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그인 2003-10-14  

현경아 잘 지냈니?
음..오랜만이다...

메일로 네 안부를 묻고도 싶었지만..네가 여길 자주 들어올 것 같아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글은
김승옥님의 "서울 1964년 겨울"이야...

너는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지만,,뭐..물론 나도 단편을 주로 읽기도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실제 사람들이 쓰는 자서전보다 덜 위선적이고 더 솔직하고 적나라하거든...소설속 인물들이..

1964년 겨울 서울에서 포장마차에서 처음 만난 김씨와 안씨...
서로 이름조차도 모르는 사람들이
꿈틀거림에 대해 얘기하는 것으로 시작해...

평화시장 앞의 가로등들 중에서 여덟 번째 등은 불이 켜있지 않다거나..
화신백화점 육층의 창들중에서 세개에서만 불빛이 나온다거나...

모두가 알 수는 있지만 오직 자신만이 알고 있는 새삼스런 비밀들을 이야기 하는 그들...

너는 그런 적 없니??
모두에게 공개되어 있지만 모두가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온전히 나만 알고 있는 그래서 나만의 비밀이 되는 그런 사실....
그리고 때론 그런 비밀을 갖고 싶은....

결국 모든 것이 공개되어 있는 세상에서도
그 세상을 어떻게 보고, 그 세상에서 무엇을 보아야 하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나 혼자이고..그런 면에서는 누구든지 혼자이고..누구든지 비밀스러우며..누구든지 외로운건가봐...

어쩌면 그 외로움은 스스로 만들어내는 건지도 모르지...

사람은 누구나 외로움을 싫어하지만 그 외로움을 즐기는 지도 몰라..
끊임없이 다른 사람은 모르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그것을 혼자서..아니면 둘이서..셋이서만 공유하는 데에서 오는 묘한 기분을 즐기니까....
아내의 시체를 팔아버린 아저씨를 배타적으로 대하는 김씨와 안씨처럼 말이야...

자신만의 세상에서 산다는 건...
1964년에의 김씨와 안씨에게도 쉬운일이었겠지만
요새처럼 공개되고 개방된 세상에서는 오히려 더욱 쉬운일 인것 같아...
인터넷 까페의 사랑고백 등에는 수없이 따뜻한 위로의 답글이 달리지만
정작 포장마차에서 쉽게 동지를 만나 소주를 마실 수 있는 시대는 결코 아니니까..
공개된 친절함들 속에서 더 혼자이기가 쉬운거니까..

참...우스운 일이지...
만약에 무인도에 살았다면 외로움이 뭔지도 몰랐을꺼야...
사람이 많으니까 외로움이 뭔지도 아는 거잖아..
사람이 많아야만 외로움이 존재한다는 사실...

요즘처럼 이력서를 쓰면서 나를 포장해야 하고 억지로라도 방싯방싯 웃으며 면접을 해야하고, 사회속으로 들어가려고 발버둥치려는 내가 불쌍해지고 그럴때...이걸 읽으면 동지를 만난것 같아...
혼자라는 사실을 내키지 않아 하면서도 묘하게 즐기는 나랑 비슷한 스물 다섯의 두 사람과 친해진 것 같아서...

그들이 1964년에 살고, 그들의 계절은 항상 겨울이고, 또 남자이지만...그래도....
(너도 시간이 된다면 다시한번 읽어봐도 좋을것 같아..^^)
늦은 밤이다...윽..셤공부해야되는뎅..
남은 가을도 잘 지내고...^^
또연락할게~~

 
 
티벳소녀 2003-10-14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인의 발길도 끊긴지 오래된 이 곳에 네 훈훈한 글이 이렇게 조용히 놓여있어서 기쁘다...지친 내 마음이 위로를 받네...
600자 제한이 되어있는 이 곳에 내 마음을 다 담을수 없어 메일로 다시 써야 할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