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움...

외로움을 통한 혼자 있음의 환희.

(황동규 시인이 홀로움이란 신조어를 조탁했다고 함.)

...

외로움에 익숙 해 지다보면 어느 순간 홀로움 속에 있는 나를 발견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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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후배가 과거 남자친구(내가 볼때는 이들 둘의 관계가 현재 진행형으로 보이지만)와의 문제로 한 학기 내내 나에게 자문을 구했다.

먼저 웃음이 나온다.연애경력 0초인 나에게 종종 주위 사람들이 푸념섞인 그들의 연애문제를 진지하게 상담한다는 사실에.

한편으론 고맙다.그들에게만큼은 심각한 문제를 내게 토로하고 위로 받고 싶어한다는 사실에.

또 한편으론 서글퍼진다.결국 나는 늘 사랑에 연애에 언제나 방관자적 입장을 고수한 채 한 걸음 물러나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그러다가 화가난다.그들을 옭아매는 실체는 남성의 그늘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여성 그들의 나약함이라는 사실에.

사랑에 대한 나의 생각은 늘 단순하다.사랑은 남녀 사이에서 벌어지는 감정적인 그 무엇 이전에 두 사람 사이에서 이성(理性)적으로 맺어지는 긴밀한 관계맺음 이라고.그래서 이별에 대한 나의 생각 역시 단순하다.홀연히 마음 한 구석을 자리잡은 이성(異性)의 자리가 비워져버렸다라는 그 두려움 이전에 영혼을 교류 할 소중한 한 사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다라는 서글픔이라고.

하지만 아쉽게도 내 주변의 그녀들은 언제나 남성의 품에서 벗어난 자신의 존재를 위태롭게 여긴다.남성의 품 속에서 삶의 고단함이 위안을 받을 수 있다라는 사실을 부인하고 싶지도 않고 여성 또한 남성을 포용할 수 있다는 사실 역시 인정하며 이는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는,지극히 자연스러운 인간 관계의 한 모습이라고 생각한다.그런데 그랬던 두 남녀 관계가 끝이 난 후,홀로 남겨지게 된 여성들은 한동안 존립위기에 놓인다.(특히 그런 여성들에게는 또다른 남성을 만나 안주하고 정착하려는 성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분명 남성은 여성의 삶의 한 시기,풍성한 자양분이었음에는 틀림이 없으나 -동시에 남성의 삶에 있어서도 여성은 풍성한 자양분이었다- 그가 여성의 삶에서 제외되면 그녀의 존재 자체를 위태롭게 하는 그 무언가...바꿔말해,여성 존립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보호막이 었던 것일까... !)

...

오늘 신문 토론 면에 나온,마음에 드는 기고문이 있어 옮겨 적을까 한다.

::: 한겨레 신문, 정희진 <스와핑을 위하여>

'북핵 문제'라는 말은 조지 부시의 언어다.이 말은 이미 북한에 핵이 있는 것처럼 간주한다.이러한 명명에서 문제 집단은 전쟁을 일으키려는 미국이 아니라 핵을 보유한 것으로 가정된 북한이 된다.대개의 사회적 논쟁과 마찬가지로,인간의 섹슈얼리티와 여성문제에 관련한 논쟁도 그 논의 구도 자체가 '정답'을 찾지 못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양성 평등'이나 '여성의 사회 진출'은 내가 피하는 말들 중 하나다.'북핵 문제'처럼 이러한 용어들은 자신의 고통을 지배자의 언어로 표현해야 하는,자기 언어를 갖지 못한 모든 사회적 약자의 딜레마를 압축한다.

'양성 평등'은 인간이 두 성으로 구성되었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이러한 인식 체계는 여성도 남성도 아닌 양성구유자로 태어나는 사람의 존재를 비가시화하고,양성의 경계를 문제화하는 트랜스젠더 같은 성적 소수자를 '제3의 성'으로 전락시킨다.'여성의 사회 진출?' 그렇다면,여성이 생활 했던 가정은 사회가 아닌가?가정과 사회를 상호 배타적인 공간으로 상정하는 이러한 논리로 인해,가정에서 여성이 폭력을 당해도 '사회의 질서'인 인권이나 민주주의 개념이 적용되지 않는다.

논쟁 구도 자체가 중산층 남성의 시각에서 구성된 대표적인 예가 배우자 교환 섹스,스와핑이 아닌가 싶다.성 보수주의("타락이다")와 성 자유주의("사생활이다")의 구도로 진행된 이 논쟁은 스와핑의 '본질'에 접근할 수 없을뿐더러,이러한 '보수'와 '자유'는 모두 여성 억압을 정당화,정상화한다.남편의 강요로 아내가 스와핑에 참가했을 것이다,교환 섹스에 참여한 여성은 아내가 아니라 유흥업소 종사 여성이었다 등의 스와핑에 대한 항간의 '조롱'은,역설적으로 스와핑의 급진성을 말해준다.자본주의 사회에서 일부일처제 가족의 기본 기능은 계급의  재생산이다.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스와핑은 여성의 성에 대한 이중 잣대와 자본주의에 봉사하는 일부일처제에 대한 '항거'다.스와핑을 성적 타락으로 보는 시각에서는 소위 '사회 지도층 인사'의 스와핑에 대해 격분할 수밖에 없는데,이는 스스로 '지도층'의 섹슈얼리티를 모방해야 할 규범으로 삼기 때문이다.

스와핑 비난의 근거인 "일부일처제의 신성성"은,대한민국이 마치 일부일처제 사회인 듯한 착각을 유도한다.그러나 역사상 한 한번도 일부일처제가 실현된 사회는 없었다.부계 가족의 영속성은 여성의 섹슈얼리티 통제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에,일부일처제는 여성에게만 강요되어 온 규율이었다.일부일처제 현실은 가면극일 뿐이다.남성 사회는 일부일처제를 보완하기 위해 성 매매,축첩,외도 등 다양한 제도를 발전시켜 왔다.실질적인 일부일처제가 가능하려면,모든 정치,경제 권력의 반 이상을 여성이 소유해야 한다.그렇지 않은 사회-현재 한국사회-에서는,남성은 언제 어디서든 한 명 이상의 여성을 취할 수 있다.이때 여성은 교환가치로서,남성 간에 '유통'되는 신세를 면할 수 없다.

반면,스와핑을 옹호하는 대표적인 논리는,그것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프라이버시"라는 것이다.이러한 논리 역시.마치 모든 사람에게 프라이버시 권리가 있는 것 같은 환상을 준다.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개인이 될 수 없다.가정이 사적인 공간일까?아마도 남성에게는 그럴 것이다.그러나 대다수 여성에게 가정은 노동의 공간이고,프라이버시를 침해받는 영역이다.여성이 타인을 위한 노동에서 벗어나 개인으로서 사생활을 영위할 수 있으려면,남성과는 반대로 가정 밖으로 나와야 가능할 것이다.인간의 성생활은 프라이버시 영역일까?아마도 이성애자 남성에게는 그럴 것이다.하지만 동성애자나 여성에게 섹슈얼리티는 공적인 이슈이며,정치적 투쟁의 장이다.

스와핑 실천의 '급진성'에 비하면,이에 대한 한국사회의 사유는 너무나 가난하고 상상력이 없다.스와핑이 '아니라' 스와핑에 대한 해석이,내겐 더 위험스러워 보인다.

...

"양성 평등"이나 "여성의 사회 진출"...이라는 표현을 나 역시 전부터 아니꼽게(?) 보아왔다.이러한 언어 표현 저변에는 남성 우월의식이 상정되어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비록 사소한 부분에서였지만 내 주변 여성들의 나약한 가치관과 정체성(물론 나도 때로는 '부지불식不知不識'간에 여성인 나 자신에 대한 남성중심사회의 억압과 통제를 용인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을 접할 때면 그로부터 내 허술한 사고를 반추하는 계기로 삼음과 동시에 그녀들에 대한 우려를 금할 수 없다!

 

덧 붙이는 말: 끝으로 우려스럽다.이와 같은 나의 입장이 사랑"도" 못해본 냉정하고 오만한 한 여성의 항변으로 비춰질까봐.하지만 혹 누군가 그렇다면 내가 여기에 쓴 '통째로 읽어버린 시집'이란 제목의 글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물론 내 책방에 오는 손님도 거의 없고 이 글을 읽을 사람도 거의 없을 테지만...노파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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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동주 <길>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윤동주 시인은 나의 오랜 이상형이었다.

그 분은 고뇌하는,참다운 지성인의 표본이요 하늘,바람,별 그리고 바람을 노래하는,맑은 영혼을 지닌 시인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분의 '序詩'를 가장 좋아하지만 나는 '길'을 가장 좋아한다.

내가 사는 것은...다만...잃은 것을 찾는 까닭이기 때문에......

오늘처럼 잃은게 무엇인지 조차 알 수 없는 날은 시가 그립다.윤동주 시인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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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적이 드문 내 책방을 오늘 살포시 방문하고 돌아간 사람은?

...오늘은 그나마 조금 특별한 날이었다.대단히 특별한 날은 아니고 일상에서 얻게되는 조촐한 기쁨을 누릴 수 있어서 말이다.

아침에 지하철에서 후배를 만나 숨이 차게 이야기를 하고 오느라 지루하지 않았으며(평소 혼자 걷는 것을 좋아하지만 이런 날이 가끔씩 있다는 것은 퍽 즐거운 일이다.)

점심때는 또다른 후배로부터 수첩(학교 자체에서 만든 2004년도 수첩.마침 사려던 참이었는데...)을 선물 받았으며,

집에 가는 길에 내가 생각나서 전화 해주는 친구(수업중이어서 받을 수 없었지만...그래도 어찌나 고맙던지...)가 있었고,

나에게 약간의 도움을 구하는 친구의 부탁을 거뜬히 들어줄 수 있었고(특별한 것은 아니고 도서관에서 전화를 받으러 여러번 들락날락 거렸던 것!그러나 그 친구가 나와 함께 계절학기를 듣고 싶었다라는 얘기를 듣고 무척 흐뭇했다!)

가끔 나를 기억해서 일하느라 오늘처럼 분주한 가운데에 일부러 전화를 해 주는 고등학교 친구가 있었고(오늘 그 친구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너랑 전화 통화를 하면 기뻐.유난히 반갑게 받아주거든.목소리에서 이미 느껴져..."...나도 모르는 사실이었다.그렇지만 난 진심으로 기뻤다.그 친구 역시 바쁠텐데 내게 전화도 해 주고...반면 나는 마음과 달리 무관심으로 일관해왔다.미안,친구야!)

교직 과목 수업때 몇 주동안 캠코더 설치를 하느라 수고했다며 선생님께서 초코바를 주셨다.(내가 초컬릿을 좋아한다는 아니 사랑한다는 것은 내 주위 사람이면 모두 다 알것이다.하지만...이번에는 마음만 감사히 받고 아는 후배에게 과감히 주었다.최근에 심각한 우울증과 외로움을 치료하기 위해 초컬릿을 과다 복용 했더니...흑!그래도 매일 매일 나를 유혹하는 핫초코와 그 밖의 초컬릿이 첨가된 무수한 과자들을 뿌리치느라 곤혹스럽다...)

그리고 하루를 마감하는 이 시간...

화려한 대형 책방도 참 많은데 나의 구멍가게 책방을 찾아준(나의 지인일까?) 두 분으로 인해 잔잔한 기쁨이 마음속으로 스며든다.

...

오늘 하루도 감사했다고 당신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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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함과 무기력함이 함께 찾아든 11월을 그나마 굳은 의지로 버텼던 것은 이번달 함께한 네권의 소중한 책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먼저 <전태일 평전>을 이제서야 읽었다.때마침 내가 이 책을 다 읽었던 날이 바로 11월 13일이어서 그 의미가 남달랐다.전태일 열사와 함께 내가 존경하는 또다른 인물...조영래 변호사를 그 한권의 책에서  동시에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크나큰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아쉽게도...내가 그 책을 읽을 즈음엔 노동자들의 시위가 시내 한 복판에서 있었다 한다.화염병을 동반한...

노동자들의 시위 자체에는 내가 그 내막을 샅샅이 알 수 없으므로 감히 뭐라 할 수 없지만...언론에는 그들의 투쟁이 과격하게만 보여서 씁쓸함을 느꼈다.

그들의 불법적인(시위가 불법적이라고 판단하는건 내가 아니라 그들이다.나는 다만 그들의 표현을 빌어 설명하는 것일 뿐) 시위가 있기까지...사태를 악화 시킨건 다름아닌...노동자들을 무조건적으로 비판하는 그들임을 잘 알기에 말이다.

노동자 문제에 관해서는 아쉽게도 여기에 그쳐야 할 것 같다.나 역시도 미래의 노동자가 될 사람이고...아직 노동의 현실을 파악하기에는 모르는게 너무 많으므로...

그 다음으로 읽었던 책은 박노자 씨의 <당신들의 대한민국>이었다.

박노자씨의 눈에 비친 추악한 한국 사회의 이면을 나 또한 들여다 보면서 전적으로 공감이 갔다.바야흐로 외국인 노동자 문제가 불거진 탓일까.(그러나 어이없게도 강제추방이라니...해도해도 너무한 거 아닌가...)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비겁한 한국인들의 의식구조에 나 또한 울컥 화가 치솟았다.나 또한 은연중에 이런 더러운 민족적 기질을 몸에 밴 채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 되돌아 볼 일이다.

올 해 책을 가까이 하면서 얻은 큰 수확은 홍세화라는 한 인물을 발견한 것이다.그런 인물을 이제서야 알았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덕분에 나는 몇 개월 사이 그분의 저서를 모조리 읽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이번 달에는 가장 최근에 나온 <빨간 신호등>을 읽었다.그분의 책을 읽을 때마다 인간적인 따스함이 묻어나는...고뇌하는 지성인의 참다운 모습을 간접적으로 나마 접할 수 있어서,그리고 내가 도외시 했던 현실의 문제를 그분을 통해 접할 수 있게되어서 얼마나 다행으로 여기는지...

마지막으로...기말고사를 준비해야 할 상황인데 나는 요 몇일 전공책을 치워두고 진중권 씨의 <폭력과 상스러움>에 빠져 오늘 드디어 마지막 까지 실소를 금치 못하며 책을 덮었다.그 분의 놀라운 언변에...지하철에서 종종 피식 거렸지만 무엇보다도 그러한 풍자적 해학 뒤에 숨어있는,현실을 바라보는 그 분의 냉철함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난해한 언어들이 종종 내 이해를 방해하였지만...나 역시 진중권 씨의 또다른 팬이 될것 같은 흐뭇한 예감이 든다.

끝으로...아쉽게 이 네권의 책에 밀려난(순전히 분량때문임) 체 게바라,프란츠 파농,마르코스 평전은...기말고사가 끝난 다음에 긴히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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