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서의 여자 대학의 의미와 그 해체에 대한 고찰.

여자 대학이 생긴 이유는 무엇인가? 유교주의적 가치관으로 남성우월주의가 팽배하고 여성에 대한 차별이 이루어지고 있는 시점에서 '여성을 위한 교육'을 하기 위해 여대는 설립되었다. 여대의 설립으로 일부 여성들은 기득권을 쟁취해왔으며(이화여대 출신들이 현재 여성부의 90%를 독점하고 있다.

이제 '양성평등을 위한' 여성부도 생겼고, 우리 사회가 양성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가 되었다. 이런 양성평등 시대에 있어서 여자대학의 존재는 확실히 '구시대적 모순'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사회가 불평등하다는 이야기를 하기 전에, 불평등의 상징이자 이를 야기시키고 있는 여자대학의 해체(곧, 이들의 남녀공학화)를 추진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한다.

현재 가장 기득권을 누려온 이화여대를 보면, 남녀공학과의 학점교류를 미봉책으로 '여자대학이 지니는 단점'을 극복하려 하고 있다. 이러한 교류도 그 범위가 소위 명문대에 한정되어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이화여대는 '성불평등이라는 사회의식'을 바탕삼아 명문 노릇 하고 있지만, 사회적으로 기타 대학과 비교해서 사회진출이나 대학의 아웃풋이 결코 뛰어난 편이 아니다. 단지 '남녀공학에 여성이 진학하지 않았던 시대'를 틈타 우수한 여성인재를 많이 배출했을 뿐 그 어떠한 역할도 하고 있지 않다.

이화여대가 여성운동에 앞장 섰고, 남성우월주의적 사회를 어느 정도 바꿔놓은 점은 긍정적으로 본다. 하지만, 이대 출신들이 스스로의 기득권을 위해 이화여대를 그 장소로 쓰고 있다는 아쉬운 생각은 지워버릴 수가 없다.

이화여대 출신들이 특채로 80% 이상이 보직하게 되는 '여성부'에게 이제는 명목상의 양성 평등을 외칠 것이 아니라 여자 대학의 해체로 우리 사회가 '양성 평등'을 위해 나아가고 있고, 여성만의 교육기관은 더 이상 불필요하다는 인식을 심어주어야 할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

현재 서울대를 비롯 고려대,서강대,성균관대,연세대,한양대 등의 우수 사립대학도 여성을 위한 교육에 대한 여건이 결코 뒤지는 것이 아니다. 실제 올해 수능점수를 봐도 이들 대학과 이화여대는 최소한 10점 이상차를 내고 있다. 이대보다 더 우수한 여성 인재가 진학한다는 이야기이다.

아직도 이화여대 홍보비디오에서는 '남녀공학에서는 차별을 받으니 이화여대로 오십시오'라는 있지도 않은 거짓말을 지어내어 홍보하고 있다. 또, '여성사회진출수로는 우리가 연세대,고려대에 비해 앞섭니다'라는 부족한 사고에서 나오는 홍보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과거 남녀공학의 여학생 비중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결과는 당연한게 아닌가, 게다 과거엔 현재보다 우수한 여학생이 여자대학을 많이 택했기 때문에 여자대학 중 최고인 이화여대에 많은 인재가 몰렸을 것 아닌가? 그러한 시대를 살았던 우리 부모님 세대(40대 이상)에게는 그러한 면이 강력하게 어필한다. 따라서, 다른 남녀공학(특정대학이 아닌)을 갈 바에 이대 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어른들이 많다.

또 몇몇 이대 출신들은 '여자는 이대'라는 이상한 신조어를 만들어 스스로 남성에 대한 여성의 열위를 인정하고 있다. '사회에서 이대를 더 알아준다, 이대출신을 화대한다'는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불평등한 사회를 인정하면서 자신들은 '그 불평등에서 벗어나고 싶다. 다른 여성들보다 우월하다'는 일종의 착각을 범하고 있다고밖에 할 수 없다. 진지하게 여성부에게 묻고 싶다.

양성평등고용제, 호주제 폐지 이러한 문제도 좋다. 부정하고 싶지 않다. 사회적 약자로서의 여성이 보호되어야 한다면 손을 들어주겠다. 하지만, 불평등의 상징인 '여자대학'의 해체에 대해서는 왜 고민을 하지 않는가? 그 이유는 역시나 기득권의 원천이 이화여자대학교이기 때문이 아닌가? 다른 경쟁력을 잃은 여대들은 하나하나씩 남녀공학을 했고, 4년제 중 여대는 이제 몇 개 안 남았다. 그 중 그나마 다른 공학들과 경쟁을 펼치고 있는 대학이 이대와 숙대인데, 양성평등시대에 이들 대학의 존재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여성 사회진출이 활발하면, 남녀공학의 여학생 비중이 증가한만큼 남녀공학 여학생이 멋지게 사회에 진출함으로써 여대의 '성 불평등을 미끼로 한' 경쟁력은 약화될 것이다. 그 점을 긍정적으로 본다. 실제로 여대 출신에 대한 평가는 SK그룹의 신입사원 학벌 지표에서 나타났다. 여성이고 남성이고를 떠나서 서울 주요대학은 90점, 이화여대는 80점, 숙명여대는 70점, 기타 여대는 50,60점이었다. 이런 와중에 더 이상 여대가 무슨 경쟁력을 가진다고 할 수 있는가?

선진국의 경우 남녀공학의 여학생 비중이 50% 에 육박하고 있다. 여자대학이 이를 가로막고 있는 우리나라의 경우 남녀공학의 여학생 비중은 현재 30% 을 겨우 넘어선 상태이다. 물론 그것도 특정학과(어문계열,사범계열,생활과학계열 등)에 한정되어 50% 이상을 차지하기 때문에 나타나지 또 다른 특정학과(법정계열,상경계열,공학계열)의 경우 20% 도 채 안 되는 대학이 많다. 이는 남녀공학보다는 이들 학과의 경우 여대를 가는 게 '차별받지 않는다'는 잘못된 사회적 편견에서 일어난 것이다.

여대의 해체는 두 가지 방법에 의해서 가능하다.

첫째, 여성부가 직접적으로 여자대학 조직 해체를 강력하게 요구하는 것이다. 그 대학의 폐교가 아닌 남녀공학화를 의미한다. 양성 평등 시대에 여대의 해체는 큰 성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본인은 이것을 강력하게 여성부에 건의하는 것이다. 성적으로 진보적인 사회에서 '여자대학의 조직적 해체'는 필수라 생각한다. 이화여대 출신들이 기득권을 챙기고 있는 여성부에서 이화여대 해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많은 네티즌들과 생각이 있는 시민들, 언론인들의 힘으로 이루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두번째, 남녀공학으로 우수한 수험생들이 많이 진학하여 스스로의 경쟁력을 잃고 여자대학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이는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 현재 추세로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올해 이화여대 입학성적이 이를 증명한다.

물론 장애물은 있다. 그 장애물에 대해 알아 보았다. 이것에 대해 언급할 필요성을 느끼는데,

바로 그것은 여자고등학교이다. 여자고등학교에서 여자라면 '이대'에 가는 것을 최선의 가치로 여긴다. 이화여대 합격자수로 고등학교의 서열(?) 매기기에 한창인 것을 보면 비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또, '다른 여대'도 남녀공학에 비해 선호받는다.

그러한 편견은 강남 8학군, 지방으로 갈수록 더욱 확고해진다. '여자로서 이대생은 화대받는다'는 편견이 있다. 이러한 편견을 만들어내는 곳이 여자고등학교의 교육이라고 들었다. 실제 이대를 죽어도 쓰기 싫었는데, 써야만 했던 남녀공학 여학생에게 직접 들은 얘기다. 이화여대 합격자수를 게시하고, 남녀공학에 차별이 있을 줄 모른다며 이화여대로의 진학을 권유하는 진학담당 교사들로부터 '잘 모르는 여고생'들은 마냥 이대가 좋다고 생각하게 되고 이를 목표로 공부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여자고등학교에 대해서는 왜 태클을 걸지 않는가? 단순히 이화여대 진학률을 높이기 위해 기를 쓰는 몇몇 고등학교를 방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약간 논외의 이야기지만, 한 마디 더 하자면 여자는 어문,사범,생활과학 등이 적성에 맞다는 의식을 중등교육 때부터 심어준다고 한다. 여성부나 여성단체에서 이공계,정계,재계에서 여성의 인원이 부족하다고 무조건 할당제를 실시하는데 그런 소극적 방법보다는 중등교육에서의 '성 역할 규정'을 바로잡아 수험생의 의식을 바꾸는 그런 적극적 방법을 취하는 것이 어떨까?

'여학생들에게 사회적 모순을 심어주는' 이러한 여자고등학교들에 아무런 제약을 가하지 않는 것은 여성단체 기득권의 원천인 이화여대에게 得(득)이 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失(실)이 된다면 당장이라도 문제점을 고치려고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여자고등학교가 이화여대 합격생을 많이 배출하고 있는 게 사실이고 그들의 기득권 유지(최고의 여성집단)에 한 몫 하는 것도 사실이다.

 상식적으로 제 살 깎아먹기는 불가능한 것인가?

하지만, 자신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한국 사회를 위해 성에 따른 전공 나누기를 가르치고, 특정대학(이화여대)에 치우친 진학 상담를 자행하는 여자고등학교들에 대해 강력한 제약을 가해야 한다. 또한, '여자는 여대가는게 낫다'는 어른들의 시각, 또는 사회의 시각이 여성 스스로 남성에 대한 비교열위를 인정함을 알고 그러한 시각 개선에 힘써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진지하게 양성평등 시대임을 부정하는, 또는 가로막는 장애물은 여자대학의 해체를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매우 진지하게 고민해보아야 할 문제이고, 본인은 이를 요구한다.

또, 여성단체 뿐 아니라 우리 네티즌 및 의식있는 시민들, 언론인이여! 이러한 주장에 대해 동조하는 이들이여! 각종 인터넷 사이트 및 여러 언론사에 이같은 주장(조금 과격하다면 표현을 바꾸어서)에 대해 한 번 더 고민해 볼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으면 한다.

여자대학 해체의 그날까지..

추신: 이 글이 다른 많은 사이트에 올려졌으면 합니다.

 

인터넷 카페에서 괜찮은 글을 발견하여 옮겨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여대에 다니는 여대생들이(개인적으로 학교 친구와 동생...) 지니고 있는 잘못된 의식에 대해 혼자 떨떠름함을 감출 수 없던 터였기 때문일까...이 글은 내게 적잖은 문제의식을 건내주었다. 

몇몇 오만한 이대생(그녀가 본디 겸손을 모르는 사람인지 아니면 이대 그 특유의 거만함이 그녀를 그렇게 변모시켰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을 만나본 나로서는 같은 여대생으로서 부끄러움을 감출 수가 없다.

여대 사범대학을 다니는 내 주변의 친구와 후배들은...여대에 교사(아직까지는 장래의 교사가 된다는 가정을 하고 있지만)...라는 사회가 심어주는 빌어먹을 특권의식에 휩싸여 "사"자 남편과 결혼할 높은 가능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내심 좋아한다.

결국 그들과 같은 부류에 속하게 된 나...나란 여성은 무엇인가...?

교사가 되고자 한 것은 어린시절부터 단 한번도 변한적이 없었던 오랜 내 꿈이다.소중한 꿈이다.

그리고 여대에 진학하게 된 까닭은 여대만이 가지고 있는 여성을 위한 고등교육이라는 기치가 와 닿았기 때문이다.실로 전공인 교육학과 수업에서도 남녀공학 대학의 교육학과에 없을 여성주의 교육, 여성문화와 교육등 사회적 약자로서의 여성을 위한 특별한 커리큘럼은 여전히 만족스럽고 내 선택에 대해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다만...여성의 지위를 스스로 격하시키는 일부 여성들의 그릇된 가치관은 같은 여성인 나조차 분하기만 하다.

어느 진보적인 여성학자의 말이 문뜩 떠오른다.

소수의 엘레트 여성의 사회적 진출과 권력 획득은 다수의 여성들을 위한 혜택이나 보상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이대출신의 특혜를 입은 권력층의 여성들이 이끄는 여성부...가 이를 방증하는 것일테고,

그리고 내가 목격한 내 나이 또래의 유능한(?) 여대생들은 지도층 여성의 전처를 밟기 위해,그들이 누렸던 특혜를 고스란히 따 내기 위해 후학으로서 고군분투하니 말이다.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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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시를 만났던 때는 고등학교 삼학년 수능시험을 며칠 앞뒀을 때였다.

전동성당 보좌신부님의 강론 말씀이 참으로 좋아서 일요일 자율학습을 마치고 그곳에서 미사를 보았었는데 강론중에 신부님께서 그 특유의 경건한 음성으로 낭송하셨던 이 시는...그냥 듣고 흘려버리기에 너무도 눈물겨웠다.

그래서 그때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 했었다.

그러나 그 시를 달리 알아낼 방법이 없었고 그럴 겨를도 없었던터라 이내 머리속에서 서서히 지워버렸다.

그렇게 두서너 해가 흘러가고 어느 날 나는 우연한 기회로 이 시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두번 째 이 시를 만나게 되었을때 나는 속으로 참 많이도 울었다.

다시 이 시를 만났던 그 때...나는 감당할 수 없는 많은 슬픔을 감추고 살았기 때문이었다.

그 후로 나는 이따금 삶의 무게에 짓눌릴 때면 이 시를 몰래 꺼내서 나직이 되뇌인다.

...오늘처럼 살아가는 게 참으로 버거운 날에는 꾸깃한 종이 한장 펼치어 꾹꾹 참아왔던 눈물을 적시며 한줄 한줄 번지어가는 희망을 아껴읽는다. 

 

 

::: 박노해, 굽이 돌아가는 길

 

올곧게 뻗은 나무들보다는

휘어 자란 소나무가 더 멋있습니다

똑바로 흘러가는 물줄기보다는

휘청 굽이친 강줄기가 더 정답습니다

일직선으로 뚫린 바른길보다는

산따라 물따라 가는 길이 더 아름답습니다

 

곧은 길 끊어져 길이 없다고 주저 앉지 마십시오

돌아서지 마십시오

삶은 가는 것 입니다

그래도 가는 것 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건

아직도 가야 할 길이 있다는 것

 

곧은 길만이 길이 아닙니다

빛나는 길만이 길이 아닙니다

굽이 돌아가는 길이 멀고 쓰라릴 지라도

그래서 더 깊어지고 환해져 오는 길

서둘지 말고 가는 것입니다

서로가 길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생을 두고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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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에 다니는 우리 큰딸 아이의 담임선생님은

반 아이들에게 하루도 거르지 않고 메일로

학급통신을 보내주십니다.

아주 멋진 선생님이시죠.

그 중에 너무나도

감동했던 글이 있어

여러분께도 보내려 합니다.

좀 길지만 양해해 주세요.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

당신은 오늘 하루가 설레었나요?

오늘 밤, 눈을 감으며

당신은 괜찮은 하루였다고 느낄 것 같나요?

지금 당신이 있는 곳이 그 어디보다도

소중하다고 생각되나요?

 

선뜻, "네, 물론이죠" 라고

대답하지 못하는 당신에게

이 메일을 선사합니다.

이 글을 읽고 나면

주변이 조금 달라져 보일지도 모릅니다.

 

지금 세계에는 63억의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것을

100명이 사는 마을로 축소시키면

어떻게 될까요?

100명 중

 

52명은 여자이고

48명이 남자입니다

 

30명은 아이들이고

70명이 어른들입니다

어른들 가운데

7명은 노인입니다

 

90명은 이성애자이고

10명이 동성애자입니다

 

70명은 유색인종이고

30명이 백인입니다

 

61명은 아시아 사람이고

13명이 아프리카 사람

13명은 남북 아메리카 사람

12명이 유럽 사람

나머지 1명은 남태평양 지역 사람입니다

 

33명이 기독교

19명이 이슬람교

13명이 힌두교

6명이 불교를 믿고 있습니다

5명은 나무나 바위 같은 모든 자연에

영혼이 깃들여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24명은 또 다른 종교들을 믿고 있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믿지 않고 있습니다

 

17명은 중국어로 말하고

9명은 영어를

8명은 힌디어와 우르두어를

6명은 스페인어를

6명은 러시아어를

4명은 아랍어로 말합니다

이들을 모두 합해도 겨우 마을 사람들의

절반밖에 안 됩니다

나머지 반은

벵골어, 포르투갈어

인도네시아어, 일본어

독일어, 프랑스어, 한국어 등

다양한 언어로 말을 합니다

 

별의별 사람들이 다 모여 사는

이 마을에서는

당신과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일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일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일들을 안다는 것이

가장 소중합니다

 

또 이렇게도

생각해 보세요

마을에 사는 사람들 100명 중

 

20명은 영양실조이고

1명은 굶어죽기 직전인데

15명은 비만입니다

 

이 마을의 모든 부 가운데

6명이 59%를 가졌고

그들은 모두 미국 사람입니다

또 74명이 39%를 차지하고

겨우 2%만 20명이

나눠가졌습니다

 

이 마을의 모든 에너지 중

20명이 80%를 사용하고 있고

80명이 20%를 나누어 쓰고 있습니다

 

75명은 먹을 양식을 비축해 놓았고

비와 이슬을 피할 집이 있지만

나머지 25명은 그렇지 못합니다

17명은 깨끗하고 안전한 물을

마실 수조차 없습니다

 

은행에 예금이 있고

지갑에 돈이 들어 있고

집안 어딘가에 잔돈이 굴러다니는 사람은

마을에서 가장 부유한 8명 안에 드는

한 사람입니다

 

자가용을

가진 사람은 100명 중

7명 안에 드는

부자입니다

 

마을 사람들 중

1명은 대학교육을 받았고

2명은 컴퓨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14명은 글도 읽지 못합니다

 

만일 당신이

어떤 괴롭힘이나 체포와 고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과 양심에 따라

움직이고 말할 수 있다면

그렇지 못한 48명보다 축복받았습니다

 

만일 당신이

공습이나 폭격, 지뢰로 인한 살육과

무장단체의 강간이나 납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렇지 않은 20명보다 축복받았습니다

 

1년 동안 마을에서는

1명이 죽습니다

그러나 2명의 아기가

새로이 태어나므로

마을 사람은 내년에

101명으로 늘어납니다

 

이 메일을 읽는다면

그 순간 당신의 행복은

두 배 세 배로 커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에게는

당신을 생각해서

이 메일을 보내준

누군가가 있을 뿐 아니라

글도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행복은

지금 당신이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세상에 풀어놓은 사랑은

돌고 돌아 다시 돌아온다고

 

그러니까 당신은

맛을 깊이 음미하며 노래를 부르세요

신나게 맘껏 춤을 추세요

하루하루를 정성스레 살아가세요

그리고 사랑할 때는

마음껏 사랑하세요

설령 당신이 상처를 받았다 해도

그런 적이 없는 것처럼

 

먼저 당신이

사랑하세요

이 마을에 살고 있는

당신과 다른 모든 이들을

 

진정으로 나, 그리고 우리가

이 마을을 사랑해야 함을 알고 있다면

정말로 아직은 늦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갈라놓는 비열한 힘으로부터

이 마을을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교회가 정한 해외원조주일이다.

그래서 2차헌금을 하는 날이기도 하다.

비상금까지 털어 5000원을 봉헌하였다.1000원이면 북한에서 5인가족이 하루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하고 아프리카에서는 몇 Kg의 식량을 살수도 있다고 한다.그래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액수가 적어서도 그랬지만...이 지구상에 내가 아무런 감사 없이 누리는 그 많은 것들이 허락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었다.

한국인은 기아,질병,재해,전쟁등으로 고통받는 세상 사람들을 위해 1년에 평균 250원을 기부한다고 신부님께서 말씀하셨다.한끼 라면값도 안되는 액수라면서 신부님 자신부터 반성하셨다고 덧붙여 말씀하셨다.

...

내가 아무런 거리낌없이 누리는 무수한 축복을 누구에게나 스스럼없이 나눌 수 있는 삶을  위하여...기도하고 깨어있으리라.

잊지 말자...선량한 그 수많은 눈길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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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덕이네 밭에는 감자, 호박, 옥수수 그리고 들깨가 심어져 있습니다. 순덕이네 할머니는 어린 순덕이 간식거리를 마련하기 위해 해마다 어김없이 감자와 옥수수를 밭 한쪽에 심습니다. 새순이 땅위로 하나둘 얼굴을 내밀던 어느 날, 마을 이장 김씨 아저씨의 포대자루에서 강낭콩 두 알이 떨어져 또르르 구르다 순덕이네 밭에 이르러 멈추었습니다.

  "아휴, 아퍼." 흙 속에 파묻힌 알콩이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괜찮니, 알콩아? 그런데 여기가 어디지? " 뒤따라온 달콩이가 근심스러운 마음에 물었습니다.

  "우린 지금 흙 속에 있는 거야. 하마터면 우리도 장터에 팔릴 뻔 했지 뭐야."

  "정말?" 기쁨에 찬 목소리로 달콩이가 물었습니다.

  "응. 우리는 며칠 있으면 다시 흙 위로 나가게 될 거야."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알콩이가 대답했습니다.

  "김씨 아저씨의 포대자루에 다른 강낭콩들과 섞여 있으면서도 나는 줄곧 다시 밭에 뿌려지기를 바랐는데...... 정말 믿어지지가 않아." 여전히 믿기지 않다는 듯이 달콩이가 얘기했습니다.

  "근데 여기 너무 답답하지 않니? 깜깜하고 숨이 막힐 것 같아." 볼멘소리로 알콩이가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달콩이가 대답하기를,

  "내가 싹을 틔울 수 있다면 이런 것쯤은 조금도 문제 될게 없어. 한번 생각해 봐, 알콩아! 비록 어둡고 견디기 힘들지만 네 말대로 며칠만 지나면 우리는 다시 땅 위로 무럭무럭 자랄 수 있을 거야."

  어두운 땅 속에서 알콩이와 달콩이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감자 아주머니가 입을 열었습니다.

  "애들아, 처음에는 이 어두운 곳이 무척 싫을 거야. 그렇지만 생각해 보렴! 너희들은 여기에 뿌리를 내리게 되고 흙으로부터 영양분을 얻게 되는 거란다. 그러나 아쉽게도 흙 밖으로 나가면 세상 사람 모두 너희들이 커나가기 위해 흙 속에서도 보이지 않게 노력해 왔었고 또 여전히 계속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 할 거야."

  감자 아주머니는 마치 엄마처럼 너무도 다정하게 땅 위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알콩이와 달콩이에게 당부의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애들아, 땅 위로 올라가더라도 이것만은 기억해야 한단다. 겉으로 드러내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란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너희가 자라기 위해서는 지금과 같은 보이지 않는 노력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되는 거란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너희 자신을 속이지는 말거라, 알겠니?"

  감자 아주머니의 말에 알콩이와 달콩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런데 무척이나 고단했던 하루를 보냈기 때문일까요? 알콩이는 감자 아주머니의 말씀을 마음에 미처 새기지 못한 채 어느 새 지쳐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잠이 든 알콩이 옆에서 푸른 싹이 된 자신을 상상하던 달콩이도 잠시 후 깊은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요. 촉촉한 뭔가에 놀라 달콩이가 긴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힘차게 기지래를 펴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순간, 달콩이 자신이 콩 껍질에서 벗어나 땅 위로 목을 빠꼼히 빼고 있는 게 아닌가요! 자신도 모르게 환호성을 지르고 달콩이는 여전히 잠들어 있는 알콩이를 깨우기 시작했습니다.

  "알콩아, 눈 좀 떠봐. 어서 일어나보라고."

  달콩이의 성화에 못 이겨 가까 스스로 눈을 뜬 알콩이는 이내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이게 뭐야. 어, 비잖아. 에이. 내 몸이 다 젖네! 이럴 줄 알았으면 계속 땅속에서 자는 건데."

  듣고 있던 달콩이가 이야기 했습니다.

  "알콩아, 넌 우리가 싹을 틔운 게 조금도 기쁘지 않니? 비록 비에 몸이 젖긴 하지만 비를 맞아야지 우리도 자랄 수 있는 거잖아."

  "그걸 누가 모른대? 흙, 비, 햇빛 이 모든 게 있어야 내가 자랄 수 있다는 것쯤은 나도 안다고!" 발끈 화를 내며 알콩이가 훽 고개를 돌렸습니다.

  "곧 비가 그치면 햇볕이 내리 쬘 거야. 그럼 그때 몸을 말리자." 달콩이는 알콩이를 달리 위로할 수가 없어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는 조금 더 자라기 위해, 힘들지만 내리는 비를 온몸으로 흠뻑 빨아들였습니다.

  다음 날 구름이 걷히자 비가 내리던 어제의 하늘에서는 눈부신 햇볕이 순덕이네 밭에도 내리 쬐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맑은 하늘의 햇빛은 알콩이와 달콩이를 비추었습니다.

  어느 덧 알콩이와 달콩이의 몸에서도 떡잎 두장이 떨어져 나가고 여린 줄기와 작은 잎이 움트기 시작했습니다. 계속 되는 맑은 날씨 속에서 알콩이와 달콩이의 여린 줄기는 굵고 튼튼한 줄기가 되었고 말려 있던 작은 잎들도 이제는 크게 펼쳐지게 되었습니다. 알콩이 달콩이 모두 따사로운 햇볕을 온 몸에 가득 담고 쑥쑥 자라가고 있었습니다.

  햇빛을 향해 자라가는 일이 무료하게 느껴지는 어느 날 오후였습니다. 알콩이는 '이제 내 키도 제법 컸겠지? 내가 달콩이보다 조금 더 크니가 어쩜 내가 이 밭에서 제일 클지도 몰라' 라고 생각하며 순덕이네 밭을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웬걸요! 순덕이네 밭 저 끝 쪽에 그 높이를 알 수 없는 옥수수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라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너무 분한 나머지 알콩이는 투덜대기 시작했습니다.

  "달콩아, 저기 좀 봐! 어서 저기 좀 보라고!"

  매일같이 햇빛을 향해 고개를 들어올리며 자라던 달콩이가 알콩이의 성화에 못 이겨 알콩이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습니다. 달콩이의 눈앞에 펼쳐진 옥수수네 가족의 모습은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달콩아, 우리도 옥수수네 가족처럼 매일 햇볕을 받고 자라는데 우린 왜 이렇게 작은 거지? 에잇... 평생 햇볕을 쬐어도 난 저렇게 자랄 수 없잖아." 잔뜩 화가 난 알콩이는 더 이상 태양이 걸려있는 하늘을 바라보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 사실 나도 옥수수네 가족이 무척 부러워. 그렇지만 여기서 포기 할 수는 없을 것 같아. 옥수수네 가족처럼 자랄 수 없더라도 하는 데 까지 최선을 다하고 싶거든."

  풀이 죽은 알콩이와 달콩이에게 들깨 아저씨가 다가와 말을 건냈습니다.

  "애야, 우리들은 저마다 커가야 할 몫이 있는 거란다. 그러니 너무 서운해 하지 말거라." 들깨 아저씨는 축 늘어진 알콩이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말을 이어나갔습니다.

  "아저씨 역시 처음에는 저렇게 높이 자라는 옥수수씨네를 보면서 좌절 했었단다. 나 역시 쭉쭉 커나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왔는데 왜 나는 옥수수씨네처럼 자랄 수 없나 하고 말이다. 그런데 세상은 그게 다가 아니란다. 우리가 어디까지 자라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자세로 어떻게 자라나가는지, 그 과정이 중요한 거지. 너희는 지금껏 강낭콩으로서 최선을 다해 자라왔었고 난 다만 너희들이 앞으로도 그렇게 자라주길 바란다. 그게 너희가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임을 명심하거라."

  들깨 아저씨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며 알콩이는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달콩이도 덩달아 후련한 마음으로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알콩이와 달콩이의 잎 사이에서 흰색 분홍색 꽃망울이 솟아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하나 둘 터지는 꽃망울을 보면서 알콩이와 달콩이는 매일 즐거운 탄성을 질러댔습니다. 푸른 잎 사이 여기저기에 아기자기한 꽃들이 수줍게 피어있는 모습을 보고 알콩이가 이야기 했습니다.

  "그런데 말이지, 달콩아. 우리 꽃은 너무 작지 않니? 모양도 볼품이 없고 색도 화려하지 않고 말야. 벌과 나비도 우리 꽃 주위에 자주 놀러 오지도 않잖아."

  "그래도 난 내가 꽃을 피웠다는 사실에 너무 만족스러운걸. 넌 기쁘지 않니?"

  "아니 뭐... 꼭 그런건 아니지만..."알콩이는 그래도 뭔가 아쉽다는 듯이 말끝을 흐렸습니다.

  알콩이와 달콩이가 꽃을 피우자 누구보다 반겨주었던 호박 아주머니가 지켜보다가 시무룩해진 알콩이에게 말을 건냈습니다.

  "알콩아,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꽃이 있지만 저마다의 꽃들은 서로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는단다. 세상 사람들은 가시 박힌 장미꽃이 오만할 거라고 생각하고, 담장 밑의 앉은뱅이 꽃 채송화를 가엽게 여기고, 들판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들국화를 함부로 꺽어도 된다고 생각하고, 또 큼지막한 내 호박꽃을 볼품없다고 여기지만 사실 우리 꽃들은 저마다 서있는 자리에서 허락된 한 철, 열정을 다해 피고 지는 거란다. 물론 여기에는 시샘하는 마음이나 경쟁하는 마음이 들어설 자리도 없고 말이다."

  잠시 생각에 잠기던 호박 아주머니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한번 바라보렴. 너희 눈에도 내가 뚱뚱하고 못생긴 꽃으로만 보이니?"

  "그럴 리가요." 알콩이가 정색을 하면서 대답하였습니다. 이어서 달콩이도, "아주머니는 지금 피어계시는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하신걸요! 아주머니께서 꽃을 피우셔야 나중에 그 자리에서 호박이 영글잖아요." 라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래. 너희 말처럼 내가 최선을 다해 꽃 피워야지 내가 꽃을 피운 그 자리에서 호박이 자라는 거란다. 그럼 너희에게 내가 질문 한 가지를 할 테니 잘 듣거라." 아주머니는 알콩이 달콩이를 번갈아 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꽃이 이 아주머니의 꽃보다 작고 눈에 띄지 않는다고 해서 너희가 피운 꽃들이 쓸모없는 것이니?"

  이제야 알겠다는 듯이 알콩이가 씩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물론 아니죠. 이제야 알겠어요. 우리가 꽃을 피운 의미를요."

  달콩이도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습니다.

  "아주머니 꽃에서 호박이 자라날 때쯤 우리의 꽃에서도 꼬투리가 자라나는 거겠네요."

  "그래 그렇단다. 이제 너희도 너희의 지금 모습 그 자체가 너무도 의미 있고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이 무척 가치로운 과정의 한 부분이라는 것도 알게 됐구나." 아주머니는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이셨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어느새 꽃잎이 말라 오므라들고 그 자리에서 꼬투리가 쭈삣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두어 밤을 더 자고 나니 기다란 꼬투리에 몽글몽글 콩알이 차올랐습니다.

  콩깍지 속에서 잠들어 있는 콩알들은 무슨 꿈을 꾸고 있을 까요. 어둠이 순덕이네 밭에 내려앉자 알콩이와 달콩이는 밤하늘의 별의 세며 그동안 감자 아주머니, 들깨 아저씨, 호박 아주머니께서 들려주셨던 말씀들을 하나 둘 떠올려 봅니다. 콩깍지가 톡 하고 터지는 날, 알콩이와 달콩이는 또로록 땅에 굴러 떨어진 콩알들을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할까요.

  달님도 잠들어 버린 늦여름 밤, 알콩이와 달콩이네 강낭콩들은 푸른 꿈을 꾸며 알알이 여물어 가고 있습니다. 알콩이와 달콩이는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교육과정이란 수업의 기말 과제가 키에르케고르의 주체적 지식의 점유화, 폴라니의 당사자적 지식, 소크라테스의 아이러니,가다머의 해석학적 관점, 장상호의 교육의 재개념화 등이 녹아들어간 소설,시나리오,에세이...등을 쓰는 것이었다.

계절학기 두과목을 듣는게 참 벅찬 일이었지만 좋으신 선생님 밑에서 의미있는 말씀을 들을 수 있었고 내 인식의 성장에도 도움이 되는 시간들이었다.

중문과 수업을 통해 다시한번 인문학을 하는 목적을 되새겨볼 수 있었으며 교육학과 수업을 통해 또다시 앎과 삶의 일치,인식의 성장 그리고 인식 지평의 융합...등 심오한 교육의 과정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만족스러울만큼의 노력을 하지 못해(두과목을 듣다 보니 한과목을 듣던 다른 친구들에 비해 조금 소홀히 했던것 같은 느낌이...)  약간 아쉬움이 남았으나 분에 넘치는 성적을 받아서 기분은 좋다.

교육이란 무엇인가... 아직까지 이렇다 할 만한 대답을 내놓을 수 없는 내게 교육에 관한 나의 첫 창작물(선생님께서는 이번의 "습작"을 통해 더 나은 관점과 안목을 지니게 될 거라 하셨다)은 미흡하지만 어쩜 올바른 교육관의 확립을 위한 첫번째 정리가 될런지도...

"교육은 목표가 아니라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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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설 연휴를 보내고 있다.혼자서...

지독한 우울함을 달래보기 위해 사탕 한알을 야곰야곰 물어보았다.

그래도 입안 가득 퍼저있는 씁쓸함과 떱떠름함을 없앨 수 없다.

시 한편으로 위로 받는다.외로운 나는...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걷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 정호승, 수선화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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