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라는 책이 화제다.  사실 밍밍한 제목에다가 삼성의 보이지 않는 관리 때문에
소리소문 없이 사라질줄 알았다.  '몇 주 지나면 존재한 줄도 모르게 잊혀지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렇지만은 않은가 보다.  하긴 나도 아는데 다른 사람은 모르리라고 생각했던게 안이한 생각이었다.
아직 출간된지 얼마 되지 않아 결과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처음 나의 예상보다는 괜찮은 성적을 기록할 것으로 보인다.
 

슬슬 책에 대한 반응이 블로그에 올라오기 시작하는데 나로써는 꽤 당혹스러운 평이 올라왔다.
 

그 글의 요지는 이렇다.(실제 글이 길어 나만의 언어로 옮기니 사용한 단어나 뉘앙스는 조금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전체 요지는 원래의 글쓴이관점에서 크게 왜곡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삼성의 조직원으로 한 배를 탔던 사람이 배신하고 뛰쳐나왔다. 한국(기업)은 다들 마찬가지의 추한 과거를 가지고 있는데
 유독 삼성 때리기를 하고 있는 것이 우려된다. 여기에 동참하는 것은 속물이 겉으로는 당당한척 하려는 심리로 그러는 것은 아닐까?
 예수의 창녀에 대한 비유가 생각난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변호사의 고객 비밀유지 준수관점에서 미국도 이렇게 배신하지는 않는다."

 
사실 변호사의 고객비밀 보호 문제는 내가 법률에 문외한이므로 꾸벅이다.
고객비밀보호가 (범죄를 은폐해도 되는)상위의 법률이라면 그야말로 법대로 하면 된다.
김용철 변호사도 결국 법대로 하지 못한 것에 대해 지적하는 책을 쓴 것이므로 앞으로는 달라보여도 뒤로는 같은 편 아닌가..

 

사실 내가 좀 당황스럽게 받아들인 것은 창녀의 비유 때문이다. 완전히 오적용된 비유라고 생각한다.
로마 치하의 유대나 지금 우리나라나 창녀가 불법적인 존재인 것은 동일하다.
물론 처분방법이 다를 뿐 처벌이 존재하는 것도 동일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지금으로 치자면 성인(聖人)이 아니라 불법을 조장하는 성인(性人)의 모습을 보인 셈이 되겠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의 말씀이 현대의 우리에게도 울림을 주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수보다는 소수자, 강자보다는 약자, 법률보다는 인간에 대한 존중과 배려의 정신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창녀는 남편 없이 혼자 생계를 꾸려야 하는 여성의 불가피한 선택중 하나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아! 이 지식의 짧음이여. ‘~것이다’라고 못쓰고 ‘~알고 있다’라고 밖에는 못쓰니….)
즉, 결과만으로 판단하지 않고 그 과정까지 감안한 돌봄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만약 그 여자가 풍요롭고(또는 부족하지 않고) 절박한 사정이 없었음에도
단지 남자와 즐기기 위하여 그런 생활을 했다면 예수가 그렇게 말씀하셨을까?  Definitely, No!다
 

삼성을 창녀로 비유하고 있는 글쓴이의 인식으로부터 삼성이 범죄를 저질렀다는 점은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삼성이 과연 소수자인지, 약자인지 따져봐야 할 차례다.  과연 그런가?  그렇지 않다는 것은 그야말로 두 말하면 잔소리다. 오히려 한국은 반쯤은 삼성제국에 점령 되어버렸다고 보는게 맞을 것이다. 그들이 곧 법이요 진리요 길인 세상이 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삼성에 반기를 들었던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매장되어가는 사례를 다수 확인 할 수 있다. 이젠 그런 반기조차 거의 없을 지경이다.

 
나라면 차라리 이런 비유를 들겠다.

 '일제시대 3.1운동하면서 나는 곧장 경찰서로 달려갔다. 그 앞에는 총칼로 무장한 경찰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그들이 말했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돌로 치든 말든 니들은 다 주거써!" '
 

합법/불법의 법률적 관점이나 강자/약자의 상황, 그리고 그들 양측의 미래에 관한 것 모든 점에서 이 비유가 더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불법적인 병합과는 별개로 당시로써는 합법적인 통치를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통치에 기대어 밥벌이 하던 사람들도 있을 테다. 경찰에 대드는 것은 불법이었을 거고..
(비유이긴 하지만 '삼성==일제' 는 좀 심한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일부 보수 입장에서는 일제가 한국의 근대화를 이루어줬다는 평가도 있는걸 보면 아주 이상한 것도 아닐 것이다.)
 

창녀의 비유는 규범에 얽매어 진실을 보지 못하는 이들을 경고하는 비유다.
그런데 삼성을 창녀로 비유한 저 블로그의 글은 역설적이게도 변호사가 지켜야 하는 규범을 들어 김용철 변호사에게 돌을 던지고 있다. 그 비판이야 말로 창녀에게 던져졌던 그 돌이 아니고 무엇인가? 고통받는 약자보다, 진짜 정의보다는 율법의 문구 하나 지키기를 더 소중히 했던 바로 그 사람들이 던졌던 돌 말이다. 그래서 자신 논리의 발등을 찍는 창녀의 비유는 완전히 잘못 적용된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다행히 저 글을 쓰신 분, 의견의 차이에 기분나빠하지 않으신다 했다. 차이를 인정하는거, 그게 민주주의 아니겠냐고.

사실 차이를 인정하는거, 그거는 참으로 훌륭한 자세다. 그게 민주주의 중요한 덕목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기분 나쁘지 않다는건 민주주의랑은 아무 상관없는 문제다. 그르거나 곡해하거나 왜곡하는 것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 주장들에 대해서는 사실 화가 날수도 있어야 맞다. 물론 그걸 표현할때는 좀 정중하게 해야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민주주의를 존중한다면 김용철 같은 조무래기보다는 이젠 아예 노골적으로 사법권력을 돈으로 매수하고 돈으로 언론권력을 좌지우지하는 삼성에 대해 두려움과 공포와 분노를 느껴야 한다. 민주주의가 뭔지 코딱지만큼이라도 안다면 말이다.  
 
 

김용철 변호사의 고발과 서적 출간에 대해서는 더 많은 이견과 논리가 있겠지만 내 여건과 능력으로 하고 싶은 말을 전부 떠들기는 무리인 것 같고 일단은 단순한 부분에 관에서 잠시 생각을 끄적여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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