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부엉이
사데크 헤다야트 지음, 배수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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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케트의 <몰로이>와 배수아의 <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를 떠올렸다. 

초현실주의. 내러티브를 찾기 힘든 구성. 이야기 된 것들이 계속해서 부정되고, 내가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이 나이기도 한 상황 등. 

이 책의 역자이기도 한 배수아의 <알려지지..>는, 이 책에 대한 오마주라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아, 얼마나 근사한가. 

작품을 사랑하고, 그 사랑의 방식으로 이루어진 또 하나의 창작!


화자는 아편 중독자다. 

내러티브를 말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필통 화가인 '나'는 늘 같은 그림을 그린다. 그 그림의 기원은 알 수 없다. 

어느 날, 우연히 밖을 내다봤다가 자신이 늘 그리는 그림 속 장면을 실제로 목격하게 된다. 

소녀와 곱사등이 노인. 소녀는 그의 방에 찾아와 죽고, 그는 시체를 토막내 노인의 도움을 받아 매장한다. 

이렇게 말하면 장르적으로 이상하게 여겨질지도.

이건 어떤가. 소녀는 아내이기도 하고, 필통 화가는 노인이기도 하다. 


"내가 겁내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나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채로 내일 죽게 되는 일이다. 살아오면서 나는 추악한 입을 벌린 커다란 구덩이가 타인들과 나를 갈라놓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오직 침묵할 것, 마음속의 생각을 결코 입 밖에 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언젠가부터 시간은 내게서 멀리 물러나, 이상하게도 나와 무관한 별개의 생명체처럼 자기 스스로 살아갔다. 시간과 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엄청난 심연이 입을 벌린 채 가로놓여 있으므로 나는 내 인생의 불행한 방관자가 되어버렸다."

"한때 나였던 인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설사 내가 그를 다시 불러내서 대화를 시도해본다고 해도 우리는 서로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는 먼 과거에 내가 알던 한 사람에 불과했고, 지금 나는 그와 더 이상 아무런 공통점이 없었다."


이란에선 출판 금지되었다는데, 뭘 그렇게까지 해야했나 싶다. 묘하게 빠져드는 블랙홀 같으면서도 맥을 찾기 힘든 이 소설이, 그 문화권에선 오히려 쉽게 읽히려나.

초현실주의 속에서 잘 갖춰진 의미를 찾아낸다는 게 내겐 쉽지 않지만, 읽는 것 자체만으로도 추리소설 못지 않은 긴장감과 몰입을 불러 일으킨다. 


번역에 관해서.

배수아는 분명 번역을 적극적인(?) 활동으로 인식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소설가인 자질이 백분 발휘되는 것이겠지만 어떠한 이질감도 느낄 수 없어 마치 그녀의 작품을 보는 것만 같았다. 

낯선 배경, 이국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요소들이 계속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헤다야트 역시 여러 문학을 번역해 이란에 소개했다고 하는데.. 그녀의 창작도, 번역도, 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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