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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비서들 - 상위 1%의 눈먼 돈 좀 털어먹은 멋진 언니들
카밀 페리 지음, 김고명 옮김 / 북로그컴퍼니 / 2016년 11월
평점 :
절판
발랄한 표지 덕분에, 재미있고 가벼운 소설로만 생각한다면 오산이 될 듯하다.
재미있는 것은 맞지만, 생각외로 묵직한 메시지가 던져진다.
주인공 티나는 업무상 이용했던 신용카드 결제건의 오류로, 생각지 못한 거액의 수표를 손에 쥐게 된다.
음원 불법 다운로드 한 번 해보지 않았다 자부하는 그녀지만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그 돈으로 수만 달러의 학자금 대출을 갚게 된다.
이 사실을 눈치챈 에밀리, 마지 외 여럿으로 인해 사건은 갈수록 커져만 간다.
결론은 공금 횡령이지만, 다들 원하는 것은 다르다.
에밀리는 본인의 학자금, 마지는 동료의 학자금 대출 상환을 요구하고, 웬디는 "부의 재분배를 촉진하는 프로그램"을 기획한다.
마지 왈, "게임판이 불공평하게 돌아가는데 아무도 바로 잡으려고 안 하잖아."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난 옛날부터 노동계급의 영웅이 되는 게 꿈이었어."
불안 속에 계속되는 공금 횡령. 티나는 마음을 다잡으려고 노력한다. 자기연민에 매몰되지 않는 그녀의 시각은 눈여겨 볼만 하다.
"나는 비록 우리가 돈을 버는 족족 다 빠져나가는 형편에서 늘 적자에 허덕이며 가난과 환멸 속에서 살고 있을지언정 대학을 나와 뉴욕에 거주하는 백인으로서 여전히 사회-경제적 먹이사슬에서 비교적 상위에 있다는 사실을 절대 간과하지 않을 작정이다."
그러나, 전에는 눈여겨보지 않던 로버트(상사)의 돈 씀씀이를 보며 새삼 불평등을 절감하기 시작한다.
"오프라 매거진" 운운하며 이런 깨달음을 "아하! 순간"이라 부른다는데, 뭐라 부르든, 그래 깨달음이다.
0으로 변한 학자금 대출 잔액을 바라보며 느끼는 환희.
그간 "잘 알지도 못하는 학교에 인생을 저당 잡"혔음을, "그 후로 지금까지 이렇게 자유로웠던 적이 없었"음을 깨닫는 티나.
"이게 다 우리 잘못이라고 생각해? 몇 년이나 고생하고도 여태 비서로 있는 게?"
특정 직업을 폄하하는 것에 반대하지만, 400명이 있는 직장에 200명의 "남자"가 상사이고, 200명의 "여자"가 비서라면, 이건 문제가 아닐까?
탁월한 '선택과 집중', 책은 성 평등에 집중하진 않는다.
"대학 교육으로 얻은 것도 없지만, 만약에 내가 도둑질이라도 해서 돌파구를 마련하지 않았다면 여태 돈을 갚고 있었을 거라는 현실이 과연 옳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지금껏 고분고분 하라는 대로만 하고 살았을 뿐인데?"
그녀의 공금 횡령이 계속되는 와중, 이것은 로버트라는 인간에 대한 개인적 감정과는 무관함을 소설은 강조한다.
로버트는 지극히 평범한 인간이자 대자본의 상징일 뿐.
"이제 하다 하다 로버트가 날씨를 좌우할 수 있다고 믿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었다."
불평등에만 집중한다면, 사실 그들이 평범한 인간인 게 더 억울할 수도.
로버트의 부를 재분배하려고 기획했던 프로그램은 일이 이래저래 꼬여(풀려?),
횡령과는 무관한 합법적 비영리단체의 발족으로 이어지게 된다.
티나는 몰려드는 동료들을 돌아보며 동지애를 느끼기도, 자괴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제 와서 보니까 번드르르한 겉모습 뒤로 왠지 저녁마다 라면으로 끼니를 때울 것 같은 굶주림이 느껴졌고, 그 중 적어도 한 명은 월세를 내기 위해 난자를 팔 생각도 해본 적이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정말 심각한 문제는, 우리가 이미 태산을 넘고 넘어 출세를 했다면 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 꼴을 보라. 멋이란 멋은 다 부리고도 배고픈 독수리처럼 내 주위를 맴도는 이들을 보란 말이다."
긴장과 수치심 속에서도, 티나는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기도 한다. 조금 더 진취적이고, 조금 더 주체적인.
"(어쩌면) 정말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내가 세상에 바라는 변화가 바로 나를 통해 시작될 수 있었다."
비영리단체의 활동을 기대하며 모인 비서들끼리 "누구를 모시느냐로 정체성이 결정"되는 것은 흥미롭다.
티나는 이들의 여왕벌이 된다.
비영리단체 웹사이트의 오픈 기념 파티에서 티나의 무대 연설.
"이 나라는 누구에게나 공평한 기회를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 지난 30년 동안 정치와 경제 지형이 변하면서 현재의 20대와 30대가 중산층이 되겠단 꿈을 이룰 가능성은 부모 세대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적어졌습니다. 우리가 게을러서, 직업의식이 투철하지 않아서, 과소비에 취해서 그런 게 아닙니다. 진짜 이유는 바로 우리가 이 시대의 피해자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이 벌어지는 와중, 티나는 죄책감과 수치심에 괴로워하기도 하고, 스스로를 합리화하기도 한다.
로버트는 조세 회피의 달인으로 "법적으로 명명백백히 유죄였다."
그렇다고 그녀들의 죄가 없어지는 건 아니지만, 로버트가 분개한다면 그것 또한 웃기지 않나.
수십 명을 죽인 연쇄살인범이 있다 치자. 그가 제 자식이 밖에서 좀 맞았다고 광분한다면 어이없을 듯. 하긴 감정이입이 안되니 연쇄살인도 가능한거겠지만.
또, 티나의 범죄는 생각해볼 가치조차 없을까.
공금 횡령 따위에 찬성할 의사는 조금도 없다만, 세상을 바꾼 혁명은 많은 경우 당시엔 불법이었다는 사실.
혁명까지 가기 전에 변화는 필요하다. 의식의 변화는 물론 필수.
이 책의 장점은 시의성, 그리고 재미를 깎아내리지는 않을 정도의 무게로 던지는 메시지일테다.
왠지 모르게, 공식에 맞춰서 써진 듯한 느낌이 있기도 하지만, 명랑함, 맹랑함, 그 안에 메시지가 있어서 좋았다.
내용 중 한 축은 일부러 완전히 빼먹었다. 티나와 케빈의 연애 성공 스토리는 영 관심이 가질 않았다.
이 역시 공식에 의해 끼워진 듯한 느낌을 진하게 한다.
"'기울어진 운동장'처럼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주제를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에 대한 경계였을까,
어찌됐든 로맨스와 범죄를 오가며 적정한 선을 잘 유지하는, 유쾌한 풍자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