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알드 달 지음, 정영목 옮김 / 강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철학자 야스퍼스도 "인간은 알 수 없는 심연"이라 했단다. 

그런 인간을, 내가 알 턱이 있나.

야스퍼스의 말까지 빌리지 않아도, 철학까지 안해도, 우리 모두가 안다. 거참, 사람이란 알 수 없어라. 

잘 안다고 생각했던 이에게 놀라기도 하고, 나의 반복되는 고통이 저 사람 때문인 것 같은데, 나를 괴롭혀서 저사람이라고 득될 것은 없는 것 같은데, 오히려 함께 힘들 뿐인데, 대체 저이는 왜 그러는 것일까, 혹시 괴롭히는 게 목적인걸까, 아냐 그럴리는 없어, 악한 사람은 아냐, 그렇다면, 그렇다면 정말 뭘까 하며.. 

뭐 이렇게 복잡한 게 인간사.

인간이란 원래 알 수 없는 와중에, 유독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은 내게 재기발랄함이 아닌 섬뜩함이고, 공포다.

가까이 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따지고보면.. 누가 누굴 탓하랴. 

로알드 달의 단편집을 보며, 처음엔 분명 입꼬리를 올리며 즐겁게 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다.

인간이란. 

오 헨리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반전과 명랑함이 가득하면서도 (짧은 내 소견이지만) 깊이는 그 이상이다. 


1. 목사의 기쁨 - 순진한 시골 사람들을 속여 헐값에 골동품을 사고, 이를 되팔아 폭리를 취하는 골동품 매매상이 나온다. 

또 한 건의, 일생일대의 큰 건이 성공하려는 찰나. 제 꾀에 당하고 만다. 조각나는 골동품, 부서지는 그의 꿈이여!

: 자네 이제 그거 사야 돼 ㅋㅋ 


2. 손님 - 결벽에 가까운 위생관념을 가진, 지성과 교양 넘치는, 그러나 천박한 바람둥이 남자. 우연한 기회에 훌륭한 성에 초대받는다. 그날 밤을 함께 한 그녀는 누구인가. 

:미안해요, 쌤통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럼 안되는 거였잖아요. 

쌤통이라 생각하는 동시에, 내 안의 사악함도 확인하고. 영화 <데쓰 프루프>를 볼 때의 당혹감.


3. 맛 - 포도주의 맛을 분별하라! 상금은 집주인의 딸. 유치한 잔재주를 부리던 남자, 하녀에게 당하다. 


4. 항해거리 - 항해거리를 건 내기. 내기에서 이기기 위해 바다에 뛰어드는 남자. 나름대로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자신을 구해줄 여성을 확인했으나.. 그녀는 관심없다.


5. 빅스비 부인과 대령의 외투 - 내연의 관계의 남자(대령)에게서 받은 마지막 선물, 최고급 밍크 외투. 남편을 속여 고가의 그 물건을 집으로 가져오기 위해 간교한 속임수를 창조하는 부인. 그러나 제 꾀에 제가 걸리고 말고. 그 선물의 주인은.. 

: 유유상종.


6. 남쪽 남자 - (고작) 라이터의 성능을 놓고 내기가 벌어진다. 왼쪽 손가락을 건 젊은 남자 VS 고급 차를 건 늙은 남자. (다행히) 내기는 중단된다. 아아, 그녀의 손가락이란.

: 거참 병일세. 인류의 평생동안 가져갈. 


7. 정복왕 에드워드 - 음악을 아는 고양이를 발견한 여자는, 고양이가 음악가 '리스트'의 환생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남편은 이를 시답잖게 여기고 저녁식사를 기다릴 뿐. 리스트(?)의 운명은. 


8. 하늘로 가는 길 - 강박적으로 시간을 딱 맞춰야만 직성이 풀리는 포스터 부인. 그 한가지 빼고는 아내로서 더없이 완벽한 그녀를, 골리듯 평생 애태워온 남편. 그녀의 여행을 또 다시 방해하던 그 순간. 그녀의 선택은. 

: 슬금슬금 다가오던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나의 질문은 이때 최고조에 올랐다. 로알드 달의 이야기는 단지 우스개소리로 끝나지 않는다.  


9. 피부 - 등에 문신으로 아내의 그림을 새긴 남자. 문신을 새겼던 무명의 화가는 시간이 흘러 유명해진다. 가난한 노인이 된 문신을 가진 남자는, 등에 새겨진 문신으로 한탕 벌 생각을 하고, 사람들은 이에 관심을 가진다. 등에 새겨진 그림은 어떻게 사고 팔 것인가. 

: ㅠㅠ 


10. 도살장으로 끌고 가는 어린 양 - 남편의 결정이 무엇이었는지는 명확하게 나오지 않지만, 임신 6개월의 아내를 충분히도 자극했을 것임은 의심없이 짐작할 수 있다. 아내의 복수. 

: 통쾌함을 느끼는 자, 모두 유죄. ㅠㅠ


책의 말미에 수록된 역자 정영목의 글 역시, 책에 품위를 더한다. 심리 에너지의 전문가라며 달을 칭송하는 그의 글은 압권이다.

그의 명문에 백분 동의하며, 역자 정영목 역시, 글을 쓰지 않고는 버틸 수 없었으리라, 예상해 본다. 훌륭하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행복한 이기주의자
웨인 W. 다이어 지음, 오현정 옮김 / 21세기북스 / 201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책 표지 문구, 

"나의 가치는 다른 사람에 의해 검증될 수 없다. 내가 소중한 이유는 내가 그렇다고 믿기 때문이다."

뒷표지에는, 

"그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내가 꽃이 되었을까? 

 아니다. 난 그에게로 가기 전에 이미 꽃이었다. 매우 행복한 꽃이었다." 


"행복한 이기주의자의 10계명은 다음과 같다. 

01. 남보다 먼저 자신을 사랑하라

02.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말라

03. 자신에게 붙어 있는 꼬리표를 뗴라

04. 자책과 걱정은 버려라

05. 미지의 세계를 즐겨라

06. 의무에 끌려다니지 말라

07. 정의의 덫을 피하라

08. 결코 뒤로 미루지 말라

09.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말라

10. 화에 휩쓸리지 말라


제1장은 "내 인생은 내가 지휘한다"로 시작한다. 

생각과 감정은 통제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내 감정에 대한 책임 역시 나에게 있다. 

생각을 바꾼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내 마음 속에 불행을 만들어내는 생각 따위 모두 없애버리겠다는 단단한 결심이 필요하다.

존재하는 것은 지금 이 순간뿐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현재를 깎아내리는 문화(미래에 대비하라, 내일을 생각하라, 은퇴를 준비하라..)는 결국 영원히 행복을 피해다니는 태도다. 

나는 선택할 수 있고, 온전히 나의 것인 현재의 순간들을 즐겨야 한다. 현재는 나의 것이다. 


나머지 장은 전술한 십계명을 설명하고, 마지막 제12장은 책의 목표인 "행복한 이기주의자"를 간략하게 말한다. 


학교와 사회 등은 남의 눈치를 보도록 만들고, 우리는 자신의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 이런 문화를 따르기도 한다. 

자신에게 붙은 꼬리표에 안주하는 것 역시, 현실을 회피하게 만들고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얻게 한다.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자책감과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 역시 현재에 충실하지 않게 만든다. 

책은 위의 행동들의 이유와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한 전략들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새로운 경험에 마음을 열어야 하며, 외적인 안전의 덫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나친 완벽주의 또한 불필요하게 발을 묶을 뿐이다. 

의무 또한 마찬가지. 관습의 장벽을 깨고,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평가하고 자신을 신뢰하면서 그때그때 결정내려야 한다. 

또한 단 하나의 정의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하여 완성되는 행복한 이기주의자. 


옮긴이의 말에 의하면, 이 책은 20년전에 출간됐으나 지금(한국 출판 2006년)도 인기를 누리는 스테디셀러라고 한다. 

당시 이 책은 획기적이었으며, 많은 자기계발서 출간의 물꼬가 되었다고. 

모두가 완벽하게 따라갈 수는 없겠지만, 행복으로 가는 하나의 팁을 전달받을 수 있음은 분명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선셋 리미티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처음 접한 코맥 매카시의 소설은 조금의 실망감도 주지 않았다. 


"선셋 리미티드"라는 이름의 급행열차에 몸을 던져 자살하려고 한 백인 교수와 그를 구해낸 흑인 (아마도) 목사. 

딱 그 둘의 대화로 이루어지는 소설이다.

핑퐁핑퐁, 쉴틈없이 오가는 대화의 향연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무신론자와 신앙인의 논쟁은 내게 한없이 무의미해 보인다. 그건 이론적 지식과도 무관한 영역이 아닐까. 

교양있는 신앙인이 상대적으로 교양 부족한 무신론자와의 언쟁에서 무참히 패배하는 것을 보았고 - 신에 대한 무신론자의 막말 앞에 고매한 신앙인은 버틸 수 없었다 -

딱히 교양 넘친다고 하긴 힘든 신앙인과 무신론자와의 다툼에서, 신앙인이 승리하는 것을 본 적도 있다. - 사후 세계에 대한 신앙인의 자신감 앞에서 겁먹은 무신론자는 한없이 위축되었다. 그러고보니 완전한 무신론자는 아니었던 듯 -


책으로 돌아가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흑인은 나름의 방식대로 백인을 구하려 하고, 백인은 이를 거부한다. 

(책에서 대화의 주체는 흑, 백으로 표기된다.)

"백: 왜 댁 같은 사람들은 세상에 하느님의 존재를 믿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까요?"

"백: 나는 하느님한테 사랑받고 싶지 않은데요."

"백: 신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겐 그만큼 어떤 결핍이 있는 거겠지요. 나 같은 사람은 그렇게 생각한다는 걸 댁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더이상 아무것도 나아질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백인, 그의 말들이 눈에 꽂힌다.

"백: 알았습니다. 세상은 기본적으로 강제노동수용소이고, 이 수용소의 노동자들, 순진해빠진 노동자들은 제비뽑기로 매일 몇 명씩 끌려가 처형을 당한다는 겁니다. 내가 세상을 그렇게 보는 게 아닙니다. 세상이 실제로 그렇게 돌아간다고 생각합니다. 대안적 견해들이 있느냐? 물론 있지요. 하지만 그 가운데 철저한 검토를 버텨낼 관점이 있느냐? 없습니다."


"백: 자, 세상을 한 줄 한 줄 포기해나갑니다. 초연하게. 그러다 어느 날 자신의 용기가 시시껄렁하다는 걸 깨닫습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말입니다. 자신을 말살하는 일에 스스로 공범자가 된 셈인데 달리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지요.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이 앞쪽 어딘가에 있는 문을 닫아버리게 됩니다. 그러다 마침내 문이 딱 하나만 남게 되는 거지요."


"백: 나는 내 정신상태가 어떤 염세적 세계관의 결과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게 세계 자체라고 생각해요. 진화의 결과, 지능을 가진 생명은 어쩔 수 없이 궁극적으로 다른 무엇보다도 이것 한 가지를 깨닫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무용성입니다."


"백: 사람들이 세상을 진실로 있는 그대로 본다면. 자신의 삶을 진실로 있는 그대로 본다면. 꿈이나 환상 없이 본다면. 나는 사람들이 가능한 한 빨리 죽는 쪽을 선택하지 않을 이유를 하나도 대지 못할 거라고 믿습니다."


"백: 댁이 말하는 유대라는 건 고통의 유대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 사람들 마음에서 죽음의 공포를 몰아내주기만 한다면 사람들은 하루도 더 살지 않을 겁니다. 다음 악몽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면 누가 이 악몽을 원하겠어요? 모든 기쁨 위에는 도끼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모든 길은 죽음으로 끝나요. 아니면 더 나쁜 것으로. 모든 우정도 모든 사랑도. 고문, 배반, 상실, 고난, 고통, 노화, 모욕, 무시무시하게 집요한 병. 이 모든 것이 단 하나의 결말에 이릅니다. 


"백: 댁은 내가 하느님의 사랑을 원한다고 하지요. 하지만 나는 원하지 않습니다. 혹시 용서는 원할지도 모르겠지만 용서를 구할 상대가 없네요. 되돌아가는 건 불가능합니다. 바로잡는 것도 불가능해요. 전에는 어쩌면 가능했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지금은 무(無)의 희망밖에 없습니다. 나는 그 희망에 매달리고 있고요. 자 이제 문을 열어주세요. 부탁합니다."


백인은 나간다. 그가 다시 어디로 향할지는 뻔하다. 

흑인은 절망한다. 

"흑: 저 사람 말은 진심이 아니었어요. 당신도 그게 진심이 아니란 걸 아시잖아요. 당신도 그게 진심이 아니란 걸 아시잖습니까. 당신이 왜 나를 거기 내려보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해를 못하겠어요. 내가 저 사람을 돕기를 원하셨다면 왜 나한테 할말을 주시지 않은 겁니까? 저 사람한테는 할말을 주셔놓고. 나더러 어쩌란 말입니까?"


쉽게 읽히면서도, 책은 꽤 철학적이다. 단번에 팬(!)이 되게 만드는 작가다. 


의도치 않게, 내가 옮긴 것은 거의 백인의 말뿐이다. 그렇다. 나는 자살을 기도하는 저 백인에게 구구절절 동의한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삶에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려나.

사실은 정반대다. 오히려 -용감무쌍하게도- 똑똑한 저 염세론자를 비웃고 있다.

세상이 그렇다하여, 뭐 어쩌란 말인가.

우리는 모두 개체로서의 삶을 살 뿐 아니던가. 

생각은 고매하되, 우리는 각자 주어진 대로, 생겨먹은대로 살아보는 것 아니겠나.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 는 말은 사양한다. 저쪽이 나을지도. 누가 아나. 

다만, 모든 것을 알고자 하는 것도 인간의 일이지만, 모르면 모르는대로 감각으로 맛보며 즐기는 것도 인간의 일 아니겠나, 하는 것. 

나 지금 뭐래니. 아쭈, 철학하시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직도 가야 할 길 아직도 가야 할 길
M.스캇 펙 지음, 최미양 옮김 / 율리시즈 / 201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들은 자신이나 가족, 자신이 속한 집단만이 유독 고통스런 문제에 직면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삶은 원래 고해(苦海)인 법. 

이 사실을 수용하는 것이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시작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정신과 환자의 대개는 노이로제(신경증) 아니면 성격장애로 고생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이들은 책임지는 것에 대해 서로 상반되는 병적장애를 지녔다. 신경증 환자는 너무 책임지려하고, 성격장애자는 책임을 회피한다. 

신경증 환자는 세상과의 갈등이 자신의 잘못이라 생각하고, 성격장애 사람은 세상이 잘못됐다고 치부한다. 

전자는 자신을 열등한 존재, 수준미달로 비하하고, 후자는 스스로에게 선택권이 없었다고 받아들인다. 

신경증은 성격장애에 비해 쉽게 치료된다. 그들은 어려움을 책임지려하고 스스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격장애는 보다 다루기 어렵다. 자신이 아닌 세상이 변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어느 정도의 신경증이나 성격장애는 피할 수 없다. 자기자신을 스스로 돌이켜보고 반성하는 습관이 필요하다.


때로 우리는 자유에 대한 고통을 피하고자 하며, 삶이나 문제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자 한다. 

건강한 성인은 생활 전체가 개인의 선택과 결정의 연속이라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이를 수용하지 못하면 영원히 스스로를 희생자라고 생각할 것이다. 


저자는 '사랑'을 "자기 자신이나 혹은 타인의 정신적 성장을 도와줄 목적으로 자기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지"로 정의한다. 

진정한 의미의 사랑은 우리의 정신적 발달에 꼭 필요하나, 의존성이나 애완동물과의 관계와 같은 종속적 관계는 사랑이 아님을 강조한다. 

사랑은 자신의 변화를 의미하지만, 자기 희생이기보다는 자기 확대가 되어야만 한다. 

진정한 사랑을 해내려면 완전한 자기 인식이 필요하다.  

또한, 우리의 사랑으로 인해 서로의 정신적 성장을 이룰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선택해야만 한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와 나의 개별성을 존중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 많은 정신질환과 불필요한 고통의 원인이 된다.

진정 사랑하는 관계는 그 어떤 관계더라도 상호간의 정신치료적 관계다. 

보통의 사람들도 순수한 사랑만 할 수 있다면, 전문적 훈련 없이도 정신치료에 성공할 수 있다고 저자는 주장하고 있다. 


진정한 사랑은 상호간의 정신치료적 관계라는 말이 인상적이고, 사랑을 자기 확대로 보는 것도 곱씹을만하다. 

어쩌면 당연한 말들을, 우리는 간혹 잊기도 하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리고 죽음 열린책들 세계문학 49
짐 크레이스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50대의 부부, 조지프와 셀리스가 바닷가의 인적이 드문 곳에서 알몸의 시신으로 함께 발견된다. 

스산하기는 해도, 낭만적인(!) 상상을 잠시쯤 할 수도 있으련만, 그럴 틈은 그닥 주어지지 않는다. 


시신이 부패되어 가는 과정이 자세히도 묘사될 땐 메리 로취의 <스티프>를 보는 듯했다. 

살아날 가망이 없는데 잠시 혼수 상태에서 깨어나 죽음을 실감하는 조지프의 모습은 한층 더 절망적이다. 

죽음은 미화되지 않는다. 

"그들의 인격은 피처럼 흘러나와 풀밭에 쏟아졌다. 세상은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들은 살이었고, 우리는 살이다. 따라서 우리는 고기일 뿐이다."


그들은 소지품을 노리는 노상강도에게 살해당했다.

안정적이고 유복한 생활을 영위하던 동물학자 부부가, 사냥하듯 약탈을 즐기는 인간에 의해 한순간에 운명을 달리한 것이다.

"자연을 연구하는 사람은 누구나 폭력에 익숙해져야" 한다던 셀리스의 강의는 의미심장하다. 이런 폭력이 아니었음은 분명함에도.

견고해보이는, 좋게 말해도 나쁘게 말해도 어떤 변화도 좀처럼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상이, 막되먹은 양아치 한 명 때문에 한 순간에 와르르 무너지는 것은 허무하고, 참담하다. 

그러나.. 이 허망함도 큰 그림으로 보자면 자연의 섭리일 뿐. 

"과학자와 설교자가 생명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하는 것은 단지 생명이 아무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생명은 복제되고 분해되기 위해 존재할 뿐, 분명 아무 의미도 없다. 가혹한 진실."

"동물학자들은 자신들의 주문을 갖고 있었다. 변화는 유일한 상수다. 우주에서 안정되거나 불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소멸과 성장은 동의어다."

"톡토기가 살아남지 못했다면, 무엇 때문에 그들이 살아남아야 하는가?"


살해당하기 전을 거슬로 올라가면, 낭만적인 구석을 찾을 수 있을까. 

이야기는 담담하고 건조하게 죽음 직전의 시간과 그들의 삶을 반추한다. 

조지프에겐 그들의 첫 섹스 장소로 돌아가 다시 그 일을 실행하고 싶다는 나름의 낭만적(!)인 계획이 있었던 게 분명하지만,

이 또한 씁쓸하다.

셀리스는 "이만큼 나이를 먹으면 상대의 감정을 해치는 것보다 양보하는 편이 나"으므로, "체념하는 기분으로" 남편의 요구를 받아들여 그곳으로 향했을 뿐이며, 그들의 계획은 한편의 희극처럼 우습게 끝나버린 와중에, 꽝! 살인자의 화강암이 내리쳐진 것이다.


조지프의 그 장소 선택 또한 사뭇 잔인한 구석이 있다. 이런 동상이몽.

30년 전, 연수원이 있던 그곳에서 그들은 화재로 한 동료를 잃었다. 늙어볼 기회조차 박탈당한 페스타. 

셀리스는 자신이 불 위에 올려둔 냄비나 무심하게 방치한 담배 한 개비가 그녀를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죄의식에 사로잡혀왔다.

그녀는 경찰관과 죽은 페스타의 부모에게도 되풀이해서 그 사실을 고백했다. 

셀리스는 그녀를 만류하던 "조지프의 손끝을 평생동안 증오했다."

그녀는 그 장소를 찾아가려는 열의에 불타오른 남편을 이해할 수 없다. 


셀리스는 동료 교수의 자살을 보며 어쩌면 그 죽음이 더 낫다고 생각했었다. 

"노화를 통해 아주 조금씩 죽어가는 것"보다는 자살이 낫다고. 자살은 그를 노년에서 구해주었으니 신(新)진화론적이라고.

조지프의 생각은 어떨까. 그는 늙어 통증에 시달리는 노인이 되는 악몽을 꾸곤 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바람에 가깝다는 아이러니. 바로 그 나이듦. "그는 꿈속에서 가장 음울한 소망을 실현한 셈이다."

시신을 직접 만지고 처리하는 경찰관들에게 그들의 죽음은 월급에 비해 수지가 맞지 않는 불쾌한 일일 뿐이다. 

"희망이 화수분처럼 솟아나"는 자연계에서는, 그들의 죽음이 아무것도 아니다. 풀잎은 다시 일어서고, 겨우 아흐레만에, 살인 사건 현장에 "뿌려진 생명과 사랑의 흔적들은 모두 사라졌다. 자연계가 홍수처럼 되돌아왔다. 우주의 화려함이 되돌아왔다. 모래 언덕에 잠시 머문 조지프와 셀리스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흙 속에 남아 있다 해도, 그것은 풀의 활기 찬 속삭임을 북돋워 줄 뿐이다."


그리하여, 죽음은 한낱 자연의 섭리일 뿐일까, 일일이 신경쓸 필요도 없는. 글쎄.   

이야기의 한 축으로 등장하는 그들의 딸 실비가 있다. 

부모로부터 도망쳐 "내키는 대로 교양없이 살아가는 자유"를 힘들게 쟁취했던 그녀, 부모의 실종 소식이 성가시다.

시신을 확인하기 직전 그녀가 느낀 안도감. 그러나, 물론 즐거움이 아니다. 

"어떤 것도 이보다 더 나쁠 수는 없"으므로. "그래서 이제는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으므로. "세상에서 가장 나쁜 일이 위안이 되"는 아이러니. 

실비가 목격한, 어머니의 발목에 닿아있는 아버지의 손가락은 실비의 가슴에 사랑을 채운다. 

실비는 짧은 인생이 줄어드는 가운데, 남은 날을 낭비하지 않을 것을 결심한다. 

"부모의 죽음은 그녀의 시작이었다."

"이제 내가 할 수 없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내가 생각할 수 없거나 말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실비는 계획을 세울 것이다. 화려한 날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죽음이 자연의 일일 뿐이라는 것은, 개개인에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뭐 어떻단 말인가? 

이기적 유전자의 열일이건 뭐건 간에, 살아남은 자들의 인생을 뒤흔드는 일일 뿐.

그러니 나의 사후 장기기증보다, 내 가족의 장기기증이 더 말하기 힘들다. 일단 생각하기가 싫으니까. 

짤막하게 실린 작가의 말에 의하면, 스스로 무신론자임에도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견딜 수 없는 공허감을 느꼈다고 한다. 작가의 집필 배경 중 일부를 옮긴다. 

"죽음의 진실은 받아들이기 어려울 만큼 가혹하다. 그 가혹한 진실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구원은 무엇인가? 인생 자체는 아름답고 사랑에 넘치고 초월적인 순간으로 가득 차 있다는 데에서 우리는 구원을 얻는다. 존재하지 않는 영원에 자신을 파묻지 않고, 인생을 최대한 살아간다. 영원은 없어도 우리는 사랑과 기억과 경험을 세상에 남기고 죽어간다. 그것은 날마다 빛이 바래 가지만, 짧은 동안이나마 우리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고 사랑을 받는다.

 이 작품은 또 하나의 거짓된 구원일지도 모른다. (...중략...) 무신론자가 과학과 자연계에서 초월성을 추구하면 새로운 세기로 가는 새로운 타입의 신비주의자가 될 수 있다."


실비가 찬장에서 아버지가 모아둔 자신의 젖니 열아홉개를 찾는 장면은 다소 감상적으로 느껴지기도 했지만, 먹먹하도록 훌륭한 작품이었다.

배변활동 때문에 먹는 것에 신경쓰는 것 또한 우리네 일상 아니겠나. 죽음으로 삶을 생각하는 것은 당연지사. 

자연의 섭리건 말건, 나는 나와 내 곁의 당신들의 삶이 소중할 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