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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와 베짱이 ㅣ 개구리 세계명작동화 13
마크 화이트 지음, 사라 로조 그림 / 북공간(프리치) / 2008년 6월
평점 :
품절
<르네 21 수요인문강좌 리뷰 "김민웅의 동화속 비밀창고">
1.
‘계급’이 인간의 모든 것을 규정하던 시절. 이솝의 시대에, 노는 자와 일하는 자의 구분은 엄격했다. 생산 활동에서 자유로운 자들은 철학과 예술 정치놀음을 즐겼고, 생산 활동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던 자들은 생존을 위해 의무로서의 노동을 했다. 그들의 노동은 선택이 아닌 강제였고 계급사회에서 그들의 불만은 절대로 표출될 수 없는, 표출되어서는 안 되는 그 무엇이었다. 어쩌면 그들은 반복적인 노동의 쳇바퀴에 순응하여, 저항과 불만을 망각한 채 ‘자발적 복종’을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때 이솝은 저항한다. 불만을 토로한다. 사회의 불합리성을 폭로한다. 단! ‘그들만의’언어를 빌려, 이야기한다. 이내, 현실은 기호화 되어 이야기 속으로 들어온다. 일하는 개미는 누구인지, 노래하는 베짱이는 누구인지. 같은 현실과 감정을 공유하는 자들은 안다. 어째서 추운 겨울에 식량을 구하러 온 베짱이를, 개미가 냉혹하게 외면하는지 그들은 이해한다. 이야기가 선사하는 ‘공감’속에서 그들은 연대하며, 적극적인 소통을 하기 시작한다. 헌데, 그들의 이야기가 현실로 넘어오는 순간? 바로 ‘혁명’의 순간이다.
새로운 표현들이 기존의 현실과 충돌하게 되는 순간 말이다. 조선조 500년, 백성의 언어와 지배층의 언어가 달랐던 사회. 지배층의 언어로 백성의 일거수일투족을 검열했던 나라. 훈민, 애민, 민본이라는 사상을 지배계급 내부 완료형으로 화석화시킨 사회. 생명체인 백성의 억눌린 감정이 일상적으로 삐져나올 곳은 지배계급의 폐쇄된 명사가 아닌 저자거리의 걸판진 형용사 아니었을까? 말 그대로 개기게 된 것 아닐까? 한국어의 형용사 중 특히 ‘욕’이 다양하게 발전했음은 우연이 아니다. ‘욕’은 박탈당한, 하지만 그 박탈감을 공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만들어진 어떠한 혁명적 표현이 아니었을까. 그들의 언어가 이야기와 현실을 가로 막던 담벼락을 스물스물 넘어와 현장을 덮칠 때, 긴장은 폭발한다.
2.
‘자본’이 인간의 모든 것을 규정하는 시절. 이 시대의 <개미와 베짱이>는 자본주의 윤리지침서이다. “일하라. 미래를 대비하라. 부를 축적하라. 여유 부리지 마라!” 한 개인을 ‘호모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로 변모시키는 데에, 이만한 구호도 없다. 이는 베버가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밝힌, 자본주의 정신과도 흡사하다. 베버는 자본주의가 발전하기 위해선 특정한 ‘정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것도 개인 안에 개별적으로 속하는 정도가 아닌, 집단 내부에 속하는 사고방식으로서 성립되어야 한다. 즉 외적인 자본가-노동자라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뿐만 아니라, 노동자에게 혹은 기업가에게 자본주의 유지를 위한 내적인 ‘책임감’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마치 노동이 절대적 자기 목적인 것처럼 그에 매진하는 정신, 즉 노동을 ‘의무’로 보는 태도 말이다. 자신의 자본 증대를 자기 목적으로 삼는 것을 개인의 의무라고 보는 사상은 곧 ‘윤리’가 된다.
물론, 진즉에 승리를 거두어 무질서한 경쟁의 장으로 변모한 작금의 자본주의 시대에 베버의 ‘자본주의 정신’과 같은 정신적인 ‘지지’는 더 이상 필요 없을 듯하다. 구지 교육하고 강조하지 않아도, 우리는 자연스럽게 자본주의 정신을 체득하고 자본주의 사회에 녹아들어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심지어 대학교에서도 ‘자본주의’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으면서도 이미 자본주의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우리는 세계에 대해 필연적 지식을 가지고 있다. 지식은 경험으로부터 얻어진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칸트의 초월론적 철학을 완벽히 이해하고 실천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개미와 베짱이>를 읽자마자, 노동에 대한 열의만을 불사르고 있는 내 자신과 당신이 증명하고 있다.
헌데, 우리시대의 개미는 열의와 동시에 ‘불안’ 또한 불사르고 있다. 불안은 노동을 위한 최고의 ‘동력’이라 했던가. 겨울을 두려워하며 식량을 비축하고 있는 개미처럼, 우리 또한 미래를 두려워하며 노동에 몰입하고 있다. 아직 오지 않은 겨울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의 현실을 저당잡고 끝이 보이지 않는 “준비, 준비, 준비...”만을 반복하게 하고 있다. 때문에, 불안한 우리들에게 베짱이와 같은 삶은 꿈꾸는 것만으로도 사치일 수 있다. 우리는 무언가 ‘욕망’을 하지만, 더 이상 욕망해서는 안 됨을 알고 있다. 내 욕망이 아닌 타인의 욕망을 해야만 포만감을 느낄 수 있음을 알고 있다. 집단의 사고방식을 지배하는 그‘정신’에 내 정신을 의탁한 결과일 것이다.
비관적인 이 글의 끝에, 가라타니 고진의 메시지를 달며 나름 희망적으로 마무리하겠다. “정신이란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사유’가 아닌 것이다. ‘정신’이란 ‘사유’또는 ‘생각’하는 일이 한 공동체의 시스템에 속해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는 것이다 영민하게 사고하면서, 그러나 그것이 공동체의 관습에 따른 사고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하는 것이 바로 ‘정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