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리마스터판)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
한강 지음 / 창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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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람의 삶은 대체로 생명을 지닌 하나의 존재로서 살아오고 있지만, 때론 투명인간처럼 존재감 없는 대상으로 살아가는 실로 고단한 인생이다.

그럼에도 사람은 각자 한 가지 정도는 자신의 존재감을 소속된 그룹이나 공동체에서 드러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문제는, 어떤 차별화 된 존재감을, 사람들 앞에 어떻게 드러내야 하는 것인가? 이다.

“아내가 채식을 시작하기 전까지 나는 그녀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Page 8)

한 사람이 일상에서 주로 무엇을 먹느냐? 그 행위 하나 만으로도 사회는 특정 인간을 판단하려 달려든다. 채식을 한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주인공은 특별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공동체에서 다수가 하는 행위를 하지 않는 사람을 발견했을 때의 첫 반응은 ‘당혹스러움’이다. 상대방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지 모르기 때문에 애둘러서 ‘별난 사람 혹은 특이한 사람‘이란 표현으로 설명한다. 독특하기에 ‘본 받고 싶은 사람’이라는 의미보다는, 가능한 한 멀리해야 할 ’기피 대상‘이라는 뉘앙스에 더 가깝다.

동물과 사람을 확연하게 구별지을 수 있는 독특한 특성 중 하나인 ’인간의 존재감‘은 어디서 올까? 여태껏 경험하지 못한 독특한 존재감은 어디까지 인정해야 할까?라는 다소 어려운 문제도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아버지, 저는 고기를 안 먹어요“. ’순간, 장인의 억센 손바닥이 허공을 갈랐다. 아내가 빰을 감싸쥐었다‘(page 57-58)

공동체의 삶과 다른 방향을 향하는 타인의 독특한 삶은 다양성을 포용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가족’이라 할 지라도 견디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다. 무엇이든 허용될 수 있을 것 같은 ‘가족’이라는 운명 공동체는 통상적인 개념과는 정반대로 때론, 가장 은밀하면서도 처참하게 인격을 말살하기도 한다.

가정에서의 폭력에 소극적으로 저항하고자 소설의 주인공은 첫 행동으로 모두가 좋아하는 ‘고기’를 먹는 것을 완강하게 거부한다. 급기야는 가족들의 압박이 더 심해지는 상황에서 모두 보는 면전에서 자신의 손목을 칼로 긋는 행위로 강력하게 저항한다.

“육식이란 본능이에요. ‘채식’이란 본능을 거스르는 거죠. 자연스럽지가 않아요. (중략) 골고루, 못 먹는 것 없이 먹는 사람이 건강한 거 아니겠어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원만하다는 증거죠.”(page 35)

문 밖을 나서면 이번에는 ‘사회‘라는 공동체가 ‘편견’이라는 가면의 탈을 쓴 채 ’소리없는 폭력‘을 행사한다. 그 폭력에 대응하는 자세로 침묵을 가장한 ‘묵묵히 성실한 사회생활’-바꿔 말하면 ’침묵‘이라는 비겁함-을 최선으로 선택한다.

공동체를 형성하는 구성원의 ’독특한, 혹은 해로운 행위‘를 통제하는 방법에서는 인간과 동물 사이에 큰 차이를 두지 않는다.

사람을 한번 물었다는 동네의 ’유별난‘ 개 한마리를 통제하기 위해, 인간은 개의 목에 쇠줄을 묶은 뒤 오토바이에 매달아 동네를 일곱 바퀴나 도는 ’응징‘을 하여 사망에 이르게 한다. 작가는 그렇게 숨이 다한 고깃덩이를 요리재료 삼아 동네 사람들과 태연하게 저녁식사를 겸한 잔치를 벌이는 인간들을 묘사하며 공동체의 잔혹한 내면을 드러낸다.

’채식주의자‘에서 인간의 첫 번째 욕망인 ’식욕‘을 다루었다면, ’몽고반점‘에서는 두 번째 욕망인 ’성욕‘을 다룬다.

생명 탄생을 위한 성스러운 행위로서의 욕구과 오로지 육체의 쾌락 만을 위한 본능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지점을 ’형부와 처제와의 성관계‘라는 ’사회가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 금기‘를 소재로 사용하여 비판한다.

이 둘의 관계를 이어주는 매개체는 역설적으로 아름다움의 대명사인 ‘꽃’이다. 책 표지 디자인을 천천히 다시 감상하면, 남성과 여성의 상징이 결합해 있는 것을 은유적으로 묘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녀의 몽고반점 위로 그의 붉은 꽃이 닫혔다 열리는 동작이 반복되었고, (중략) 가장 추악하며,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이미지의 끔찍한 결합이었다.“ (page 169)

소설의 여자 주인공은 ‘고깃덩어리’로 상징되는 남성의 육체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사람 몸을 캔버스 도구로 삼아 그려진 ‘꽃’에 순수하게 반응할 뿐이다. 그에 반해 남성은 쾌락의 대상으로 여자 주인공을 바라본다. 확연히 다른 두 사람의 시선이 충돌하는 지점이기에 추악함과 아름다움이 동시에 교차한다.

“어쩌면 그녀의 내면에서는 아주 끔찍한 것,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어, 단지 그것과 일상을 병행한다는 것만으로 힘에 부친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일상에서는 호기심을 갖거나 탐색하거나 일일이 반응할 만한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은 건지도 몰랐다. (page 125)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고, 복잡한 계산을 하며 살아가는 인간 세상에는 신경쓸 사안들이 넘치고 넘친다. 복잡하게 돌아가는 세상은 오히려 지극히 단순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그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주인공은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다. 수시로 꿈을 꾼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온전한 잠을 잘 수 없는 환경이라 인간의 세 번째 욕망 또한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

‘그녀는 말했다. “고기만 안 먹으면 그 얼굴들이 나타나지 않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었어요.”(page 172). “언니,……세상의 나무들은 모두 형제 같아” (page 210)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받아줄 나무를 찾아낼 수 없었다. 어떤 나무도 그녀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마치 살아있는 거대한 짐승들처럼, 완강하고 삼엄하게 온몸을 비틀고 서 있을 뿐이었다.” (page 248)

주인공은 나무 혹은 꽃과 같이 서로를 해치지 않고,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잎을 자라게 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며 ’동반 성장‘을 추구하는 세상에 살고자 한다. 그러나 그녀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세상과 그 주변은 그녀를 가만 놓아두지 않고 급기야 공동체에서 격리를 해 버린다.

주인공의 언니는 고기를 먹지 않고, 저항하다 지치고, 나무가 되어 뿌리를 내리려 했던 동생의 생명을 조금이라도 연장하기 위해 격리 시설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숨이 꺼져가는 동생을 바라보며, 보이지 않는 가치관의 폭력에 어릴적부터 ‘침묵과 성실함’으로 묵묵히 일상을 지내온 자신의 삶은 ’조숙함‘이 아니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그것은 ’비겁함‘이었고, 다만 ’무난하게 살아가기 위한 생존의 한 방식‘이었을 뿐임을.

주인공은 아마도 각기 다른 형태의 나무들이 사이좋게 살아가는 숲을 이상적인 사회로 여겼을 지도 모른다. 서로에게 그늘을 제공하며 같이 성장하다가, 죽은 후에는 사람들에게 온기를 제공하는 땔감이 되어 마지막 불꽃을 발하는 따뜻한 존재!

남들과 ‘다른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지 않기 위해 ‘침묵’이라는 가면을 쓰고, 모두가 자신의 진짜 정체성을 감추려는 사회는 '비겁한 사회'이다. 모두가 가면을 쓰라고 서로가 강요한다면 주먹과 칼을 사용하지 않을 뿐, 그건 또 다른 의미에서의 ‘폭압적인 사회, 잔인한 사회’이다.

나와는 다른 유형의 음식을 먹는 사람, 보는 것과 듣는 것이 자유롭지 못한 사람, 몸이 불편하여 이동이 자유롭지 못한 사람, 태어날 때 부터 유전자 이상으로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 지를 보면 그 사회의 ’성숙함’의 정도를 알 수 있다.

작가는 우리 사회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행동을 해야 ’나무처럼 더불어 살고자 하는 유별난 주인공‘을 품을 수 있을 지를 시적인 언어로 참혹하게 묘사하는 듯 하다.

나와 확연하게 다른 식성과 가치관, 이데올로기를 가진 사람들을 인정하지 못할 때, 그 대상은 어떻게 파괴되어 가는 지를 세 편으로 구성된 각각의 스토리에서 관점을 바꾸어 가면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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