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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라이프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3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평점 :
오랜만에 나는 소설의 밑바닥으로 기어들어가, 내 감정이 조용히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며 느끼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타이틀이라는 명칭 하에 불구하고 나는 그 앞에서 문도 두드리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바라보다 이내 곧 그 곁을 떠날 수 밖에 경우도 많이 있었기에, 이 책은 생각보다 더욱더 특별했다.
자신의 삶보다 더 진한 것은 없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할 듯이, 작가의 자전적인 일상들이 하나씩 잔잔히 수면 위로 퍼져나가듯 번진다. 나날들을 살다 보면,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우리는 보통 자신을 또는 남을 위로하는 날들이 있다. 현실은 과거나 미래, 그리고 현재에도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뒤흔들고 시험하기에.
누구든 빗소리가 가득 찬 날이면, 가끔씩 생각나는 사람이 있듯, 그녀 또한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그를 가끔씩 홀로 입으로 내뱉는다. 죄책감을 느낀 것도 잠시, 아이가 그녀의 손을 놓았고, 피하지 않는다. - '일본에 가 닿기를'.
영화 러브레터의 결말과도 같다고 느꼈던 뭉클함에, 어쩐지 안타까운 마음에 몇 번이고 반복해서 페이지를 쉽사리 넘기지 못했다. 못하겠어요. 그는 설명도 하지 못했다. 그저 실수라는 말뿐. 어떻게 지내냐는 말에 그녀는 말한다. "잘 지내요." 그 때와 똑같은 감정을 느꼈다. 사랑은 그렇다. - '아문센'.
언니 카로에 대한 반복되는 기억, 아픔. 참, 감정이란 게. 행복이 편할 거라는 건 알지만, 모든 게 쉽게 그렇게. - '자갈'.
벨과 잭슨의 이야기. 벨은 이야기한다. 병으로 스러져가는 어머니에 대하여. 그리고 남겨진 아버지에 대하여. 기차는 어쩌면 하나의 방편이었을 수도 있었다. 우리는 사실 긴 생애 동안 사소하지만 중요한 것을 요구하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 '기차'.
구독한 신문에 실린 시 한 편으로 자신의 집, 어머니, 그리고 그 때의 사건의 재구성.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 다만, 그 때의 순간에 최선을 다해서 살 뿐이다. 그래서 용서가 되는 걸지도 모른다. 나는 그래도 최선을 다했다고. 조금 더 시간이 흐른 뒤에 말이다. - '디어 라이프'.
전쟁 전후의 시대상황, 여성. 성(性)이나, 불륜, 첫사랑, 추억, 가난, 무시와 멸시, 장애 등 이 책에서는 삶의 모든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추상적인 사건이 아닌, 어쩌면 실제로 있을 법한 느낌이 드는 착각이 일기도 한다. 속 주인공들은 모든 감정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어떤 표정 같은 것이 보이는 것. 어쩌면 이것이 작가의 능력이자, 글의 매력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이 세계를 조금 더 살아나가야 한다. 앞으로 무슨 일이 다가올지는 전혀 알 수 없지만, 지나고 나서야 또 알게 되고 느낄 것이다. 이 책도 또한 그 중의 일부가 되리라. 또다시 시간이 흐른 후, 이 주인공들은 나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