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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셋 리미티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월
평점 :
처음 접한 코맥 매카시의 소설은 조금의 실망감도 주지 않았다.
"선셋 리미티드"라는 이름의 급행열차에 몸을 던져 자살하려고 한 백인 교수와 그를 구해낸 흑인 (아마도) 목사.
딱 그 둘의 대화로 이루어지는 소설이다.
핑퐁핑퐁, 쉴틈없이 오가는 대화의 향연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무신론자와 신앙인의 논쟁은 내게 한없이 무의미해 보인다. 그건 이론적 지식과도 무관한 영역이 아닐까.
교양있는 신앙인이 상대적으로 교양 부족한 무신론자와의 언쟁에서 무참히 패배하는 것을 보았고 - 신에 대한 무신론자의 막말 앞에 고매한 신앙인은 버틸 수 없었다 -
딱히 교양 넘친다고 하긴 힘든 신앙인과 무신론자와의 다툼에서, 신앙인이 승리하는 것을 본 적도 있다. - 사후 세계에 대한 신앙인의 자신감 앞에서 겁먹은 무신론자는 한없이 위축되었다. 그러고보니 완전한 무신론자는 아니었던 듯 -
책으로 돌아가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흑인은 나름의 방식대로 백인을 구하려 하고, 백인은 이를 거부한다.
(책에서 대화의 주체는 흑, 백으로 표기된다.)
"백: 왜 댁 같은 사람들은 세상에 하느님의 존재를 믿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까요?"
"백: 나는 하느님한테 사랑받고 싶지 않은데요."
"백: 신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겐 그만큼 어떤 결핍이 있는 거겠지요. 나 같은 사람은 그렇게 생각한다는 걸 댁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더이상 아무것도 나아질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백인, 그의 말들이 눈에 꽂힌다.
"백: 알았습니다. 세상은 기본적으로 강제노동수용소이고, 이 수용소의 노동자들, 순진해빠진 노동자들은 제비뽑기로 매일 몇 명씩 끌려가 처형을 당한다는 겁니다. 내가 세상을 그렇게 보는 게 아닙니다. 세상이 실제로 그렇게 돌아간다고 생각합니다. 대안적 견해들이 있느냐? 물론 있지요. 하지만 그 가운데 철저한 검토를 버텨낼 관점이 있느냐? 없습니다."
"백: 자, 세상을 한 줄 한 줄 포기해나갑니다. 초연하게. 그러다 어느 날 자신의 용기가 시시껄렁하다는 걸 깨닫습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말입니다. 자신을 말살하는 일에 스스로 공범자가 된 셈인데 달리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지요.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이 앞쪽 어딘가에 있는 문을 닫아버리게 됩니다. 그러다 마침내 문이 딱 하나만 남게 되는 거지요."
"백: 나는 내 정신상태가 어떤 염세적 세계관의 결과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게 세계 자체라고 생각해요. 진화의 결과, 지능을 가진 생명은 어쩔 수 없이 궁극적으로 다른 무엇보다도 이것 한 가지를 깨닫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무용성입니다."
"백: 사람들이 세상을 진실로 있는 그대로 본다면. 자신의 삶을 진실로 있는 그대로 본다면. 꿈이나 환상 없이 본다면. 나는 사람들이 가능한 한 빨리 죽는 쪽을 선택하지 않을 이유를 하나도 대지 못할 거라고 믿습니다."
"백: 댁이 말하는 유대라는 건 고통의 유대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 사람들 마음에서 죽음의 공포를 몰아내주기만 한다면 사람들은 하루도 더 살지 않을 겁니다. 다음 악몽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면 누가 이 악몽을 원하겠어요? 모든 기쁨 위에는 도끼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모든 길은 죽음으로 끝나요. 아니면 더 나쁜 것으로. 모든 우정도 모든 사랑도. 고문, 배반, 상실, 고난, 고통, 노화, 모욕, 무시무시하게 집요한 병. 이 모든 것이 단 하나의 결말에 이릅니다.
"백: 댁은 내가 하느님의 사랑을 원한다고 하지요. 하지만 나는 원하지 않습니다. 혹시 용서는 원할지도 모르겠지만 용서를 구할 상대가 없네요. 되돌아가는 건 불가능합니다. 바로잡는 것도 불가능해요. 전에는 어쩌면 가능했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지금은 무(無)의 희망밖에 없습니다. 나는 그 희망에 매달리고 있고요. 자 이제 문을 열어주세요. 부탁합니다."
백인은 나간다. 그가 다시 어디로 향할지는 뻔하다.
흑인은 절망한다.
"흑: 저 사람 말은 진심이 아니었어요. 당신도 그게 진심이 아니란 걸 아시잖아요. 당신도 그게 진심이 아니란 걸 아시잖습니까. 당신이 왜 나를 거기 내려보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해를 못하겠어요. 내가 저 사람을 돕기를 원하셨다면 왜 나한테 할말을 주시지 않은 겁니까? 저 사람한테는 할말을 주셔놓고. 나더러 어쩌란 말입니까?"
쉽게 읽히면서도, 책은 꽤 철학적이다. 단번에 팬(!)이 되게 만드는 작가다.
의도치 않게, 내가 옮긴 것은 거의 백인의 말뿐이다. 그렇다. 나는 자살을 기도하는 저 백인에게 구구절절 동의한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삶에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려나.
사실은 정반대다. 오히려 -용감무쌍하게도- 똑똑한 저 염세론자를 비웃고 있다.
세상이 그렇다하여, 뭐 어쩌란 말인가.
우리는 모두 개체로서의 삶을 살 뿐 아니던가.
생각은 고매하되, 우리는 각자 주어진 대로, 생겨먹은대로 살아보는 것 아니겠나.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 는 말은 사양한다. 저쪽이 나을지도. 누가 아나.
다만, 모든 것을 알고자 하는 것도 인간의 일이지만, 모르면 모르는대로 감각으로 맛보며 즐기는 것도 인간의 일 아니겠나, 하는 것.
나 지금 뭐래니. 아쭈, 철학하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