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진짜로 있다.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를 스티븐 스필버그가 만든 영화.
(그러고 보니 A.I.의 주인공이었던 오스먼트는 요즘 어떻게 지내나...)
A.I.는 상영 전 큰 기대를 품게 했었고 개봉 후 탄성과 탄식을 동시에 불러일으키게도 만든 영화였다. 거장의 손길이 미쳤던 프로젝트였던만큼 진지함이 있었지만 확실히 거장과는 다른 방향의 재능을 가진 스필버그가 (큐브릭의 죽음으로)홀로 마무리하게된 영화의 전개는 '아! 큐브릭이 살아있었다면 다른 영화가 나오지 않았을까'하는 탄식을 짓게 만들었다. (확실히 가수보다는 편곡자가, 배우보다는 감독이 중요하다.)
이 영화 '이끼' 또한 그러한 , 그러나 보다 찐한 아쉬움을 남기는 영화였다. 추리소설같은 분위기, 적당한 공포와 긴장,미스테리, 마지막엔 반전까지 전반적으로 재미와 흥행에 필요한 요소들을 적당히 가지고 있는 영화지만 빈틈이 많이 보이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 빈틈에 예민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럭저럭 재미있게(그렇다 해도 좀 영화가 길기는 길다) 볼수 있다. 하지만 최소한 나는 집중하기가 좀 힘든 영화였다.
내가 생각하는 그 빈틈들을 좀 나열해 보자면
1. 영화가 길다. 물론 밀도있게 길다면 상관없겠지. 하지만 이 영화는 20~30분 정도는 충분히 줄일수 있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든다. 어느 장면하나 공이 들어가지 않은 장면은 없겠지만 완성도와 몰입도를 위해서라면야....
2. 배경설명의 부족함. 주인공격인 유해국(박해일 분)이 뜬금없이 나와서는 영문없이 치밀하고 처절하게 사건을 뒤집어 놓더니 그냥 그게 끝까지 가더라. 이거원... 주인공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주인공의 행동에 공감이 갈것 아닌가. 영문없이 고민도 없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주인공이 참 이해가 안갔다.
조연급 이상으로는 유일한 여자인 영지도 마찬가지. 후반으로 갈수록 비중이 높아지고 설명이 아주 없는 캐릭터는 아니지만 답답한 것은 여전하다. 게다가 캐스팅은 30대배우를하고 화면상으로는 (물론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간혹 20대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 캐릭터는 이야기 전개상 50에 가까운 나이라고 계산이 되는데 아무리 동안이라는 가정을 해도... 막판에 알긴했지만 이 여자가 영화초반에 나왔던 1978년의 그 아이인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냥 이 여자는 어디서 왔길래 이리 비중이 큰가..하는 생각만 내내 했더랬다.
다른 조연도 마찬가지. 마을 이장 아들이라는 사람의 등장도 뜬금없고...
물론 등장인물의 배경을 얼마나 설명하느냐는 감독마음이겠으나 '뜬금없다'는 생각은 안들정도는 되야 하지 않겠나.
3. 만화적인, 상투적인 대사와 구도들..
이젠 잘 기억도 안나서 딱히 자세히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전형적인 대사나 분위기들, 예를 들어 어느 추리물의 주인공이 매번 사건 해결시마다 하는 이야기, "잠깐! 범인은 이 방안에 있습니다!... 범인은 바로....(몇 초 뜸들임)... 당신!"류의 이야기. 그런 이야기들이 곳곳에 있다. 괜히 폼잡고, 괜히 째려보고...
4. 슈퍼맨이 똘아이로..
주인공의 아버지는 사람의 마음을 교화시키는데는 엄청난 재능이 있는 사람으로 묘사되다가 천용택과 함께 시골에서 작정하고 일을 시작한 이후로는 단 한명도 교화에 성공 못하고 모든 이들로부터 미움을 받는다. 이것참.. 아무리 개연성을 만들기 위한 장치라지만 입만 열면 사람들이 모이고 재산을 헌납하던 멀쩡한 사람이 마을에서는 왜 추종자 하나없는 갑자기 누구의 마음도, 바보 천치도 따르지 않는 똘아이가 되었는지는 설명이 없다.
5. 평범남이 슈퍼맨으로
유해국은 죽을 고비를 많이 넘긴다. 심지어는 흉기로 복부를 수차례 찔려서 피를 흘리게 되는데 그 상태로 사실상 밴드 하나 붙이고 액션이 가능해진다. 누군가 치료를 한 번 해주기는 하지만 가내치료로 내장까지 손상됐을 사람을 저렇게 멀쩡하게 만든다는건 참... 신기에 가깝다. 첫번째 사망 사건에서 자신의 연루가능성을 제거하려고 흙으로 피뭇은 손을 닦고 드라이버로 구멍들 뚫린 복부는 대충 옷으로 가리고 멀쩡하게 다니는걸 보고 헛헛..했었다. 아픈건 참아도 흐르는 피는 어쩔껴..
6. 시간흐름의 불일치
마지막 장면에서 사건의 마무리를 맡았던 검사는 (아마도 사건해결 공로로) 서울로 전근을 하게되는데 이 시점은 아무리 생각해도 사건이 종료되고 수개월이내로 판단이 된다. 그런데 그 사이 주인공이 다시 찾아간 마을은 완전 상전 벽해. 없던 교회, 없던 유아원, 없던 건물들이 가득하고 이장이 살았던 시기에는 보이지 않던 주민들이 보인다.(고아원이었든 유아원 이었든 어른도 상당수 있어야 하고) 찬찬히 생각해 보면 사건 종료후 마음 가다듬고 재산정리할 정도의 시간밖에 없었을텐데 마을이 상전벽해가 되었으니....
7. 기타
비밀연결통로로 이용되는 토굴에 왠 조명이 켜 있는지. 그것도 쫓고 쫓기는 사람들이 거의 동시에 이용한 토굴에. 이장이 주인공이 머무르는 집에 염탐을 오면서도 스위치 올리고 온다니 상식적으로 이해 안감. 불끄고 손으로 더듬어가며 몰래 온다면 몰라도..
덕천의 시체가 개울을 건너는 다리 옆에 떠내려온채로 발견. 그런데 살해(예상)장소나 떠내려온 장소나 돌투성이고 물고기조차 맘껏 놀기 힘들정도로 물이 적은데 대체 어떻게 떠내려온건지..
아, 뭐 글로 표현하자니 부족하고 반론의 여지도 있겠지만 생각나는대로 정리한게 이정도니 작정하고 분석하면 맘에 안드는 점으로만 역대 최장의 리뷰를 써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만화는 못보았지만 연재만화로써 전개되는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때는 좀 신경을 많이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들리는 바로는 이끼 팬들이 이 영화는 봉준호나 박찬욱이 만들었어야 했다고들 하던데, 영화를 보고나니 그 심정이 십분 이해가 간다.
마찬가지로
큐브릭 영감님, A.I.는 완성하고 가셨어야죠!
사족.
사진만 보고 영화인줄 알고 리뷰 달았는데 소설이었다는... 오류를 잡아주신 '레몬향기'님께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