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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과 논문 ㅣ 이학문선 3
마르틴 하이데거 지음, 이기상.신상희.박찬국 옮김 / 이학사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기술에 대한 물음」에서 살필 수 있듯이 기술은 그저 하나의 수단이 아니라 탈은폐의 한 방식이다(18쪽). ‘테크네’라고 불린 고대의 기술은 ‘포이에시스’로서, ‘밖으로 끌어내어 앞에 내어놓음’이다. 그러나 현대의 기술은 포이에시스가 아닌 ‘도발적 요청’이다.
라인강이라는 존재자는 포이에시스의 한 방식인 예술을 통해 드러날 경우 ‘예술 작품’에서 노래하고 있는 “라인강”이 되고, 도발적 요청을 통해 드러날 경우 ‘전력 작품’으로 변조되어 나타난다(22쪽). 전자의 경우 라인강의 본성은 손상되지 않으나 후자의 경우 라인강은 발전소에 맞추어 변화되었다. [그러나 해당 예시는 예술과 기술에 대한 비교이기 때문에] 한 가지 예시를 더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농부의 일은 예전에는 “농토에 무엇을 내놓으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씨앗을 뿌려 싹이 돋아나는 것을 그 생장력에 내맡기고 그것이 잘 자라도록 보호”하는 것이었던 반면, 오늘날 농토경작은 “기계화된 식품공업”일 뿐이다(21쪽). 전자에서는 농토의 본성이 손상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인간에 의해 ‘보호’되고 있으나, 후자에서 농토는 도발적으로 닦아세워진다. 정리하면, 포이에시스로 기술은 기술을 사용하는 인간에 의해 존재자의 본성이 보호되고 보존되지만, 도발적 요청으로서의 기술에서 존재자의 본성은 변질된다.
즉, 기술의 적용을 받는 존재자는 어떤 기술의 작용을 받느냐에 따라서 그 본성이 보존될 수도, 그 본성이 손상될 수도 있다. 문제는 단연 존재자의 본성을 손상시키는 기술에 있다. 도발적 요청으로서의 기술은 존재자의 본성을 발휘 시키는 게 아니라 “다른 어떤 요청에 의해 대비 상태”에 있게 만듦으로써 존재자의 본성을 밝히지 못하고 ‘부품’으로 머물게 한다(23쪽). 부품으로 존재자가 드러났을 때 우리는 존재자의 다른 가능성을 생각할 수 없다. 더 문제시 되는 것은 기술이 인간에 의해 수행될 때, 수행의 주체로 있는 인간마저 ‘부품’으로 취급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발적 요청인 닦달 역시도 탈은폐의 ‘역운’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닦달을 탈은폐의 한 역운으로 경험(35쪽)”하게 된다. 이때 탈은폐는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으로 하여금 현실적인 것을 부품으로 주문요청 하도록 인간을 닦아세우는 그 도발적 요청 역시 드러나는 그대로 받아들여야”한다. 그러나 이때 받아들임이 ‘존재자의 부품화’에 대한 방치일리는 없다. 닦달의 역운을 받아들임은 그것의 닦달이 위험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다. 이 자각을 통해 인간은 기술과 자유로운 관계를 맺는다(9쪽). 하이데거는 “위험이 있는 곳에는 그러나 / 구원의 힘도 함께 자라네(47쪽)”라는 휠덜린의 시구를 인용한다. 하이데거는 닦달 그 자체가 ‘최고의 위험(36쪽)’인 역운이기에 그 자체로 구원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