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똥 민들레 그림책 1
권정생 글, 정승각 그림 / 길벗어린이 / 199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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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21 수요인문강좌 리뷰]

유년시절, 동화를 어쩌다가 읽게 되었을까. 친구들과 신나게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따분하게 생긴 사각의 책을 내 스스로 펴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군가 읽어 주었던 것 같긴 한데, 어머니였을까. 선생님이었을까. 어찌됐든, 나는 눈으로 그림을 보며 귀로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잠자코 앉아있었고 그의 이야기는 항상 아름다운 교훈과 함께 마무리 됐던 듯싶다. 그리고 그 시절 들었던 이야기와 메시지는, 지난 몇 년 동안 내가 겪은 성장의 풍파 속에서도 변함없는 목소리를 유지하며 그 시절의 울림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내 안에 아직도 순수한 동심의 세계가 남아있었다니.  


이렇게 자신의 순수함에 대해 경탄을 하고 있을 때 김민웅은 조곤조곤하게, 마치 구연동화 하듯이 우리에게 말한다. “당신은 타인에 의해 동화를 학습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동화를 생각하면 꼬리표처럼 달라붙는 동화의 ‘교훈’. 예컨대, 양치기 소년(X)=거짓말 하지 말자(X') 라는 수학 공식과 같은 사고 말이다. 우리는 동화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자발적인 ‘독서’를 통하여 파악했을까? 아니면 타자에 의한 ‘교육’의 과정을 통해 학습 했을까? 아마 후자에 가깝지 않을까 한다. 그 시절의 이야기를 ‘정답’으로 생각하며, 그 후에 단 한 번도 동화책을 펼쳐보지 않았던 자신의 자화상을 그려보도록 하자. 머리가 커질수록 동화 속 이야기는 멀어져만 간다.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이미 동화의 정답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저 이야기는 너무 뻔하고 쉬운 이야기야.” 옆구리에 두꺼운 철학책을 낀 우리는 동화가 못 다한 이야기는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확신의 함정’ 주변을 기웃거린다. 이러다 함정에 빠진 이들을 위해 김민웅은 홍세화의 ‘생각의 좌표’를 통해 함정에서 탈출할 수 있는 최소한의 활로를 열어주려 한다. 김민웅의 방법은 간단하다. “의문을 가지고 질문을 하세요.”  


김민웅은 <강아지 똥>을 향한 우리의 의문과 질문을 요구한다. 곧 우리는 사방에서 둘러싸 34페이지의 예쁜 그림동화책을 공격하는 만행을 자행한다. 아니, 책을 공격 한다는 표현보다는 책을 향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공격한다는 것이 적절할 듯하다. <강아지 똥>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 “이 책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강아지 똥이 민들레를 피워내는 데 소중한 거름이 된다는 이야기를 통해 생명과 자연의 가치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런 이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생각하다가도 자신의 존재 가치를 발견하는 경험을 할 때 자기를 사랑하게 되고 생명의 소중함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 어린이들도 <강아지 똥>의 이야기를 통해 자연을 사랑하고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출판사 책 소개에 실려 있는 위의 글은 <강아지 똥>이 전하고자 하는 모든 이야기가 담겨있는 <강아지 똥>에 대한 일반명제처럼 여겨진다. 우리에게 <강아지 똥>은 언제든, 어디서든 항상 위와 같은 이야기를 하는 책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김민웅은 <강아지 똥>의 결말에 큰 물음표를 제시한다. 타자의 규정(더러워, 쓸모없어)에 의해 끊임없이 수동적으로 살아가던 강아지 똥이 마지막에는 민들레의 거름이 되어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깨닫게 된다지만, 결국 민들레 거름이 되는 과정에서도 민들레의 “나의 거름이 되어 주지 않겠니?” 라는 요구에만 응했을 뿐, 스스로 “내가 거름이 되어 줄께”라는 주체적 의사표현이 없었다는 점이다. 나의 가치를 규정하는 마지막 단계에서 조차 강아지 똥은 타자의 욕망에 부응하는 모습을 보인다. <강아지 똥>은 존재 가치를 발견하기 위한 긴 여정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의 ‘비주체성’이 끝끝내 극복되지 못한 채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타자의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 이야기? <강아지 똥>은 더 이상 당연하고  뻔한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양치기 소년과 늑대>는 어떠할까. <양치기 소년과 늑대>에서 정말 양치기 소년만이 악역이며, 이솝은 “거짓말 하지 말자”를 강조하기 위해 이 이야기를 썼던 것일까? 그렇다면 잦은 오보에도 불구하고, 양치기 소년에게 어떠한 제재도 가하지 않은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볼 것인가. 양의 생명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던 사람들이지는 않았을까. 어쩌면 이솝은 마을공동체의 무책임함을 폭로하기 위해 이 동화책을 썼던 것일 수도 있다. 이처럼 김민웅은 동화를 둘러 싼 고착화된 고정관념이라는 단단한 외피들을 벗기기 위해, 우리에게 의문을 가지고 질문을 하라 요구한다.  


김민웅의 요구는 '지금 여기'에서도 유효하다. 라캉은 현대 사회의 구성원들을 ‘안다고 가정된 주체(subject supposed to know)’들로 설명한 바 있다. 라캉에 의하면 우리는 내 감정과 믿음을 발동하는 내적 상태를 떠올리지 않은 채 외부의 감정과 믿음을 내 것으로 만드는 전도된 과업을 수행한다. 학교와, 미디어가 알려주는 사실들을 ‘진실’로 승격시켜 “이미 알고 있다.”라는 착각에 빠진 우리들에게 김민웅은 <강아지 똥>을 손에 쥐어 준다. 그는 옛 시절의 동화책을 다시 한 번 펼쳐 줌으로써 우리가 어디서부터 질문을 해야 하는 지에 대해 이야기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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