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그런 생각을 해, 내게 달려 있던 손이 너에게 있다면, 내 신경을 공유한 일부를 네가 만진다면, 우리는 아직 연결되어 있는 게 아닐까 하고, 가끔새로 붙인 왼손을 누가 쓰다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어, 놀라서 옆을 보면 아무도 없어. 이게 환상통이라는 걸 알아. 하지만...... 한순간 나의온 신경을 쏟는다면, 아주 찰나의 감각은 너에게 닿을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가 다시 손을 잡을 수 있을까? 그런 날이 올까? - P103
"이런 기분 모르겠지? 어느 날 갑자기 알맹이는 빠져나가고 껍질만 남은 기분. 원래 껍질은 알맹이를 보호하기 위해 생기는 거잖아? 그런데 알맹이가 없는 거야. 그럼 안에아무것도 없는 껍질을 누르면 어떻게 되게? 그냥 푹 찌그러지는 거지, 뭐." - P92
일을 하고, 학원에 다니고, 생활을 꾸리며 어떻게든 살아가는 와중에도 뭔가 빠뜨린 것 같다는 생각은 떠나지 않았다. 아주 중요한 뭔가를 잊어버린 기분. 앞으로도 이렇게 모호한 상태로 살아간다고 생각하면 모든게 부질없이 느껴지곤 했다. 주기적인 우울이 찾아왔고, 그우울을 극복하기 위해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으로 인해 치유받기도, 더 상처받기도 했다. - P73
이방인들은 순간적으로 발생하는 이상 에너지의 압박으로 여러 부작용을 겪는다. 그중에서도 제일 흔하게 발생하는 건 기억 상실이었다. 대부분 자신이 누구인지, 나이나 이름, 가족을 포함하여 살아온 흔적들을 모두 잊었다.어차피 한번 틈을 넘어온 이상 살던 곳으로 다시 돌아갈방법은 없었기에 잊는 게 더 낫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모든 걸 온전히 기억하는데 돌아갈 수 없다면, 그것대로 견디기 힘든 비극이니까. 그런 이방인들을 구조하고 이후의 삶을 지원하는 게 바로 릴리와 연주의 일이었다. - P69
이후로도 그런 식으로 사라지거나 운 나쁜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이 출몰했다. 한번 벌어진 ‘틈‘은 짧게는 5분,길게는 하루 정도 벌어져 있다가 알아서 닫히고는 했는데,틈이 닫힐 때 근처에 서 있거나 경계를 넘고 있던 경우에는 고강도의 힘이 밀집되어 날카롭게 벼려진 단면에 신체가 절단되는 사고를 입거나 심한 경우 죽음을 맞이하기도했다. - P68
세상 곳곳에 ‘틈‘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대략 한세기 전부터라고 추정된다. 말 그대로였다. 흰 종이 두 장을겹쳐놓고 한가운데를 커터 칼로 죽 그으면 두 장 다 칼집이남는 것처럼, 서로 마주할 일 없는 세상과 세상, 차원과 차원 사이에 ‘틈‘이 벌어졌다. 그러니까 2085년과 2107 년을,2099년과 2195년을, 2123년과 2100년을 연결하는 구멍이생겨버린 것이다. - P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