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대표는 중간 관리자급 직원의 연봉을 올려줘야 할 즈음 당사자를 교모시 괴롭혀 스스로 관두게 만들었다. 매년 쏟아지는 신규 인력에 기성 디자이너도 포화상태라 고용주 입장에선 아쉬울 게 없었다.
나 역시 생판 낯선 부서로 옮겨져 신입에게 일을 배우다 결국 못버티고 나왔다. 사무실을 나서며 ‘대표님 그렇게 살지 마시라‘ 용기 내 말했는데, 와중에도 자연스레 존칭을 붙이고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며칠 뒤 오전 내내 망설이다 오후 다섯시쯤 대표에게전화를 걸었다. 그러곤 ‘내가 그만둔 게 아니라 나를 자른 걸로해달라‘ 부탁했다. 그리고 나를 ‘자른 걸로 해준‘ 이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지호는 모르는 얘기였다. 알았더라도 그깟 실업수당좀 안 받으면 어떠냐고 화냈을 거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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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부턴가 지호에게 회사 얘길 잘 안 하게 됐다. 내가 조직생활의 고충을 토로할 때마다 ‘힘들면 그만두라‘는 말을 너무 쉽게 했기 때문이다. 아마 본인부터가 잘나가던 회사를 때려치우고•부모 돈으로 이층짜리 커피숍을 낸 사람이라 그런지 몰랐다. 지호에게는 뭐랄까. 어려서부터 몸에 밴 귀족적 천진함이 있었다.
남으면 버리고, 없으면 사고, 늦으면 택시 타는 식으로 오래 살아온 사람이 가진 무심한 순진함이. 학부 땐 그게 귀엽고 가끔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당당해 보여 끌렸는데, 결혼 후 같이 살다보니결코 좁혀지지 않는 간극이 있다는 걸 알았다. 이번 여행 계획을세우며 내가 예산을 맞추려 전전긍긍할 때도 지호는 "그냥 대충대충 해. 별 차이 없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별 차이‘에 대한감각이 지호와 나의 큰 차이였다.
년 10월 19일 오전 12:20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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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죄책감과 질문들

한나가 죽은뒤 처음 몇 년 동안 나는 혹시 내가 그녀를 부인하고 배반한 것은 아닌지, 혹시 내가 그녀에게 무언가 빚을 진 것은 아닌지,
혹시 그녀를 사랑한 까닭에 내가 죄를 지은 것은 아닌지, 혹시내가 진작 그녀와의 관계를 청산했어야 했던 것은 아닌지, 그방법은 어때야 했는지 하는 해묵은 질문들 때문에 괴로워했다.
-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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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당신과 함께 글 읽기를 배웠어요.그녀는 도서관에 가서 당신이 카세트에 녹음한 책들을 빌려와 귀로 들은 내용을 낱말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 그대로 좋았어요. 카세트 녹음기는 켜기와 끄기, 앞으로 감기와 뒤로 감기를 계속하는 바람에 오래 견디지 못하고 자꾸만 고장이 났지요. 그때마다 수선을 맡겨야 했어요. 수선을 하려면 저의 허락이 있어야 했기때문에 마침내 저도 슈미츠 부인이 무엇을 하는지 알게 되었어요. 그녀는 처음엔 말하려고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쓰는 법을익히기 시작하고 또 저한테 쓰기 연습 노트를 구해달라고 할즈음에는 그 사실을 더 이상 숨기려 들지 않았어요. 그녀는 또그 일을 해냈다는 사실에 대해 스스로 자부심을 느꼈고 그 기쁨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어 했어요" - P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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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문에서 오려낸 사진에는 검은 양복 차림으로 악수를 나누고 있는 한 중년신사와 소년의 모습이 있었다. 나는 중년 신사에게 인사를 하고 있는 소년이 바로 나 자신임을 알아차렸다. 나는 고등학교졸업식장에서 학교장에게 상장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은한나가 그 도시를 떠나고 한참 뒤의 일이었다. 당시 글을 읽을줄 모르던 그녀가 그 사진이 실린 지역 신문을 정기구독하고있었던 것인가? 어쨌든 그녀는 사진 내용에 대해서 알아내고또 그것을 입수하기 위해 어느 정도 어려움을 겪었을 것임에틀림없었다. 그녀는 재판이 열리던 중에도 그 사진을 몸에 지니고 있었을까? 나는 다시 가슴과 목구멍에 눈물이 고여오는것을 느꼈다. -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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