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주는 그것 앞으로 다가갔다. 문득 이 풍경이 아주 그립고 익숙한 것처럼 느껴졌다. 이 공간에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늘 누군가 자신을 맞아주고, 라디오 음악 소리가 들리던, 생기 넘치던 시절이. 집에 돌아와 낯선 이와 눈을 마주치는 게 이리도 두렵지 않은 일이었다니. 죽어가는 눈을 보지 않는 게, 살아 있는 눈을 보는 게 이렇게 심장 뛰는 일이었다니. 그것이 비록 사람인지 괴물인지 모를 것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 P37
옥주의 남편
손이 떨려 몇번이나 엇나간 탓에 짜증이 일었다. 살아생전 남편에게 번호 키로 바꾸자고 몇 번을 말했건만 남편은 비밀번호를 외우기 귀찮다는 구실로 끝끝내 열쇠를 고집했다. 원래가 그런 사람이었다. 낯선 것은 무조건 싫다 외치고 보는, 고여있는 것에 익숙한 사람. 그래서 마지막에도 그렇게 갔지. - P22
하지만 사람 사는 곳이라는 게 영원할 수는없는 것이다. 과거에 선명하게 빛나던 간판 글자가 이제는그 빛을 전부 잃어버린 것처럼, 홍하던 모든 건 쇠퇴하기마련이었다. 그 당연한 사실을 남편은 끝내 인정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 P20
어른들도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은 순간들이 있잖아요 아이들이라고 다를까요. 왜,늘 집에 가고 싶다고 울잖아요. 그게 그 말이죠. 지금 이곳이 아닌 다른 곳, 나를 상처 주지 않는 곳에 가고 싶다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제 말은 사라진 재이 또한 그러지 않았을까, 하는 이야기입니다. - P12
"아버지가 나에 대해서 안물어? 나, 안 찾았어? 나 취직해서 지땅에 내려가 있다고 그래. 거기까지만 말해. 그다음부터는 내가 말할 거야. 나, 아버지한테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사람이야."하고 싶은 말이 많다고? 아버지에 대한 분노보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더 많이 묻어있는 진모의 그 말이 의미심장했다. 나한테 그랬듯이 아버지는 진모에게도 아버지만이 알고 있는 삶의비밀을 나누어주었던 것일까. 아마 아버지는 그랬을 것이다. 나를사랑한 방식대로 아버지는 아들도 그렇게 사랑했을 테니까. - P276
나는 그날 아침 마침내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아주많이 사랑했다는 것을 어머니를 사랑했으므로 나와 진모에 대한아버지의 사랑 또한 절대적이었을 것임을. 우리 모두를 한없이 사랑했으므로, 그러므로 내 아버지는 세 겹의 쇠창살문에 갇힌 것이었다. 아버지가 탈출을 꿈꾸며 길고 긴 투쟁을 벌인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 P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