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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의 철학 - 고뇌하는 인간, 호모 파티엔스를 만나다
와시다 키요카즈 지음, 길주희 옮김 / 아카넷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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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와시다 키요카즈의 <듣기의 철학>(아카넷)에서 다음과 같은 글이 눈에 들어왔다.
“ (…) 비-방법의 길을 우리들의 몸에 새겨두지 않으면 안 된다. ‘에세이’라고 불리는 그 이야기법이다. (…) 방법적 직선의 길은 철도와 고속도로 같이 평지를 파내고 산과 골짜기를 뚫어서 최단거리로 만든다. 그리고 그 길을 기관차나 자동차가 경적소리와 연기를 뿜어내며 달린다. 이에 비해 [미셸 세르Michel Serres가 말한] 유보의 길은 풍경과 하나가 되면서, 때로는 그 풍경 속으로 섞여 들어가거나 우회하고, 다른 길을 통해서 돌고 돌아서 나아간다. / 이 ‘길고 굽어진, 울퉁불퉁하고 잡다한’ 유보의 길에서 인간은 진정한 사색과 만난다. 생각지도 않은 우연한 만남이다. (…) 스스로가 방법의 길 위에 있으면 절대 접할 수 없는 것들과 만나는 것이다.”(250-251쪽. 강조는 인용자)
해석에 관한 움베르토 에코의 교수의 글에 반론적 논평을 실은 리처드 로티의 글에서도 와시다 키요카즈의 논리와 유사한 대목을 마주했다.
“방법론적 읽기들은 (…) ‘시에 대한 욕구’라고 불리는 것이 결여된 사람들에 의해 전형적으로 이뤄진다. 그것들은 예컨대 내가 최근에 읽은 콘래드Conrad의 <어둠의 심장Heart of Darkness>dp 관한 읽기들을 모은 책에서 볼 수 있는 것들로서, 심리분석적 읽기, 독자 중심의 읽기, 페미니즘적 읽기, 탈구조주의적 읽기, 그리고 역사주의적 읽기 등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 책의 어떤 필자도 <어둠의 심장>에 매료되거나 감동받은 것 같지 않다. 나는 이 책이 그들에게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다거나, 그들이 쿠르쯔나 말로우 혹은, 말로우가 강둑에서 본, 투구 쓴 황갈색 뺨의 여자에게 많은 관심을 보였다는 느낌을 가질 수 없다. 이 등장인물들과 소설은, 현미경 아래의 표본이 조직학자의 목적을 바꾸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러한 필자들의 목적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 우리가 간혹 ‘영감을 받은’ 비평이라고 부르는 비방법론적 비평은 작가, 등장 인물, 플롯, 시연(詩聯), 그리고 행과의 만남의 결과이다.”(리처드 로티, 「실용주의 역정」, 움베르토 에코 외, 『해석이란 무엇인가』, 손유택 옮김, 열린책들, 1997, 142-143쪽.)
두 학자의 글에서 ‘비-방법’이란 말이 나온다. 전혀 주제도 다르고 고로 맥락도 다르다. 키요카즈는 임상철학을 입론하기 위해 비-방법을 내세웠고, 로티는 해석과 이용(利用)의 구별을 해체하기 위해 비-방법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논술에는 용어의 동일성을 넘어서는 놀라운 공통성이 있다. 미리 말하자면, 더 나은 삶은 위한 실제적 변화를 위해서는 비-방법이 옳다는 것이다.
기요카즈는 “임상이란 어느 특정한 타자 앞에 자신을 가져다 놓고, 환대하는 관계 속에서 자기 자신 역시 바뀌어 가는 경험의 장면”(237)이라고 정의한다. 다른 측면에서 임상은 “어떤 타자의 앞에 나를 갖다 두면서 그 환대를 주고받는 관계 안에서 나의 자아 역시 변해가는 경험의 한 장면이란 형태”(140)라고도 말한다. 왜냐하면, “임상이란 사람들이 흔히 ‘고역의 장소’라고 말할 수 있는 장소에서 내가 이름을 가진 누군가로서 다른 특정한 인물과 연관될 때, 철학적 사고가 각별한 의미를 제시하기 때문이다.”(61)
“정신과 의사와 임상심리학자에게 ‘임상’이란 말은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저명한 정신과 전문의 기무라는 정신의학을 ‘마음에 고통을 가진 환자를 치료하는 학문’이라 정의했다. 임상철학 역시 ‘괴로워하는 장소’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학문이지만, 치료의 학문이라고 정의할 수는 없다. 임상철학은 ‘괴로움’ 안에 갇힌 사람이 치료가 필요한 환자인지 아닌지조차 명백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의 생각에 대해 대화를 나누기 때문이다.”(62쪽)
정리하자면, 임상은 괴로움의 장소이고, 괴로움의 정체를 명확히 모르는 타자와 만나는 곳이다. 그곳은 철학을 요청하며, 결국 나의 자아마저도 변화시키게 된다. 이 때 임상에 필요한 철학은 비-방법론적인 것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아도르노와 메를로퐁티를 활용한다.
“메를로퐁티에 의하면, ‘임상철학’은 3가지의 ‘비-철학’적 내지는 ‘반-철학’적 지점에 서 있다. 첫 번째로 먼저 임상철학은 대상에 대해서 논하거나 글로 쓰는 철학이 아니라, ‘듣는’ 행위를 통해서 진행되는 철학을 모색하고 있다. 두 번째로 임상철학은 누군가 어떤 특정한 타자를 향한다는 ‘단독성’ 내지는 ‘특이성singularity'의 감각을 중시한다. 즉, 보편적 독자를 향해서가 아니라 누군가 어떤 개별적인 사람을 향하는 철학을 지향한다. (…) 세 번째는 사전에 소유된 원칙의 적용이 아닌 일반적 원칙이 개별 사례에 의해 흔들림이나 경험이 되고, 이것을 통해 철학의 경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메를로퐁티가 철학을 ‘그 존재의 단서가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경험’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112-113쪽. 강조는 인용자.)
논의의 성격상 비-철학적 내지는 반-철학적 방법론과 임상을 통해 변화를 겪는 철학함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아래에서 논하겠지만, 로티 역시 해석을 통해 변화를 겪는 것이 중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비-방법론적 비평이 더 긴요하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키요카즈는 아도르노에게서 비-방법의 임상철학적 함의를 도출해낸다. 왜냐하면, 임상과 관련하여 “현재 철학이 가장 신경을 써야 하는 부분은 에크리튀르의 형식, 즉 말투texture"(42)이기 때문이다. 방법주의에 입각한 글쓰기나 분석은 아드로노에 의하면 ‘사고에 대한 감시’(40)이다. 그래서 나온 에크리튀르가 에세이이다. ”에세이라는 형식은 말할 것도 없이 방법적 의식이 희박한 글쓰기“(46)이다.
“산문의 형식을 띤 비평적 단편이라는 점에서 에세이는 몽테뉴와 파스칼에서부터 레오파르디와 에머슨을 거쳐 니체와 게오르그 짐멜, 발터 벤야민으로 연결되는 선이며, 때로는 단편적인 사고형식에 연관된 비판적 사고 운동이었다. 최종적인 ‘시도’는 반-체계적, 반-방법주의적인 ‘비-방법의 방법’으로 세계 모든 대상의 세밀한 부분까지 그 굴곡과 감촉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47)
비-방법의 방법은 에세이이고 이러한 스타일이 철학이 되돌아가야 할 길이라는 것이 키요카즈의 주장이다.
“아도르노의 반-방법주의적 사고는 ‘영원한 가치를 전문으로 하는 철학, 베거나 찔러도 꿈쩍도 하지 않고 빈틈없이 조직화된 학문, 몰락한 개념으로서의 직관적인 예술’ 등에 공통적으로 보이는 ‘배타적이고 순수한 혈통을 추구하는 경향’ 안에서 ‘압도적 질서의 흔적’을 눈치 챈 것이다.”(46)
아도르노의 말을 직접 들어 봐야겠다.
“에세이는 개념을 이용하지만 일반적인 개념에서 잡히지 않는 사고 분야를 새로 개척한다. 또 객관성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학문이 실제로는 개념이라는 모순적인 그물망에 걸려 전혀 객관적이지 못하다는 사실을 폭로하거나 할 뿐이다.”(테오도르 아도르노, <문학노트>, 53쪽에서 재인용.)
로티와 에코가 논전했던 해석에 관한 문제 역시 ‘객관성’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해석의 최대한의 객관성. 이를 옹호하는 게 에코이다. 해석은 결코 무한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로티는 그런 건 중요하지도 않거니와 어불성설이라고 천명한다. “그 어느 것도 텍스트나 읽기의 본질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어느 것도 고유의 성질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로티, 140쪽) 고유의 성질이랄 수 있는 객관성은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로티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텍스트 읽기란 한 텍스트를 다른 텍스트를, 다른 사람들, 압도적 관심사들, 정보들 등에 비추어 읽고, 그리고 나서 무엇이 발생하는가를 아는 일이다.”(140) “텍스트는 단지 독자가 그 텍스트에 관해서 자기가 처음에 말하려 했던 바를 자신이나 타인들에게 확신키켜 주기가 비교적 어렵거나 쉽다고 느끼게 만드는 원인을 제공할 뿐이다.”(137)
에코는 텍스트를 해석하는 것과 이용하는 것의 차이를 주장하지만 로티는 “이것은 우리 실용주의자들이 원치 않는 구별”(125)이라고 일축한다.
“우리의 견해로는 어떤 사람이 어떤 것에 대하여 행하는 모든 것은 그것을 이용하는 일뿐이다. 어떤 것을 해석하고, 알고, 그 본질을 꿰뚫는다는 것 등은 모두 그것을 작용시키는 어떤 과정을 기술하는 다양한 방법들에 지나지 않는다.”(125)
반근본주의자, 실용주의자로서의 로티는 텍스트 자체는 “비연계적 고유의 성질 같은 없다”(125)고 강하게 피력한다. 텍스트의 해석은 이용에 달려 있다. 이용은 나의 필요나 목적을 위해서 소모된다. 그 과정에서 강력한 설득력과 흥미가 있다고 느낀다. 나의 필요나 목적에 따라 이러한 설득력과 흥미는 크게 달라진다. 많은 사람들이 이 대목에서 텍스트의 진정한 의도를 알았다고 착각하는 것을 주의하라고 로티는 당부한다.(141)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텍스트는 그 자체 내적 일관성이니 고유의 성질이니 하는 ‘객관성’은 있을 수 없다.
“진흙 덩어리 하나가 도자기용 녹로에서 마지막으로 돌아갈 때 우연히 어떤 통일성이라도 갖게 되는 것처럼, 한 텍스트도 해석학의 물레가 마지막으로 회전할 때 어떤 일관성이라도 우연히 가지게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130)
요컨대, “텍스트의 일관성은 누군가가 일련의 부호나 소리에 관해서 뭔가 재미있는 얘깃거리를 찾아냈다는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130) 그래서 에세이적 태도의 비방법론적 비평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텍스트로 하여금, 우리를 우리의 필요와 목적에 맞게 변화시켜 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