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댄 동산 같은 내 영혼
루시 쇼 지음, 김동완 옮김 / 요단출판사 / 2001년 8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탁월하다. 기대 이상의 보상을 해주는 경건서적이다. 영성의 본질을 이야기하되, 난삽한 신학용어가 아니라, 따뜻하고 선명한 진술로 영성의 뜻을 밝히고 있다. 저자 자신이 ‘정원’을 가꾸며 얻은 체험적 영감이 녹아 있는 책이다. 저자에 따르면 영성이란 생명에, 그것도 누군가가 '부여한' 생명에 닿아있다. 그리스도인에게 '영성'이란 성령,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으로부터 나온다.

1장 <하나님의 동산>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독특하게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람들을 광야로 불러내신다. 그곳은 위대한 배움터이다. 우리가 우리의 인간적인 능력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향한 전면적인 의탁을 배우는 곳이 바로 광야이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눈 맑은 사람들과 숲길을 걸어보라. 그것은 마음 맑아지는 한 줄기 바람이다. 안과 밖의 눈으로 사물을 보려면 시간과 집중력과 핵심까지 닿으려는 통찰력이 필요하다. 작고 세밀한 것은 그것에 주목하고 그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을 위해 있다.” “우리는 늘상 무궁한 크기의 관점에서만 하나님을 생각하려 한다. 산과 바다가 그렇고 태양계와 은하계, 우주가 그렇다. 그런 하나님은 시간과 성(性)을 초월해 계시듯 크기와 규모 또한 초월해 계신다. 우리의 두 눈을 열면, 달팽이 껍질의 나선형 소용돌이에서도, 햇빛 받아 투명하게 드러나는 잎맥의 회로에서도, 사물의 심부에 끝없이 펼쳐지는 분열 연쇄에서도, 소립자의 결정구조에서도 하나님은 섬광처럼 보인다.”

저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름다운 정원으로 가꾸시는 분이라고 말한다. ‘아름다운 정원’이 이 책의 키워드이다. 윌리엄 콜에 의하면 “ 책상 앞에 오래 앉아 있어 휴식이 필요할 때는 정원 만한 곳이 없다. 대단한 풍광이야 없지만 잔잔한 즐거움을 주는 곳이 바로 정원이다.”

저자는 이렇게 기도한다: “생의 아름다움이 우거진 대자연의 정원이든, 다양한 생과 형태의 예술작품으로서 집 마당에 가꾸어진 정원이든 그것은 하나님께서만 정하시기를. 당신께서는 초록과 초록이 상징하는 성장을 사랑하시니 나는 다만 어느 환경에서든 성장하기를. 나는 믿고 믿나니, 대자연에 나가 한뎃잠을 자든, 햇빛 부서지는 집 뜨락의 고요를 묵상하든, 별을 보거나 씨를 뿌리든 내 삶이 당신의 사랑의 노동으로 경작되기를. 나는 기도한다. 창조주께서 내게 '밝은 눈'을 주사 세상에서 가장 작은 것들에 눈 맞추게 하시기를. 이로써 작은 것들에 대한 당신의 사랑과 보살핌에 감사하기를. 내가 강해져야 한다면 나를 떠나지 마옵시고 당신께서 선택하신 거친들로 나를 이끌어주시기를. 마르고 쇠잔해 열매와 꽃을 낼 수 없다면 당신께서 손수 거름을 내사. 내 영혼의 나무가 타죽지 않고 다시 자라게 하시기를. 집 뜨락의 풀과 꽃들에게 날마다 작은 사랑이 필요하듯 내게도 그런 사랑이 필요하다면, 당신께서 내 마음 어루만지사 나 또한 당신 집 뜨락의 풀과 꽃이라고 위로해 주시기를. 내 영혼의 정원을 통제하려는 마음을 포기하고 정원의 주인이신 창조주께 맡기기를. 하나님이여, 당신은 내게 가장 유익한 것을 심중에 두고 계시며, 나만이 가진 색과 성장의 양식을 당신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시나이다.”


3장 <토양>에서 저자는 시련과 고난 그리고 경건훈련을 이야기한다. "주께서는 필요할 때마다 나를 바닥으로, 산다는 것이 더 이상 가치 없어 보일 정도의 절망으로 내려가게 하셨다. 그러나 고통스럽던 그 절망이 엮어내는 정화의 효과는 얼마나 분명했던가. 절망의 구덩이 속에서 나는 나를 그토록 옭아매던 큰 문제들이 사실은 하찮은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그 문제들을 끌어안고 죽을 수밖에 없었던 무덤밖에서, 하나님은 오히려 나를 되살려내고 계셨던 것이다. 더 정련된 나로, 하나님의 우선순위를 더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된 나로 부활시키고 계셨던 것이다"라고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좋은 부모가 자녀들의 생각을 뛰어넘는 큰 계획을 마음에 두듯,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어떻게 성장해야 좋은지, 시련과 고통을 넘나들며 어떤 성품, 어떤 영적 정서적 능력을 키워야 할지 구상하신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의 잠재력을 보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단한 '시험'을 겪게 하시는 이유는 이와 같다.”

저자에 의하면 영혼의 토양에 거름을 주는 이 일에 대해 우리는 어떤 종교적 실천이나 경건훈련만을 염두에 두어서는 안된다. 이 과정은 느리고 깊으며 전인적인 발전을 뜻한다. 풍부한 상상력을 추동하는 예술, 곧 음악, 미술, 영화, 시 등을 즐기고 추구하는 일, 다양한 책을 읽고, 묵상일기를 쓰며, 영혼의 친구와 우정을 쌓는 일 등등이 모두 창조주께서 우리 안에 기획하시고 공급해 주시는 아름다움과 의미를 고양시키는 과정이다.

C. S. 루이스는 “너 자신을, 땅속에서 묵묵히 겨울을 견디는 씨앗으로 생각하라. 정원의 주인이신 이가 정한 때에 꽃 피기를, 드디어는 세상으로 나가기를, 드디어는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한 씨앗으로 생각하라”고 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 씨 뿌리지 않은 곳에서 싹이 나리라고야 믿지는 않지만 내게는 씨앗에 대한 크나큰 믿음이 있다. 그러니 거기 씨앗을 심어 보라. 나는 경이를 맛볼 준비가 되어있다”라고 말했다. 4장 <씨앗>에서 저자는 작고 사소하나 여러분의 삶을 바꾸어버린 것들, 사람 마음의 풍경을 바꾸어버리는 씨앗들과 같이 작은 것들의 힘을 결코 무시하지 말라고 말한다.

5장은 <기다림>이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어둠 속의 뿌리로서 한 세월을 견디지 못하면 결코 우리는 정원의 백합화가 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조지아 오키프는  “꽃을 본다 해도 사실 정말로 보는 사람은 없다. 꽃은 그만큼 작다. 친구를 얻는데 시간이 필요하듯 꽃을 보는 데도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시간을 내지 않는다”라고 했다.

“우리가 기다리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마치 산모의 태 안에서 새 생명이 자라듯, 우리 안에서 왕성하게 활동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을 통하여 아버지와 역동적인 관계로 연합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면, 이제 우리 안에는 하루하루, 조금씩 예수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기까지는 기다림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기다림이란 어떤 노고와 같다. 기다림에는 이처럼 비상한 힘과 용기가 필요하다고 성서도 말하고 있지 않은가.”

애니 딜러드는  '글쓰기의 삶'에서 “말의 끈을 따라가다 마지막에 이르러 잡히는 것, 사실상 그것이 글쓰기의 전부이다. 말의 끈이란 광섬유이며 전선처럼 부드럽다. 말의 끈은 전선의 첨단에서 빛난다. 우리는 그것으로 벌레처럼 섬세하게 길을 탐색한다”고 했다. “글쓰기를 배우는 유일한 길을 쓰고 또 쓰는 것이다. 몇 년간에 걸쳐서 거듭 쓰고, 비유에 귀기울이고, 이미지를 보고, 우리 자신과 우리들의 시가 언어를 어떻게 운용하는지 배우고, 우리 자신과 우리의 시를 속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하나님처럼,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일도 이와 같다. 그것은 단번에 되지 않는다. 걷고 헤매고 다시 출발하고 넘어지고 구르고 일어서고 하나님의 손에 매달리고 그분께서 이르는 말에 귀기울이고 어느 곳에 서야 할지, 장애물을 어떻게 분간해야 할지 배우고 수 없는 연습으로 우리의 근육이 피로에 지치지 않도록 하는 이 모든 과정은 시간을 요한다. 성숙은 경험이 우리를 가르칠 때까지 기다린다. 우리는 늘 속성이니, 무슨 지름길이니, 몇 가지 방법이니, 몇 단계니 하는 제목이 붙은 책들에 호기심을 갖는다. 뭐나 있을 줄 아는가! 속성은 속성으로 망한다. 그러므로 이제는 기다리듯 배우자...기다림의 공간이란 빈번히 고통의 공간이다. 그러나 이왕이면, 인내로 인해 일이 완벽하게 무르익을 때까지 철저하게 기다리자”

저자는 고통에 대해 이렇게 응답한다: “나는 고통이 내 안에서 할 일이 있다고 믿었으므로 그냥 고통과 함께 있었다. 그 깊은 슬픔이 나를 아프게 하도록 내버려두었다.” 고통은 하나의 중요한 신호이다. 우리 삶에서 뭔가가 잘못되었을 때 고통은 말한다. 저자는 고통을 응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치유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고통은 또한 정련의 불이다. 그것은 우리가 가장 약한 부분, 가장 예민한 신경감각을 파고든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저자는 크나큰 고통의 자리가 크나큰 성장의 자리임을 깨닫는다. 고통은 기다림과 성장의 한 부분이지만 역으로 “인내를 낳는다”(롬 5:3).

헨리 나웬 <영혼의 양식> 중에서 이렇게 말했다: “고통은 영혼의 삶의 근본이며 정수입니다. 고독에 거하기란 쉽지 않은 일인데.. 그것은 우리가 즉각적인 만족을 약속하는 것들에 쉽사리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독의 자리에서 달아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시는 이를 만납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다고, 내가 너를 데리고 어둠의 골짜기를 지나가겠다고 말씀하시는 이를 만납니다.“

6장 <물>에서 저자는 먼저 눈물을 이야기한다. “눈물은 대체로 고통과 슬픔과 상실과 비탄과 후회 등의 아픈 상황에 관계된다. 감당하기 힘든 짐과 어려움으로 번민하다가 흘리는 눈물이란 안도와 해방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 그것은 우리 마음이 아직 부드럽고 만질 만하며 하나님의 가르침에 열려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적어도 울 수 있다는 것, 두 눈에서 눈물이 솟구친다는 것, 그것으로 나는 내가 아직 완전히 마르지 않았음을 안다.”

7장 <빛으로 자라다>에서 저자는 영혼의 성숙을 말한다. “우리 각 사람은 형제 자매를 섬기고, 예술에 봉사하며, 의미 있는 일을 하고, 따뜻한 인간애를 나누는 등의 여러 가지 일에서 보람을 찾을 수 있겠으나, 영혼이 진정으로 편안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쁘시게 하며 그분의 임재 안에 있을 때”라고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성장. 그 정확한 정의가 그렇듯 결코 정적이지 않은 것, 모든 성장세는 변화가 따라야 한다. 그리고 변화는 위험을 수반한다.” 미지의 영토로, 어둠 속으로 들어가기. 위험해 보인다. 치명적인 재난을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모험은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다...우리는 죽음 속으로 죽지 않고 삶 속으로 죽는다! <지혜, 노년, 은혜>에서 플로이드 로티트가 한 말도 그렇다. “죽음은 빛의 소멸이 아니다. 새벽이 오기 때문에 등불을 끄는 것, 그것이 죽음이다.”

끝으로 저자는 “영광과 아름다움은 값싸게 오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삶의 계절을 길이 참고 인내함으로써 얻어진다. 저자에 의하면 늙은 사람들과 젊은 사람들은 서로에게 필요하며 유익하다. 노인들은 청년들에게 지혜를 주고, 청년들은 노인들에게 활력을 준다. 비록 한창 때는 지났지만 경륜과 지혜를 갖춘 우리 노년 사람들 또한 자라나는 젊은이들에게 양분과 서식지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본서는 많은 인용구를 통해서 탁월한 작가나 신앙인의 깊이 있는 통찰력을 맛보게 해준다. 무엇보다도 시인이기도 한 저자의 감수성 뛰어난 글들이 본서 전체를 풍요로운 정원으로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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