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이란 본시 손안에 쥐는 순간 녹아없어지는 얼음처럼 사라지기 쉬운 법이다. 그래서 어쩌면 혹, 그 모든설명과 해석을 유예하는 것만이 진실에 가까워지는 길이 아닐까? 그럼으로써 그녀를 단순하고 정태적인 진술 안에 가둬두지 않고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만이. 또 그럼으로써 그 옛날 남발안의 계곡을 스쳐가던 바람처럼 가볍게 흩어지도록 놓아주는 것만이 진실에 다가가는 길은 아닐까?  - P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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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 위에 나뭇가지로 아이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은 단순하고 서툴렀지만 그녀는 쉬지 않고 아이의 얼굴을 그려댔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그녀는 아이뿐만 아니라 그녀가 알고 있던 사람들, 그녀가겪은 일들, 언젠가 눈앞을 스쳐간 풍경들을 그림에 담아내기 시작했다. 그림은 그녀에게 커다란 위안이 되었다. 그녀는 벽돌 위에 그림을그려 구워낸 다음 나란히 늘어놓고 앉아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그림을 보는 동안만큼은 고통과 외로움을 잊을 수 있었다. 그녀는 벽돌 위에 점점 더 많은 기억들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개망초와 뱀.
메뚜기와 잠자리, 고라니 등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대상에서부터 대장간의 모루, 벽돌을 실어나르던 트럭 등 그녀의 인생을 스쳐간온갖 물상들, 다방의 풍경과 평대 역에서 날뛰던 점보의 모습 등 수많은 장면들이 그 대상이 되었다. - P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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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과 불과 물로빚어낸 벽돌은 공간을 가르고 비바람을 막아줄 뿐만 아니라 온기를 보존하고 공기를 정화해주는 훌륭한 건축자재였지만 그런 실용적인 쓰임새는 춘희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녀에게 벽돌은 떠나간 사람들을 향한 비밀스런 신호이자 잃어버린 과거를 불러오는 영험한 주술이었던 것이다. - P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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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발안과 대비되는 세상
357 그녀에게 있어서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무질서와 부조리로 가득찬 낯선 세계였으며 끔찍한 증오와 광포함이 넘치는 야만의 세계였다.



기실, 겨울만 아니라면 온갖 야생동물뿐만 아니라 머루와 다래. 으름과 개복숭아 등 갖가지 열매들과 버섯이 풍부한남발안의 계곡은 한 생명을 품어주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었다. - P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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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의 고통을 피해 행복했던 시간, 그리워하던 이들을 떠올리는 춘희
351 증오 복수심으로 환치하지 않고 상처를 화석처럼 둔

넌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
춘희는 점보에게 물었다.
난 어디에도 없어. 이미 난 오래 전에 사라졌으니까.
점보는 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럼 지금 내 앞에 보이는건 뭐지?
후후. 꼬마아가씨. 그건 바로 너의 기억 속에 있는 거야.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넌 이미 사라졌는데그러니까 기억이란 신비로운 것이지.
그런데 왜 난 사라지지 않지?
당연하지 넌 아직 죽지 않았으니까.
나도 빨리 사라지고 싶어. 여긴 너무 힘들거든. 그리고 너무 외롭꼬마 아가씨, 너무 엄살부리지 말라고. 그래도 살아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야.
다른사람들도 나처럼 이렇게 고통스러울까?
글쎄, 그건 잘 모르겠지만 나에게도 힘든 시절이 있었지. 하지만 죽음보다 못한 삶은 없어.
춘희와 점보의 문답은 끝이 없었다. 그리고 광막한 어둠 속에서 한줄기 빛을 찾아냈다. 그녀는 기억 속으로 여행을 떠남으로써 끔찍한고통과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칠흑같이 어둡고 좁은 징벌방안에서 마침내 자유를 찾아냈던 것이다. - P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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