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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캇 맥나이트 지음, 박세혁 옮김 / 성서유니온선교회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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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에 따르면, 성경을 읽거나 기도를 하거나 예배당에 가지만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지 않는다면,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성경을 읽고, 경건의 훈련을 해야 한다.주님은 먼저 우리를 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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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에 임한 영광의 빛


글/ 송광택


어린 시절, 곁에 계셨던 주님


어머니는 결혼 전부터 감리교회를 다니셨다. 필자가 교회와 관련하여 떠올리게 되는 어린 시절의 기억은 성탄절 전야의 교회 행사이다. 당시의 교회가 대개 그러했듯이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찾아간 상도감리교회는 마루가 깔린 깨끗한 예배당이었다. 그 날 저녁 성탄절 인형극이 있었다.  줄거리를 다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너무나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그 장면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초등학교 시절 동생들과 함께 그 교회 주일학교에 다녔다. 비록 가끔 결석을 하는 아이였지만 나는 평일에 동생들을 데리고 동네 꼬마 친구들과 어울려 교회 뜰과 뒤쪽의 공터에서 신나게 놀곤 했다.

지금도 기억이 나지만 나는 예배를 정성껏 드리려고 했다. 주일학교 예배와 집회 시간에 떠들고 장난하는 아이들을 보면 ‘왜 저럴까’하고 이해가 되지 않았다. 주일학교 오후 시간에 선생님께서 옛날이야기를 해주신 적도 있었다. 성경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그 또래의 아이들이 그러하듯이 나도 재미있게 들었다.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에 대해 강한 인상을 받은 사건은 초등학교 6학년 때 있었다. 우리들은 학교 강당에서 예수님의 생애에 관한 영화를 보았다. 아마 <왕중왕>같은 영화였을 것이다. 복음서에 관한 예비적 지식이 별로 없는 상태에서 본 영화였고, 또 시력이 좋지 않아 잔뜩 눈을 찡그리고 고개를 쭉 빼고서 본 영화였지만, 예수님에 관한 하나의 인상이 나의 마음에 자리 잡게 되었다. 그것은 아직 복음의 진수에 미치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 분은 참 훌륭하고 좋으신 분이구나’라는 강한 느낌이었다. 그 후에 본 <벤허>, <쿼바디스>같은 종교성 강한 영화도 내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어린 시절을 돌이켜 보면, 집안에 있던 몇 가지 소품이 떠오른다. 안방 벽에는 밀레의 명화 <만종>과 사무엘의 기도하는 모습이 그려진 액자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 당시에는 여자아이가 기도하는 모습으로 생각했다. 그 그림의 왼쪽 하늘 위에서 기도하는 아이에게 비취는 빛줄기들은 어떤 신비감마저 일으켰다. 그리고 집에는 어머니가 시집오실 때 가지고 오신 손때 묻은 작은 성경과 찬송이 있었다. 찬송가는 실로 묶어 제책한 무곡 찬송가였다. 어머니는 특히 <새벽부터 우리 사랑함으로써>라는 찬송을 즐겨 부르셨다.  젊은 시절에 어머니가 다니시던 교회에서 그 찬송을 제일 많이 불렀다고 한다.


나를 찾아오신 예수님


1971년 2월 어느 주일 아침, 나는 성경 찬송가책도 없이 교회당에 가려고 집을 나섰다. 아직 겨울 추위가 머물고 있어서, 옷깃 사이로 찬바람이 스며들어 왔다. 당시 나는 서울교육대학에 응시해 1차 필기고사에 합격했으나, 2차 신검에서 불합격한 후 몇 날을 다소 착 가라앉은 심정으로 지내고 있었다. 누구나 그랬겠지만 쉽지 않은 고3 시절을 ‘치열하게’ 보냈던 나는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로 자위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참고서 하나 원하는 대로 살  수 없었고, 학원은 하루도 다니지 못했다. 하지만 고3 시절을 붙들어 준 짧은 이야기가 있었다. 스파르타의 소년들은 짧은 창으로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그 이유를 묻는 아들에게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훈련을 받을 때, 짧은 창을 가지고 긴 창을 가진 자를  이길 수 있어야, 전쟁터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그 주일 아침 집을 나서기는 했지만, 출석해서 예배를 드릴 교회를 확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발길은 어느새 중고등학교 시절 출석했던 일신교회(상도동)를 향하고 있었다. 일신교회는 필자가 초등학교 6학년이던 때에 안길옹 목사님이 개척한 교회였다. 상도감리교회 주일학교를 수료한 후, 나는 중학교 때부터 일신교회를 다녔던 것이다.

장승배기 언덕 위의 일신교회로 올라가, 고등부 예배를 드린 후, 고등부 지도자인 안정남 선생(현재 미국에서 목회)의 안내로 장년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다. 예배 시간 오래 전부터 무릎을 꿇고 앉아서 발이 저려 왔으나, 꾹 참고 두 시간 이상을 그 자세로 예배를 드렸다.  담임목사이신 안길옹 목사님은 누가복음 19:1-10을 본문으로 하여, <지나가시는 예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셨다. 말씀의 요지는 2천년 전에 여리고를 지나가시던 예수님께서 오늘, 이 아침에도 우리 앞을 지나가신다는 것이요, 우리 각 사람이 그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설교 후에 회중은 조용히 묵상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그 날 나는 천사들 가운데 앉아있는 ‘더러운 죄인’이었다.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 가지 소원을 품고 교회당에 들어 왔다. “단 하루라도 깨끗하게 살 수 있다면, 죽어도 좋다”는 심각한 마음가짐으로 무릎을 꿇고 있었다.

모두 조용히 기도하고 있었다. 나도 기도를 하려고 끙끙거리고 있었으나, 첫마디가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아니 어떻게 정직한 첫 마디로 기도를 시작해야 하는지를 고통스럽게 궁리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머리 속이 정리가 안 되고, 마음속은 더 혼란스러워졌다.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무슨 말로 기도를 드릴 수 있을까? 그 기도의 첫 마디를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포기하고 싶은 마음과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싸우고 있었다. 그때 문득 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 정직하게 기도하자.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없는 그 마음 그대로 솔직하게 기도를 드리자.”

나는 정직한 기도의 첫 마디를 생각해 내려고 다시 끙끙거렸다. 지칠 대로 지친 마지막 순간에 떠오른 한마디가 있었다. “만일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것이었다. 이제 그 첫 마디를 나의 입술을 열어 말하기 위해, 마음속으로 수없이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그 다음에 무엇을 말해야하는지는 생각나지도 않았다. 물론 마음 속 깊은 곳에는 간구하는 소원이 있었다. “하나님이 계시고, 그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깨끗한 삶을 살게 해 주신다면 더 이상 아무 원이 없습니다. 단 하루라도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이제 막 입을 열어 “만일..”이라고 기도 첫마디를 입 밖으로 내놓으려는 순간. 정말 순간이었다. 내 망가지고 상처 난 영혼 깊은 곳을 향해 큰 꾸지람의 소리가 임했다. “만일 하나님이 계시다면이 무엇이냐”

나의 부끄러운 내면이, 가장 약한 부분이 그대로 노출되고 지적당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 엄중한 책망의 말씀은 차갑지 않았다. 그것은 이제까지 접해본 적이 없는 ‘거룩한 무게’를 지닌 사랑의 음성이었다. 흔히 필설로 표현하지 못한다고 하지만, 이 경험이 그러하다.

그 책망의 말씀이 내 영혼에 임하는 순간, 내 안에서 그 무엇인가가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온몸으로 느꼈다. 거의 동시에 나는 고백하고 있었다. “하나님,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습니다.”

삭개오를 찾아오신 예수님.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시는 그 분의 사랑. 그 사랑이 구체적으로 나에게 전달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감히 고백한다. 그 순간 나는 빛을 경험했다. 설명하자면, 나는 영혼의 눈으로 빛을 보았다. 빛이신 하나님을 부분적으로 맛보았다. 그 빛의 조명 가운데 나의 죄인된 모습, 그 더럽고 누추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없이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믿게 된 것도 감격스러운데, 그 분이 나를 돕는 자요 내 편이 되어주신다는 사실은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아무 조건 없이, 현재의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시는 하나님! 나는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옮겨졌다.

시간이 흐르고, 예배당 앞마당으로 나서는 나는 마치 공중에 떠있는 느낌이었다. 신천신지였다. 아, 하나님 안에서 눈이 열리니 모든 것이 새롭고, 이토록 행복하구나. 부모 형제를 생각만 해도 귀하고 감사했다. 말할 수 없는 감격과 행복감으로 가슴은 벅차올랐고, 이 기쁨을 소리쳐 외치고 싶었다.

나는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들의 교제 안으로 진입하였다. 아니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여러 과정을 거쳐 때가 되어 그 분의 사랑의 빛을 만났던 것이다.


신학의 길에 들어서다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주일학교 교사(당시에는 ‘반사’라고 부르기도 했다)로 봉사하게 되었다. 초등학교 2학년 남자아이들은 나의 첫 사랑이었다. 토요일마다 심방하고 어설프게 심방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1971년 10월 24일 세례를 받은 나는 이미 성경을 공부하고 그 말씀을 전해야한다는 소명감을 느끼고 있었고, 세례문답을 개인적으로 하시면서 장래의 계획을 묻던 목사님께 속뜻을 내비치었다. 그 후 2년의 기간은 내게 있어서 영적인 신혼의 시절이었다. 말씀의 단맛을 느끼면서, 조금씩 기도를 배우기도 했다. 그 시절 나는 목사님과 전도사님들의 월요성경공부나 산 기도를 따라다니면서, 신앙 선배들의 진지한 영성을 우러러보곤 했다.

1973년 총신대학 신학과에 합격했을 때, 나는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만 했다. 수중에는 교통비도 없었다. 이모저모로 궁리하다가 손목시계를 들고 전당포를 찾아갔다. 시계를 맡기고 나니 천 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 길로 노량진 수산시장에 가서 동태 한 짝을 팔백 원에 샀다. 동태 크기에 따라 값이 달랐으나, 대개 스무 마리가 넘었다. 얼어붙은 동태를 하나씩 떼어 내어 큰 비닐 주머니에 나누어 넣고 아는 분을 찾아다니며 동태를 팔았다. 그 날로 전당포에서 시계도 찾고 장사 밑천을 마련하였다.

이른 새벽 집을 나서면 부지런한 사람들은 차가운 겨울바람을 가르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수산 시장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열심히 사는 사람들은 내게 큰 격려가 되었다. 나는 허름한 동복을 입고 횐 장갑을 끼고서 새벽 골목을 누비며 본격적으로 동태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동태요, 동태!”  양손에 동태 한 짝을 나누어 들고 조금 걸으면 손가락이 저려 오고 힘이 들었으나, 동태를 팔 때마다 발걸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하지만 장사가 잘 안되는 날은 무거운 동태를 들고 집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십여 일이 지났을 때, 나는 이 동태가 보통 동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동태를 사는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내 학비를 보태 주는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이 동태를 사는 사람은 복을 받아야 한다.”

동태에 특별한 이름을 붙여서 팔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나는 동태를 사는 분이 복을 받으라고 '복(福)동태' 라고 이름을 붙였다. “복동태 사려”라고 외치며 골목골목을 다닐 때, 마음속 깊은 곳에서 기쁨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동태 장수가 아니라 복을 전하는 전도자가 된 기분이었다, 어떤 아주머니는 동태 중에 복동태가 따로 있는 줄 알고 물어 보셨다. 그러면 복동태라고 이름 붙인 작명의 이유를 간단히 설명해 드렸다.

지금 생각하면, 일종의 ‘발상의 전환’ 이었다. 보통 동태지만 '복(福)' 자를 붙임으로써 평범한 동태 장사에 독특한 의미를 부여하고,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었다. 때로는 노인 분들에게 값을 받지 않고 드리기도 했다, 동태 장사로 큰돈을 벌수는 없었다. 그러나 젊은 날의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


책사랑에서 독서운동으로


1995년 필자는 임마누엘선교미디어의 협조로 <독서가족만들기 31일>이라는 이름으로 독서동기를 부여하는 작은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 책의 저자로서 극동방송에 출연하여 독서운동을 소개하는 기회를 갖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에 비전북출판사에서 <좋은 독서가족 길라잡이>라는 이름으로 나왔다.

필자는 현재 한국교회 독서문화연구회 대표로 섬기고 있고, 여러 월간지와 웹진(Webzine)에 서평(북리뷰)을 쓰고 있다.  80년대 말 한 신학교에서 여학생을 중심으로 독서모임 <글사랑>을 조직한 적이 있다. 그 모임을 통해 독서의 신앙적 의미를 조금씩 인식하면서 독서회원들의 책사랑은 뜻을 같이하는 분들의 도움을 받아 일종의 독서운동으로 발전하였다.

필자는 수년간 극동방송의 [신앙서적 길라잡이] 진행자로서 신앙서적을 소개하였고, 기독 월간지와 교계신문을 통해 좋은 책을 소개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나에게 이전보다 풍성한 삶을 허락해 주었다. 이전에 나는 뿌리 없는 나무와 같았다. 그러나 이제 나는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다. 나는 생명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새 생명을 받았고, 날마다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살고 있다. 


* 이 글을 읽는 모든 분이 저와 같이 새 생명과 새 성품, 그리고 새 생활의 놀라운 세계로 들어와 하나님의 사랑을 만끽하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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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택의 약력(2007. 2. 2. 현재)

총신대학교 신학과 졸업

총회신학연구원 졸업

총신대학 대학원 졸업(Th. M.)

총신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월간 창조문예 (시) 신인상, 월간 아동문학(동시) 신인상

전) 기독지혜사 [성서대백과] 편집 및 번역위원

전) 국민일보, 월간 목회와 신학, 빛과 소금 고정필자

전) 서울 극동방송 [신앙서적 길라잡이] 진행자


현) 바울의 교회 협동목사

현) 한국교회 독서문화연구회 대표

현) 홍은개혁신학연구원 교수

현) 총신대학교 사회교육원 [교회독서교실지도사과정] 책임교수

현) 국민일보 부설 사회교육원 강사

현) 한국사립문고협회 자문위원

현) 월간 신앙세계, 교사의 벗, 목회정보 2000 북리뷰 고정필자

현) 유럽크리스찬신문 독서칼럼 고정필자


저서

좋은 독서가족 길라잡이(비전북출판사)

목회자 독서법(한언)


역서

교회사핸드북, 장로핸드북(이상 생명의 말씀사 간)

기독교교육학(한국장로교출판사 간)

새로운 교회개혁 이야기(미션월드 라이브러리 간)

 

E-mail  songrex@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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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는 어떻게 글(작품)을  쓰는가?


“글을 쓴다는 것은 밖의 것을 받아들여(impression)  자기의 마음이라는 필터에 걸러낸 후, 밖으로 뱉어 놓는 것(expression)을 말한다. 받아들이는 것이 없이는 결코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무엇을 쓴다는 것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다. 일상사에서 일어나는 각자의 느낌, 작은 것을 세밀하게 관찰하여 거기서 오는 새로운 발견이, 바로 글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김승옥/평론가).


작가의 창작 동기는 무엇인가?  왜 그리고 어떻게 그들은 시를 쓰고 소설을 쓰는가? 


1) 박이도(시인)

(1938년 평북 선천 출생/경희대 국문과 졸업/196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황제와 나」가 당선/시집으로 「폭설」 「안개주의보」「불꽃놀이」「순결을 위하여」 등)

박이도 교수에 의하면, “자기 욕구와 자기 표현이란 다름 아닌 창조지향의 욕구이다. 내가 왜 글을 쓰게 되었는지, 내가 왜 문학 작품을 쓰게 되었는지의 근원적인 물음은 앞에 제시한 대로 자명하다. 말을 배우고 글을 읽을 수 있게 되면서부터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박교수는 그의 형님이 “문학전집을 탐독하는 모습에서” 그의 문학에의 호기심과 글쓰기의 집념이 무르익었다. “등뒤에서 볼 수 있었던 그의 진지하며 열중하는 모습에서 채 읽기에 대한 좋은 감명을 받았던 것이다.” “시 쓰기에 열중할 수 있었던 것은 좋은 시를 읽으면서 그 시에 감동되는 순간을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좋은 시를 읽는 동안에 계속 써보고 싶은 충동이 떠오른다. 김광균의 시를 읽으면서 나는 자작시를 한 권의 노트에 꽉 채울 수 있었고, 또 한 권의 노트엔 미당의 시 중에서 좋게 읽히는 시를 옮겨 적었다.”


2) 이경자(소설가)

(1948년 강원도 양양 출생/서라벌 여대 문예창작과/197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확인」이 당선/소설집으로 「절반의 실패」 장편으로 「혼자 눈뜨는 아침」등)

“사춘기와 청춘기엔 예술은 밤에만 하는 거라고 굳게 믿었으므로 밤에 잘 썼다. 그러나 직장에 다닐 땐 체력을 저금해 두었다가 일요일 아침부터 밤중까지 밀어붙여 단편 하나를 끝내곤 했다... 단편은 대개 백매 안팎이므로 하루에서 사흘로 힘을 몰아붙여 쓰고 중편은 보통 일주일쯤 걸려 쓴다.”  “작품은 절대적으로 독자의 것이므로, 이것이 독자에게로 가서 어떻게 읽힐까를 머리속에서 한순간도 잊지 않고 글을 쓴다. 내 글이 독자의 밥이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소설가의 사회적 책무는 준엄하게 물어져야 한다. 이러한 나의 소신 때문에 나는 소설가로서 사명감을 갖는다. 작가는 일차적으로 자기가 현재 살고 있는 공동체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복무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노력은 궁극적으로 ‘사람에 대한 끝없는 사랑’의 표현이다... 나는 작가와 작품은 일심동체라고 믿는다...작가에게 있어 체험은 아주 중요하다...나는 첫째 체험, 둘째 독서, 셋째 집필로 비중을 둔다. 독서는 내가 사물을 총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준다고 여겨서 아주 광범위하게 의지하는 편이다... 어휘(말)는 사회적이다... 불평등한 상투어는 평등하게 바로잡고 외래어는 우리말로 표현하려고 기를 쓴다. 전문용어에 대해서도 그런 노력을 한다.”


3) 이청준(소설가)

(1939년 전남 장흥에서 출생/서울대 독문과 졸업/1965년 단편 「퇴원」으로 사상계 신인문학상/1967년 「병신과 머저리」로 동인문학상/1975년 「이어도」로 한국창작문학상/1978년 「잔인한 도시」로 이상 문학상/작품집으로는 「별을 보여드립니다」 「당신들의 천국」 「춤추는 사제」 전작장편 「낮은 데로 임하소서」)

이청준은 창작집 「소문의 벽」 후기에서, 소설 공부하는 이유를 기본적으로 ‘자기구원을 위하여 쓴다’라고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자기구원」의 방식이 ‘다른 사람의 삶의 뿌리에 닿아서 다른 사람의 구원에도 관계가 맺어지기를 바라고 보편성을 획득하는 단계까지 확대되었으면 좋겠다는 욕심을 갖게’ 되었다.

그에 의하면, 소설은 어떤 의미에서 현실적인 복수 감행보다는 ‘갇힌 방안에서 그리고 내부에서 자기를 패배시킨 사회에 복수하고 이념적으로 지배하려는’ 노력이다.

출발 자체는 현실에 대한 복수나 개조 의지나 이념적인 지배 욕망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독자와의 관계에서 보면, 독자는 작가에게 지배당하고 복수 당하기 위해 책을 읽는 것은 아니다. 이 점에서 작가와 독자가 서로 상치된다고 그는 말한다.

작가는 독자를 위해 쓰기도 하지만 자기자신을 위해서도 쓴다. 그때 작가는 자기복수심으로부터 해방되는 부분이 있다. 이청준에 의하면,“작가의 사회적 책임은 사회 자체가 유연성을 가지게 하고 그 마당을 넓히는 해방의 길로써 자유를 모색한다는 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는 이상주의자일 수밖에 없다.

작가의 입장에서 볼 때, 누구나 다 감동을 받을 수 있는 작품을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갖고 있는 감성의 높이와 세상을 이해하는 지적인 높이는 제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독자는 자신에 맞는 작품을 찾아서 읽으면 된다.


4)  최일남(소설가)

(1932년 전주 출생/서울대 국문과 /이상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가톨릭 언론문화상 수상/창작집으로 「누님의 겨울」 「홰치는 소리」 장편 「그리고 흔들리는 배」 「목숨」 등)

그는 초등학교 5-6학년 때부터 세계문학전집을 거의 독파했다. 초등 학교 때부터 작문이 괜찮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중학교 때 마구잡이로 읽고 베꼈다. “유명한 문필가의 글을 베끼는 사이 자신도 모르게 필자의 감정을 확인하는 것 같았다... 이거다 싶으면 읽다 말고 옮기는 습관을 길렀다. 마음에 드는 시는 무조건 외우기로 작정했다.”

아름다운 문장은 손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정말로 아름다운 문장은, 그 이전에 확보한 세계 인식의 깊이와 진실에 한 발짝이라도 근접하려는 피나는 노력의 산물이라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그가 문장 수업을 하면서 자주 들여다 본 것은 이태준의 「문장강화」와 정지용의 「지용 문학독본」이다. 이태준의 책은 여러 작가의 문장 수업에 영향을 끼쳤다.

그의 작가로서의 태도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그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 “어떤 사회라든가 어떤 상황에 작가가 서있을 때 되도록이면 햇볕 받지 않는 사람들, 또는 응달쪽에 시선을 두고 초점을 맞추는 것이 작가로서의 의무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 하나는 남들이 거창한 것에 부딪칠 때 나는 내 체질에 맞는 것을 찾았습니다.”

궁극적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소설가의 입장이다. “가난이 감미로울 수는 없지만 작품상으로는 인간의 생각이나 행동이 독자가 읽고나서  흐뭇하게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는 문체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소설은 소재, 구성, 테마 등의 기본적 요소가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문장 곧 문체가 독자를 사로잡고 좌우하고 그 작가를 특징짓는 귀중한 요소라 생각하고 지금도 문체에 대해서는 부단히 노력을 합니다.”

그는 신인들의 작품을 볼 때  테마와 소재의 특이성에도 관심을 갖지마는 그들이 어느 정도 문체에 대해서 신경을 쓰는가를 주의 깊게 본다. 때로는 문체가 안 느는 사람이 있다. 그런 면에서 문체는 어느 정도 타고난다고 하겠지만, 철저한 훈련에 의해서 극복이 가능하다고 본다.


5) 김원일-소설 구상의 예

처음에는 한 노인의 편안한 죽음을 주제로 한 「바람과 강」을 100매 정도의 단편으로 구상했다.  그후 850매 정도를 썼고, 다시 1200매의 분량으로 개작했다. 첫 문장을 미리 생각해 두었다.  “가을볕도 다사로운 어느날,이인택 씨는 명구를 데리고 봉화산 쪽으로 길을 잡았다.”

그 즈음 읽고 있던 책은 「한국노동운동사」,「중국현대사」 등 이었다.  또한 일제시대 공산주의 운동사에 관심이 있었다.  <변절자의 반성적인 삶>을 쓰려고 새롭게 구상을 했다. 전체적 개요를 원고지에 메모했다.

      1. 서두. 등장인물을 대충 소개  (15장)

              2. 이인태씨와 최 지관의 묘터 상의(50장)

              3. 이인태 씨의 복잡한 과거 회상(50장)

        4. 묘터를 보러 다니다. 두 곳(70장)

        5. 이인태 씨 심장병 악화, 참회의 심정, 치명적 과거사(50장)

        6. 장례 및 에필로그(30장)  총 325장


그는 다음과 같이 집필원칙을 세웠다:  3인칭 소설로 쓴다.  자연 묘사에 충실하겠다(인간과 자연과의 연대감). 성에 관한 문제를 꼼꼼하게 접근해 보겠다(이유: 서구에서 성이 생활의 일부가 된 현장을 목격하고, 고지식한 관념의 벽이 얼마간 허물어졌다). 작품의 공간을 설정할 때, 축적 30만 분의 1 지도 사용했다.  소설을 쓰기 전 여러 종류의 참고 서적을 읽고  메모하고 현장을 답사했다.  외래어를 쓰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한자어를 피한다(대필한 -대신 써준, 친근하다-정답다, 보폭-걸음나비,  천적-목숨앗이, 편승-묻어 타기). 연도 이외 모두 한글로 쓴다. 글 속에 아라비아 숫자가 박혀있는 것이 흉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자주 사전 보고 어휘력 키운다.  작품 쓸 때, 낱말장을 참고한다.

(예)   폄(貶)하다- 남을 깍아내려 말하다

       어슴새벽-어스레한 새벽(어스레하다-날이 조금 어둑하다)

       던적스럽다-보기에 더러운 태도가 있다

       군단지럽다-마음과 행동이 더럽고 너더분하다

        아귀(가) 세다- 1)마음이 굳세어서 남에게 잘 휘어들지 않는다

                              2)손으로 잡는 힘이 세다


6)  황석영-작업과정의 예

(황석영/1943년 만주 신경 출생,1962년 사상계 신인문학상 당선,1970년 조선일보 등단, 주요작품에 「객지」,「돼지꿈」,「삼포 가는 길」,「장길산」 등이 있다)

그는 작품을 쓰기 전에 먼저 얘깃거리를 찾게 된다. 작가는 우선 훌륭한 이야기꾼이 그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얘기가  떠올라 생생하게 장면이 그려질 때까지 그 연상들을 끌어 모은다.

그는 현장감을 갖기 위해서 실제로 기간을 잡아 그럴듯한 장소와 인물들에 접해 보기도 한다. 장소는 지방이나 도시 변두리나,빈민가나,공장이나.환락가나,부두,선창가,어느 곳이고 가리지 않는다. 그 계층에 알맞은 복장과 말씨를 가지고서 뚫고 들어가 자기 체질 속에서 공통점을 찾으려 노력해 본다. 작가는 언제나 자기가 다루려는 현실의 한복판, 그 현장에 있는 자라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기술방법에 있어서 객관성과 구체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이른바 <카메라의 눈>이라는 서술인데, 내게는 ‘그리움’을 그대로 쓰느니보다는 그러한 상황을 장면으로 보여주기를 원한다.  역, 철길, 기차, 접혀진 우산, 비 그리고 처마 끝에 섰는 사람 등등으로 그 소설의 전체적인 구성에 걸맞는 이미지들을 주워 모아서 그림을 그리듯 써 내려간다."


7)  김용택-시의 구상


시인 김용택은 섬진강 강길을 따라 걸으며 시심을 키웠다.  계절의 변화는 늘 그에게 새로움과 감동을 주었다. 강길을 걸어가다가 메모를 하거나 한 편의 시상을 종이에 끄적거려 두었다가 그 생각을 잊어버리기도 하다가 느닷없이 시가 쓰여질 때는 두세 편씩 쓰곤 했다. 누가 왔다갔다하거나 다른 소리가 들리면 시가 써지지 않는다. 대개 밤에 쓰거나 사람이 집에 없을 때 쓴다.

살아가면서 생활의 순간순간에 떠오르는 시상들을 그냥 자연스럽게 쓴다. “내가 겪은 바로는  시는...절망스럽고 고통스럽고 배고픈 데서 태어난다.”

“시어의 선택에 있어서도 원칙은 없지만 될 수 있으면 그냥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말들을 쓰는 편이다... 사투리의 내용은 일상적인 삶의 구체성을 살려주며, 특히 전라도 사투리는 그대로 내 시어가 되고 가락이나 리듬이 된다. 언어는 곧 삶의 표현이 아니던가. 그러나 나는 그런 것들을 의식적으로 사용하려 하지는 않는다.”  “나는 내가 살고 겪고 있는 곳의 이야기를 가감 없이 정직하게 표현하고 싶다... 내 삶만큼을 나는 쓰고 싶다.”


 

정리   송광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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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서지도사(독서지도교사)의 자기관리


1) 독서지도교사는 꾸준히 독서해야 한다. 독서지도교사는 평생 학습자이다.

 

2) 독서지도교사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  삶을 위한 독서와 교육이 되기 위해서 독서지도교사는 본이 되어야 한다.

 

3) 독서지도교사는 높은 이상과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독서지도교사로서의 노력과 실천이 세상 한구석을 밝힌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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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지도교사의 역할


1) 독서학습을 통해 폭넓은 대리 경험의 기회를 제공해 준다.

 

“많은 위대한 지도자들이 전기(傳記) 등 여러 종류의 책들에 기록된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 큰 도움을 받았다. 간접경험 과정이란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의 기록(책)을 통해 지도자에게 교훈을 주는 과정을 말한다.” - 로버트 클린턴


2) 독서학습을 통해 일상 생활이나 학습에 필요한 정보와 지식을 제공해 준다.


3) 독서학습을 통해 생각하는 힘(사고력)을 길러 준다. 


오늘날 우리 교육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는 다양하고 복합적인 문제 상황에 처하여 문제를 발견하고 평가하고, 마지막에는 그 문제를 해결하는 힘, 즉 창의적 사고력을 길러주는 일이다.


4) 독서학습을 통해 균형 잡힌 인격을 갖게 해 준다.

또한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맺음으로써 삶의 질을 높이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5) 독서학습을 통해 세계관의 기초를 세우도록 도와준다.

세계관이란 세계의 근본적 구성에 대해 우리가 견지하고 있는 일련의 전제들이다.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 사상>의 저자 제임스 사이어에 의하면, 세계관과 관련된 일곱가지 질문이 있다:

1. 진정으로 참된 최고의 실재는 무엇인가?

2. 외부의 실재 즉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본질은 무엇인가?

3. 인간은 무엇인가?

4. 인간의 사망시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5. 지식이 가능한 까닭은 무엇인가?

6. 도덕의 기초는 무엇인가?

7. 인간 역사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가 세계관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은 자기의 사고 방식을 알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사고 방식도 인식하도록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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