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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나라
한창훈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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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희망이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그것은 누렇게 삭아버린, 한 번도 지키지 않았던 생활계획표 같은 것이다. 내가 믿는 것은 미움이다. 미움의 힘이다. 우리가 이렇게 앓고 있는 이유는 사랑하지 않아서 생긴 문제보다, 미워할 것을 분명하게 미워하지 않아서 생긴 게 더 많기 때문이다.” -작가의 말-


한창훈은 다시금 망각하고 있던 것들을 떠올려 주었다. 잊고 있던 기억들. 하지만 나의 기억이 아니기에 ‘기억’이라고 이름 붙이기가 망설여지는 그 무엇들. 나만의 것으로 환원되기에는, 너무나 비대한 몸뚱이를 가진 과거의 조형물들을 말이다. 지금, 과거의 단편들은 장마처럼 길었던 이야기를 매듭짓고, 스물 스물 사라지려 하지만 그것들을 끝까지 현재의 기둥에 묶어 놓기 위한 ‘기억’들이 필요하다. 내 이야기가 아니지만, 내 이야기인 것처럼. 나는 그것을 경험했고, 공유했고, 고통 받았다고. 과거 속에 묻혀 있던 고통을, 지금 여기서 느끼기 위해 어떻게든 발버둥을 쳐보는 것이다. 과거의 속살 깊이 묻혀있는 고통의 상흔을 지우려 할수록 우리는 더욱더 현재와 괴리된 주변인, 타자로서 살아갈 테니 말이다. 어쩌면, 그 고통의 기억들이 ‘지금’을 지탱하는 것들의 전부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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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청전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고전
김성재 지음, 김성민 그림 / 현암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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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21 수요인문강좌 리뷰 '김민웅의 동화속 비밀창고(3)'>

심청이의 하루는 아버지가 전부였다. 눈먼 아버지를 모시는 것이 심청이의 존재 이유였고, 절대적 명제였다. 그런 심청의 일상에 갑작스럽게 사건이 발생하는데, 눈을 뜰 수 있다는 화주승의 이야기에 아버지가 덜컥 공양미 삼백 석을 부처님께 바치기로 약조한 것이다. 삼백 석을 어떻게 구할 것인가? 묘안이 떠오르진 않지만 확실한 건 심청이 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아버지가 돈을 벌수는 없으니 말이다. 어찌됐든, 자비 없는 화주승에 낚여 무능한 사대부 아버지는 이미 물을 엎질렀고, 심청은 무슨 수를 써서든 해결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주변이 슬슬 심청을 옭아매기 시작한다. 이제, 집에 계신 아버지를 위해 심청은 발품을 팔며 노동 강도를 높인다.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아버지에게 그랬던 것처럼.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어머니께서는 아버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했고, 헌신하셨다.

어느 날, 고뇌하던 심청에게 행운이 찾아온다. 삼백 석을 마련함과 동시에 열녀가 될 수 있는 일거양득의 순간 말이다. 사람을 바다에 빠뜨려 죽이면서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는 상인들이 고맙게도 심청을 삼백 석에 산다. 이제 되었다. 삼백 석을 구했으니, 심청은 미련 없이 배에서 뛰어 내린다. 그리고 심청의 죽음과 동시에 선원들은 평온한 뱃길을 기원하며 잔치를 시작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심청의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한 편의 드라마가 된다. 일생을 아버지를 위해 헌신했으며 마지막에도 아버지를 위해 과감히 죽음을 택한 심청의 이야기에 많은 사람들은 눈물을 흘린다. 이내, 고을 원님도 눈물을 훔치며 주상께 이야기를 전해 드린 후 ‘열녀문’을 세울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열녀문을 둘러싸고 고을의 자랑거리를 칭송하며, 기뻐한다. 정작 주인공은 없지만 말이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심청의 이야기를 통해 ‘효’, 더 나아가 ‘자기희생적 효’를 강요한다. 심청과 심청의 어머니가 겪었을 말로 형언키 어려운 고통의 시간은 지운 채, ‘효’라는 유교적 가치만을 전면에 앞세운다. 사대부들의 이야기 속에서 그녀들은 응당 그래야만 하는 존재들로 그려지며, 그녀들의 정체성은 철저히 거세된다. 심청의 어머니가 ‘곽 씨 부인’이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곽 씨 부인이 심봉사의 ‘아내’라는 사실이다. 이들은 ‘곽 씨’, ‘심청’을 떠나 ‘여성’이라는 이름표를 가슴에 붙이고 억압을 받는다. 이것이 당시 조선 사대부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다. 신하는 임금을 섬겨야 하고,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의 존재는 똑같은 권위를 지니며, 가부장은 집안을 먼저 잘 다스린 후, 세상을 다스려야 하고, 여성에게는 칠거지악을 내린다. 특히 시집을 간 이후로는 말하지 말고, 듣지도 말고, 보지도 말 것을 명한다. 아이를 못 가지는 것도 칠거지악 중 하나라 했던가. 조선의 유교는 성적 억압을 통해 “(성적 억압이란) 온갖 불행과 타락에도 불구하고 권위주의적인 체제에 잘 적응하고 순응하는 사람을 만들어 내는 것”<빌헬름 라이히>을 수행했던 것이다. 심청이는 권위주의의 체제의 희생양이었다. 그러나 이야기 속에서 그녀가 죽었던가? 아니다. 그녀는 살아 돌아와 왕비가 되어 사대부인 심봉사에게 이와 같이 말한다. “제가 살아 돌아 왔으니, 눈을 뜨고 보세요!” 지배층이 무참히 짓밟았지만 심청은 다시 돌아와 그들에게 눈을 뜨고 똑똑히 직시하라고 외치는 것이다. 더 이상 효를 ‘강요’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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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와 베짱이 개구리 세계명작동화 13
마크 화이트 지음, 사라 로조 그림 / 북공간(프리치)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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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르네 21 수요인문강좌 리뷰 "김민웅의 동화속 비밀창고">

1.

‘계급’이 인간의 모든 것을 규정하던 시절. 이솝의 시대에, 노는 자와 일하는 자의 구분은 엄격했다. 생산 활동에서 자유로운 자들은 철학과 예술 정치놀음을 즐겼고, 생산 활동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던 자들은 생존을 위해 의무로서의 노동을 했다. 그들의 노동은 선택이 아닌 강제였고 계급사회에서 그들의 불만은 절대로 표출될 수 없는, 표출되어서는 안 되는 그 무엇이었다. 어쩌면 그들은 반복적인 노동의 쳇바퀴에 순응하여, 저항과 불만을 망각한 채 ‘자발적 복종’을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때 이솝은 저항한다. 불만을 토로한다. 사회의 불합리성을 폭로한다. 단! ‘그들만의’언어를 빌려, 이야기한다. 이내, 현실은 기호화 되어 이야기 속으로 들어온다. 일하는 개미는 누구인지, 노래하는 베짱이는 누구인지. 같은 현실과 감정을 공유하는 자들은 안다. 어째서 추운 겨울에 식량을 구하러 온 베짱이를, 개미가 냉혹하게 외면하는지 그들은 이해한다. 이야기가 선사하는 ‘공감’속에서 그들은 연대하며, 적극적인 소통을 하기 시작한다. 헌데, 그들의 이야기가 현실로 넘어오는 순간? 바로 ‘혁명’의 순간이다.

새로운 표현들이 기존의 현실과 충돌하게 되는 순간 말이다. 조선조 500년, 백성의 언어와 지배층의 언어가 달랐던 사회. 지배층의 언어로 백성의 일거수일투족을 검열했던 나라. 훈민, 애민, 민본이라는 사상을 지배계급 내부 완료형으로 화석화시킨 사회. 생명체인 백성의 억눌린 감정이 일상적으로 삐져나올 곳은 지배계급의 폐쇄된 명사가 아닌 저자거리의 걸판진 형용사 아니었을까? 말 그대로 개기게 된 것 아닐까? 한국어의 형용사 중 특히 ‘욕’이 다양하게 발전했음은 우연이 아니다. ‘욕’은 박탈당한, 하지만 그 박탈감을 공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만들어진 어떠한 혁명적 표현이 아니었을까. 그들의 언어가 이야기와 현실을 가로 막던 담벼락을 스물스물 넘어와 현장을 덮칠 때, 긴장은 폭발한다.  


2.

‘자본’이 인간의 모든 것을 규정하는 시절. 이 시대의 <개미와 베짱이>는 자본주의 윤리지침서이다. “일하라. 미래를 대비하라. 부를 축적하라. 여유 부리지 마라!” 한 개인을 ‘호모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로 변모시키는 데에, 이만한 구호도 없다. 이는 베버가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밝힌, 자본주의 정신과도 흡사하다. 베버는 자본주의가 발전하기 위해선 특정한 ‘정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것도 개인 안에 개별적으로 속하는 정도가 아닌, 집단 내부에 속하는 사고방식으로서 성립되어야 한다. 즉 외적인 자본가-노동자라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뿐만 아니라, 노동자에게 혹은 기업가에게 자본주의 유지를 위한 내적인 ‘책임감’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마치 노동이 절대적 자기 목적인 것처럼 그에 매진하는 정신, 즉 노동을 ‘의무’로 보는 태도 말이다. 자신의 자본 증대를 자기 목적으로 삼는 것을 개인의 의무라고 보는 사상은 곧 ‘윤리’가 된다.

물론, 진즉에 승리를 거두어 무질서한 경쟁의 장으로 변모한 작금의 자본주의 시대에 베버의 ‘자본주의 정신’과 같은 정신적인 ‘지지’는 더 이상 필요 없을 듯하다. 구지 교육하고 강조하지 않아도, 우리는 자연스럽게 자본주의 정신을 체득하고 자본주의 사회에 녹아들어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심지어 대학교에서도 ‘자본주의’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으면서도 이미 자본주의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우리는 세계에 대해 필연적 지식을 가지고 있다. 지식은 경험으로부터 얻어진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칸트의 초월론적 철학을 완벽히 이해하고 실천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개미와 베짱이>를 읽자마자, 노동에 대한 열의만을 불사르고 있는 내 자신과 당신이 증명하고 있다.  


헌데, 우리시대의 개미는 열의와 동시에 ‘불안’ 또한 불사르고 있다. 불안은 노동을 위한 최고의 ‘동력’이라 했던가. 겨울을 두려워하며 식량을 비축하고 있는 개미처럼, 우리 또한 미래를 두려워하며 노동에 몰입하고 있다. 아직 오지 않은 겨울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의 현실을 저당잡고 끝이 보이지 않는 “준비, 준비, 준비...”만을 반복하게 하고 있다. 때문에, 불안한 우리들에게 베짱이와 같은 삶은 꿈꾸는 것만으로도 사치일 수 있다. 우리는 무언가 ‘욕망’을 하지만, 더 이상 욕망해서는 안 됨을 알고 있다. 내 욕망이 아닌 타인의 욕망을 해야만 포만감을 느낄 수 있음을 알고 있다. 집단의 사고방식을 지배하는 그‘정신’에 내 정신을 의탁한 결과일 것이다.  


비관적인 이 글의 끝에, 가라타니 고진의 메시지를 달며 나름 희망적으로 마무리하겠다. “정신이란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사유’가 아닌 것이다. ‘정신’이란 ‘사유’또는 ‘생각’하는 일이 한 공동체의 시스템에 속해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는 것이다 영민하게 사고하면서, 그러나 그것이 공동체의 관습에 따른 사고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하는 것이 바로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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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똥 민들레 그림책 1
권정생 글, 정승각 그림 / 길벗어린이 / 199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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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21 수요인문강좌 리뷰]

유년시절, 동화를 어쩌다가 읽게 되었을까. 친구들과 신나게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따분하게 생긴 사각의 책을 내 스스로 펴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군가 읽어 주었던 것 같긴 한데, 어머니였을까. 선생님이었을까. 어찌됐든, 나는 눈으로 그림을 보며 귀로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잠자코 앉아있었고 그의 이야기는 항상 아름다운 교훈과 함께 마무리 됐던 듯싶다. 그리고 그 시절 들었던 이야기와 메시지는, 지난 몇 년 동안 내가 겪은 성장의 풍파 속에서도 변함없는 목소리를 유지하며 그 시절의 울림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내 안에 아직도 순수한 동심의 세계가 남아있었다니.  


이렇게 자신의 순수함에 대해 경탄을 하고 있을 때 김민웅은 조곤조곤하게, 마치 구연동화 하듯이 우리에게 말한다. “당신은 타인에 의해 동화를 학습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동화를 생각하면 꼬리표처럼 달라붙는 동화의 ‘교훈’. 예컨대, 양치기 소년(X)=거짓말 하지 말자(X') 라는 수학 공식과 같은 사고 말이다. 우리는 동화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자발적인 ‘독서’를 통하여 파악했을까? 아니면 타자에 의한 ‘교육’의 과정을 통해 학습 했을까? 아마 후자에 가깝지 않을까 한다. 그 시절의 이야기를 ‘정답’으로 생각하며, 그 후에 단 한 번도 동화책을 펼쳐보지 않았던 자신의 자화상을 그려보도록 하자. 머리가 커질수록 동화 속 이야기는 멀어져만 간다.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이미 동화의 정답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저 이야기는 너무 뻔하고 쉬운 이야기야.” 옆구리에 두꺼운 철학책을 낀 우리는 동화가 못 다한 이야기는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확신의 함정’ 주변을 기웃거린다. 이러다 함정에 빠진 이들을 위해 김민웅은 홍세화의 ‘생각의 좌표’를 통해 함정에서 탈출할 수 있는 최소한의 활로를 열어주려 한다. 김민웅의 방법은 간단하다. “의문을 가지고 질문을 하세요.”  


김민웅은 <강아지 똥>을 향한 우리의 의문과 질문을 요구한다. 곧 우리는 사방에서 둘러싸 34페이지의 예쁜 그림동화책을 공격하는 만행을 자행한다. 아니, 책을 공격 한다는 표현보다는 책을 향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공격한다는 것이 적절할 듯하다. <강아지 똥>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 “이 책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강아지 똥이 민들레를 피워내는 데 소중한 거름이 된다는 이야기를 통해 생명과 자연의 가치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런 이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생각하다가도 자신의 존재 가치를 발견하는 경험을 할 때 자기를 사랑하게 되고 생명의 소중함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 어린이들도 <강아지 똥>의 이야기를 통해 자연을 사랑하고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출판사 책 소개에 실려 있는 위의 글은 <강아지 똥>이 전하고자 하는 모든 이야기가 담겨있는 <강아지 똥>에 대한 일반명제처럼 여겨진다. 우리에게 <강아지 똥>은 언제든, 어디서든 항상 위와 같은 이야기를 하는 책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김민웅은 <강아지 똥>의 결말에 큰 물음표를 제시한다. 타자의 규정(더러워, 쓸모없어)에 의해 끊임없이 수동적으로 살아가던 강아지 똥이 마지막에는 민들레의 거름이 되어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깨닫게 된다지만, 결국 민들레 거름이 되는 과정에서도 민들레의 “나의 거름이 되어 주지 않겠니?” 라는 요구에만 응했을 뿐, 스스로 “내가 거름이 되어 줄께”라는 주체적 의사표현이 없었다는 점이다. 나의 가치를 규정하는 마지막 단계에서 조차 강아지 똥은 타자의 욕망에 부응하는 모습을 보인다. <강아지 똥>은 존재 가치를 발견하기 위한 긴 여정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의 ‘비주체성’이 끝끝내 극복되지 못한 채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타자의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 이야기? <강아지 똥>은 더 이상 당연하고  뻔한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양치기 소년과 늑대>는 어떠할까. <양치기 소년과 늑대>에서 정말 양치기 소년만이 악역이며, 이솝은 “거짓말 하지 말자”를 강조하기 위해 이 이야기를 썼던 것일까? 그렇다면 잦은 오보에도 불구하고, 양치기 소년에게 어떠한 제재도 가하지 않은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볼 것인가. 양의 생명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던 사람들이지는 않았을까. 어쩌면 이솝은 마을공동체의 무책임함을 폭로하기 위해 이 동화책을 썼던 것일 수도 있다. 이처럼 김민웅은 동화를 둘러 싼 고착화된 고정관념이라는 단단한 외피들을 벗기기 위해, 우리에게 의문을 가지고 질문을 하라 요구한다.  


김민웅의 요구는 '지금 여기'에서도 유효하다. 라캉은 현대 사회의 구성원들을 ‘안다고 가정된 주체(subject supposed to know)’들로 설명한 바 있다. 라캉에 의하면 우리는 내 감정과 믿음을 발동하는 내적 상태를 떠올리지 않은 채 외부의 감정과 믿음을 내 것으로 만드는 전도된 과업을 수행한다. 학교와, 미디어가 알려주는 사실들을 ‘진실’로 승격시켜 “이미 알고 있다.”라는 착각에 빠진 우리들에게 김민웅은 <강아지 똥>을 손에 쥐어 준다. 그는 옛 시절의 동화책을 다시 한 번 펼쳐 줌으로써 우리가 어디서부터 질문을 해야 하는 지에 대해 이야기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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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그림 보면 옛 생각 난다 - 하루 한 장만 보아도, 하루 한 장만 읽어도, 온종일 행복한 그림 이야기
손철주 지음 / 현암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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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21 금요대중강좌 리뷰>  

손철주의 그림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하나하나 지나가는 ‘옛 그림’들이 복잡 다다한 여러 이야기들을 주리 주저리 늘어놓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의 표현을 빌려 ‘옛 그림 보면, 옛 생각 난다’라고나 할까. 더구나 손철주의 말과 글은 예스럽다. 옛 사람이 옛 그림을 이리도 흥겹게 설명을 해주는데, 옛 풍경이 생각나는 것은 당연한 일일 터이다.  


특히, 글에 녹아든 손철주의 시(詩)와 그림에 대한 애정은 읽는 이로 하여금 더욱 그림과 ‘통’(通)하게 만든다. 그림을 사랑하는 것인지, 시를 사랑하는 것인지 .. 이 두 여인을 모두 사랑하는 배포를 통해 그가 들려주고자 하는 이야기들은 시와 그림의 아슬아슬한 줄타기이다. 손철주의 이러한 마음은 소동파의 시구를 통해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詩中有畵 畵中有詩.그림 가운데 시가 있고, 시 가운데 그림이 있다” 덧붙여, 그리스의 시인 시모니데스의 말 “시는 말하는 그림이오, 그림은 침묵하는 시다”. 손철주에 의해 우리의 시선은 화폭 속 ‘시’로 향한다. 시가 너무 좋아 시를 그림으로 표현한 옛 사람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자신의 그림이 회화적 기술보다는 함축된 ‘시’로서 평가받기를 원했다. 옛 그림의 한 귀퉁이에는 그림을 설명하는 글귀들이 있었는데 이는 ‘제발(題跋)’이라 불린다. 품격 높은 시가 함축된 그림은 ‘문귀’가 높다하여 깊은 내용을 담은 그림으로 여겨졌다.  


조선 후기의 문인이자 화가인 강세황은 그림, 그리고 시가 함께하는 자화상을 통해 스스로를 이야기한다. 화폭 속 강세황은 머리에는 관모를, 몸에는 도포를 두르고 있다. 정상적인 모습이라면 관모와 관복이 조화를 이루어야 했지만, 강세황은 관복 대신에 도포를 자신의 몸에 입히며 다음의 글귀로 심정을 이야기 한다. “저 사람이 누구인가. 수염과 눈썹이 하얗구나. 머리에 오사모를 쓰고 야인의 옷을 입었네. 이것으로 알 수 있다네. 마음은 산림에 있지만 이름은 조정에 오른 것을...” 벼슬을 하고 있지만, 마음만은 야인이 되고자 하는 올곧은 노인의 마음이 그림과 시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손철주의 그림읽기에서 시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바로 그림을 그린 화가의 ‘삶’이다. 손철주의 그림읽기는 사람읽기이자, 사연읽기이다. 능호관 이인상의 <와운> 이라는 작품에는 하늘에 거칠게 덩어리진 먹구름들이 등장한다. 얼핏 느끼기에 어둡고 음산한 기운이 느껴지는 <와운>에는 이인상의 삶이 스며들어 있다. 아들 셋, 딸, 게다가 사랑하는 처 까지 먼저 보낸 사람의 삶이 과연 어떠했을까. 그의 삶은, 그의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다.

 

물론 혹자는 <와운> 앞에서, 먹구름의 웅장함에 경탄을 할 수도 있다. 나 또한 그랬다. 천지를 삼켜 버릴 것만 같은 흑색의 구름 덩어리들. 화가의 거칠고 거리낄 것 없는 붓놀림에서 강인함을 느꼈다고나 할까. 압도당할 것만 같았던 느낌. 기구한 삶의 흔적이 스며든 그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멋진 구름들. 화가가 입을 열지 않는 이상 올바른 해석이란 없으며, 답 또한 없다. 설령, 화가가 입을 연다 해도 감상과 해석은 보는 이 들의 특권이 아니던가. 그림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 후에, 손철주가 남긴 말도 이와 같다. “감상은 오류, 독단, 편애에 빠질 수밖에 없으며 빠진다 하더라도 이는 명백히 ‘떳떳한’ 행위이다.” 감상자에 의해 ‘옛 그림’은 계속해서 새로운 사연들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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