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곤 택시가 사라지자마자 엄마에게 에코백을 건네지 않은 걸 깨달았다. 정신이 온통 딴 곳에있어 의식을 못한 듯했다. ‘빵은 어쩔 수 없고 검사지만이라도 택배로 부쳐야겠네.‘ 기진이 한쪽 어깨에 보냉백을, 다른 쪽에 에코백을 멘 채 서둘러 택시에 올라탔다. 엄마와 헤어지고 나니 별로한 일도 없는데 비로소 큰 숙제를 마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안타까움과 미안함, 짜증과 홀가분함, 연민과 죄책감이 동시에 찾아왔다. -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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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선주가 팔을 다쳐 잠시 병원에 입원했을 때 기진이 화장실시중을 들며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기진이 ‘휴지 깔기 귀찮으면 엉덩이라도 들라‘고, ‘거기 뭐가 묻어 있을지 어떻게 아느냐‘고 나무라자 선주는 아무렇지 않게 ‘나는 너처럼 다리 힘이없어서 엉덩이 들고 오래 못 서 있는다‘고 했다. ‘어떻게 그 정도힘도 없을 수 있지?‘ 기진은 놀랐고, 부모 자식 간이라도 ‘몸‘과‘몸‘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먼지 실감했다. -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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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수도 이명과 난청이 생기고부터 인지 기능이 급속도로 나빠져서였다. 몇 년 동안 그 과정을 고스란히 지켜본 선주입장에서는 이명이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전부터 경수의 현재에서늘 자신의 미래를 봤으니까. 그리고 그 미래에 자기 곁에는 아마아무도 없으리라 여겼으니까. 선주는 ‘아직까지는 괜찮아‘ ‘더버틸 수 있어‘라는 암시로 일상을 꾸려나갔다. 하지만 선주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어떤 중요한 문제를 계속 모른 체하고 있다는결 너무 무겁고 괴로운 문제라 최대한 그 답을 미루고 있음을.
그리고 그건 기진도 마찬가지였다. - 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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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남편을 나지막이 불렀다.내 속의 중요한 무언가를 꺼내고 싶었지만 그것을 지금 내 옆의 사람과 결코 나눌 수 없을 것같은 예감이 들었다. -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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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걸음이 무거웠다. 분명 좋은 소식인데, 그것도 내가 아끼는 학생의 일인데, 마음이 허전하고 휑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거리에는 노란 은행나무 잎사귀들이 가득 떨어져 있었다. 내가 연민하•던 대상이 혼자 반짝이는 세계로 가버렸기 때문일까? 아니, 나는시우를, 시우 어머니를, 그들이 사는 집을 내려다본 적 없는데.
그럼 마주보는 건 괜찮지만 올려다보는 건 싫은 걸까? 내가 지금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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