회 환경이 선택조차 조작하고 있음을 놓치지 않지만, "말하자면 우리는 자유로울 운명을 타고 났다."

(직전에 읽은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와 대조적이다.)


현실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되었으며,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나, 대안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주시해야 할 네 가지를 제시한다. 

하나. 경제성장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길이 아니다. 

"'경제성장'은 소수에게는 부의 증가를 의미하지만, 수많은 대중에게는 사회적 지위와 자존감의 급격한 추락을 의미한다."

'경제성장'은 끔찍한 사회문제에 대한 보편적 해결책이 아니라, 오히려 그 문제들을 지속·심화시키는 원인이다. 

둘. 영구적으로 늘어나는 소비는 행복을 증진시키지 않는다. 

소비자 시장은 최근 나르시시즘의 영역을 개척했다. 상품의 획득과 소유와 향유에 연결되어 있는 행복을 제안하고 암시한다.

메시지는 간단하다. "행복에 이르는 길은 쇼핑이다."

"오늘날 우리는 모두 소비자다. 그냥 소비자가 아니라, 다른 무엇보다도 소비자이며, 권리상, 의무상 소비자다."

그 메시지를 따를 수 있는 "소비자"들은 선천적이거나 노력해서 얻은 우월감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라 생각하고, 그렇지 못한 소비자는 굴욕감을 느낀다. 

약자들은 스스로에게 사회적 열등을 선고하고, 불평등은 지속된다.

셋. 불평등은 자연적이지 않다. 

오늘날 불평등은 마치 노예제가 그때에는 자연스러웠던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사람들은 불평등 그 자체의 부정의함에 주목하지 않고, 조금 더 열악해지는 상황만을 개선시키려고 한다. 이는 결국 익숙한 질서에 대한 옹호가 된다. 사회적 불평등이 정의롭지 못함을 깨달아야 한다. 

넷. 경쟁이 사회 정의에 필요충분조건인 것은 아니다. 소비자 사회는 모든 관계를 고객-상품, 사용자-유용성 패턴으로 만들었다. 인간적 유대는 취약해지고, 정신적 불안과 불행이 초래된다. 세계는 신뢰와 연대, 호의적 협력, 상호 의존과 충성, 상호부조, 사심 없는 협력, 우정 등의 가치에 대해 재고해봐야 한다. 


저자는 상황이 절망적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고, 이로서 현실의 변화 가능성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계에 대한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비합리적인 행위이다. 하지만 결정에 대한 책임과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모두 감수하면서까지 세계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는 것이야말로 세계의 논리가 초래하는 맹목으로부터, 타자와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결과로부터 세계의 논리를 구원할 마지막 기회다." 


그 어떤 것보다, 불평등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에 방점을 찍고 싶다.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한대도 인간은 또 불평등을 만들겠지만, 아이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불평등으로 사방팔방 막혀 있는 것은 결코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

답은 복지다, 라는 말로는 부족하게 느껴진다. 복지는 소극적으로 느껴진다. 약자들의 연대라, 어떤 방법이 있을까. 협동 조합이 생각나고, 멍청한 소비자가 되지 않기 위한 발악은 계속해야 겠다는 다짐 한 번 더. 또 뭐가 있을까.

마지막으로, 작가의 경고를 옮겨본다. 

"위기가 도래했을 때, 경고를 들은 적이 없다고 말하지 마시라. 필자나 독자,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최선은 아직 우리에게 힘을 합쳐 위기를 막을 능력이 남아 있을 때 위기가 구체화되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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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의 나르시시스트 - 집, 사무실, 침실, 우리 주변에 숨어 있는 괴물 이해하기
제프리 클루거 지음, 구계원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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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장부터 도널드 트럼프를 까는데 장난아니다. 

그의 사진 촬영 포즈를 빗대 "유인원이 건강함과 생식기를 자랑하는 모습이나 다를 바 없다"고 까지.

한국이라면 블랙리스트 맨 첫줄 당첨! 아니, 출판도 안되려나. 


"모든 사람이 특별하다면 사실 아무도 특별하지 않은 것"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특별하다 생각한다. 

저자는 이것이 아이들의 선천적 성향이라고 말한다. 그 순진한 자신감이 엄청난 자만심으로 발전할 때가 문제.

미국인들이 자기애에 빠져들게 된 시점을 콕 짚을 순 없다고 말하면서도, 저자는 2006년쯤으로 추산한다.

타임지가 올해의 인물로 "당신"을 선택했던 그 때. 

(당시 타임지 표지에는 반사되는 필름을 부착해 기사 취지에 맞게 손거울 역할을 하도록 했다는데, 이 책의 표지도 그걸 따라한 듯.)


진짜로 자기애성 성격장애를 가진 사람은 일반 대중의 1퍼센트에 불과하며, 정상적인 범위 내의 성격을 오해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책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자기애성 장애는 과장된 자의식, 충족시킬 수 없는 존경에 대한 갈증, 타인이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에 대한 전면적일 정도의 무지라는 세 가지 증상이 위험하게 결합된 형태이며, 공감 능력의 결여도 그 특징이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파악하지 못하고, 피해를 주고도 타인이 좋지 않은 감정을 느끼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 

인정, 관심, 영광, 보상에 대한 채울 수 없는 욕구에 시달리고, 자신이 주목받지 못하면 위축되고 분노를 느낀다.


성격장애(편집성, 경계선, 연극성, 반사회성, 의존성, 회피성, 강박성, 분열성, 분열형, 자기애성)는 다른 불안 증상과 다르다.

전자는 자아 친화적, 후자는 자아 비친화적이어서, 불안 증상이 있는 사람은 자신이 느끼는 불안이 심리적 문제라고 생각하며 변화하고 싶은 마음으로 병원을 찾지만, 성격장애를 지닌 사람은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도, 고쳐야 할 필요성도 인지하지 못한다.


진화의 관점에서 아기들은 생존을 위하여 이기적 나르시시스트가 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관건은, 성장하며 변하느냐, 변하지 않느냐, 그것이 문제.


유전적 요인에 대해선 이견이 많고, 다음으로 주목하는 것은 양육이다.

가면 모델에 의하면, 나르시시스트는 오히려 자신이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혐오스럽다고 생각해서, 그 감정을 감추기 위해 자기애적인 행동을 취한다고 한다. 부서진 자부심은 선천적이라기보다 고통스럽게 학습한 것이며 영구히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이것을 부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오히려 그들이 너무 많은 칭찬과 박수를 받으며 자라서, 그들의 특권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을 접하면 놀라게 되는 것이라고. 

또한 부모의 이율배반적인 태도(칭찬은 많이, 사랑은 적게) 때문에 특권의식과 가면 모델 보상 심리를 모두 드러내는 경우도 있다.

다양한 양육방식은 이전부터 쭉 있어왔으나, 더해가는 아동 보호 및 개인에게 보다 집중하는 문화 확산으로 나르시시스트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고 분석한다. 


관계의 초기 영역에서 그들은 어디서든 환영받는다. 그들의 거부할 수 없는 매력, 유머 감각, 활기.

효과적인 인상 관리에 필요한 네 가지 자질(자기 홍보, 아첨, 애원, 위협)은 그들의 기본 보유 능력.

그러나 이기주의, 자기중심주의, 무신경함이 드러나는 인내 영역으로 들어가면, 문제가 발생한다.   

직장에서 그들은 포기보다 속임수를 택하고, 요란한 성공만큼이나 요란한 몰락을 맞이하기도 한다.

나르시시스트의 오만함, 속임수, 과시욕, 다른 사람의 공로 부정, 자기 고양적 편향(책임 회피) 등은 몰락으로 가는 요소가 된다.

이 성향은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되기까지 하므로 집단에서 더 위험하다. 

이들을 잘 활용할 수도 있다. 적당한 칭찬과 새로운 업무 부여로, 그들은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결국 거짓 인상은 들통나고, 상사들도 그들의 성향을 배려하는데 진절머리를 낸다고. 안타깝다.


나르시시스트의 탐욕, 쾌락주의, 자존감, 공감 능력 부족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연애의 세계다. 

매력적인 첫인상을 주는 나르시시스트는, 시간이 지날수록 본색을 드러낸다. 연인의 감정을 인지하지 못한다. 관심도 없다. 

자신을 추켜세우기 위한 거짓말을 하고, 늘 더 나은 짝을 찾고 싶어 한다. 

그들의 짝이 되려면, 경제력, 외모, 권력 등 즉시 눈에 띄거나 수치로 산정할 수 있는 가치를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가면 모델은 그들의 강박적 유혹이 오히려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공포에 의한 것이며, 자기 혐오적 행동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타인에게 거부당하면 누구나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지만, 나르시시스트의 경우는 정도가 심하다. 그것이 부당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들이 갈망하는 칭찬과 격려를 해주는 경우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도 있고, 극히 일부지만 스스로 행동을 바꾸고자 하기도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체로는 파국이라고. 


나르시시스트를 통렬하게 분석해 야박하게 느껴지기까지 하지만, 긍정적 요소를 찾을 수 있기도 하다.

그 성향 덕분에 대통령과 같은 무시무시한 권력도 탐할 수 있게 된달까.


나르시시스트의 범주를 확대해 적용하면, "집단의 자부심"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것의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형태는 홀로코스트나 전쟁 시 민간인 학살 등. 

집단학살을 할 정도의 상태에 도달하려면 다른 집단에 대한 비인간화, 혐오감 형성, 극도의 공포나 분노 형성이라는 3단계를 거친다.

그 외 "사형수와 할리우드 스타" 꼭지도 있다. 


저자가 후기에서 주는 "유용한 교훈"은 이렇다. 

주변의 나르시시스트건, 자기 안의 나르시시스트건, "두 경우 모두 징후에 촉각을 곤두세우면 큰 도움이 된다."

나이든, 남이든, 나르시시스트를 발견한다면,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경계하며 통제하는 방법을 배운다는 것은, 살아가는 지혜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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