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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치는 여자 - 2004 노벨문학상
엘프리데 옐리네크 지음, 이병애 옮김 / 문학동네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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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두 피아노 선율이 교차한다. 하나는 부드럽고 강렬하게, 다른 하나는 차갑고 약하게. 엉겨붙다 떨어지고, 결을 따라 흘러가다 미끄러지기를 몇 번, 결국 두 개의 선율은 서로의 음계를 나눠갖는다.

  어릴 적부터 주욱 어머니의 보호, 감시를 받아 온 30대 중반의 피아노 선생 에리카에게는 제대로 된 현실감각이 배양되어 있지 않다. 그녀는 옷을 고를 때도, 연주를 할 때도 어머니의 간섭을 받아야 했고, 어머니가 정해놓은 시간에 늦지 않게 귀가해야 했으며 심지어 잘 때도 어머니와 한 침대를 써야 했다. 이처럼 어머니에게 묶여 옴짝달싹 못하는 에리카, 그녀는 가끔 면도칼로 자해를 한다. 마치 자신과 강하게 결속되어 있는 어머니를 잘라내듯이, 그녀는 "원래 갈라져야 할 곳이 아닌 곳을 잘라내 신과 어머니가 기묘한 합의 하에 붙여놓았던 것을 갈라놓는다."

  에리카의 제자인 클레머는 어느 때인가부터 에리카를 남몰래 연모하기 시작한다. 그는 카누를 좋아하고 음악에도 열심인 청년이다. 그는 "인간은 현실에서 손을 떼고 감각의 세계로 가야 비로소 자신의 최고 가치에 도달할 수 있다는" 식의 말들로 에리카를 몇 번씩 유혹한다. 늘 싸늘하게 클레머를 대하던 그녀는 어느날 클레머를 유혹하는 또래의 어린 여학생에게 깨진 유리조각으로 경고함으로써 자신도 클레머를 사랑하고 있음을 드러내 보인다.

  이처럼 에리카가 현실에 참여하는 방식은 비뚤어져 있거나 간접적이다. 예컨대, 포르노샵에서 뭇 남성들의 정액이 묻은 휴지냄새를 맡음으로써 또는 어두운 밤 공원 한구석에서 짝짓기 하는 남녀를 몰래 관찰함으로써 그녀는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킨다. 또 그녀는 '오직 폭력이라는 조건 하에서만' 클레머가 자신을 획득할 수 있다고 믿으며 편지를 쓴다. "힘껏 따귀를 때려줘! 그러지 말라고 빌어도 들은 척도 하지 마. 외치는 소리도 따르지 마. 어떤 애원에도 귀 기울이지 마. 우리 어머니는 신경쓸 것 없어!"

  그녀는 자신에게 폭력이 퍼부어지기를 원하지만, 그 때문에 고통 받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편지 중 "그렇지만 너무 심하게 다루지는 마"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그녀의 욕망은 마조히즘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어린아이의 유치한 복수심에 가깝다. 클레머에게 폭력을 요구하는 것은 그의 손을 빌려 자해함으로써 어머니에게 고통을 주고, 복수의 쾌락을 느끼려고 하는 행위이다. 다른 많은 장소를 제쳐두고 어머니와 늘 함께 있는 아파트에서 폭력을 요구하는 데에서 이러한 심정은 보다 잘 드러난다.

  편지를 꼼꼼이 읽은 클레머는 에리카를 더이상 사랑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럴 만한 품위가 없기 때문이다." 욕망의 주인과 노예의 관계는 역전되고, 에리카는 마침내 노예로 전락해 버린다. 노예가 된 에리카는 이후 몇 번 클레머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조소와 경멸 뿐이다. 어느날 밤 클레머는 에리카의 집에 찾아가 어머니를 가둬놓고 에리카를 때린다. 에리카는 폭력의 실체를 보자마자 기겁해 버리고 두 눈을 질끈 감음으로써 제 현실과의 대면을 피한다. 욕망의 주인이 된 클레머는 마음껏 폭력을 행사하고 강간한 후 떠나가며 이렇게 말한다. "봐, 바로 이런 일이 벌어지잖아."

  혼자가 된 에리카. 과연 그녀에게 남겨진 것은 무엇일까. 한 인간에 대한 증오, 세상에 대한 염오일까, 아니면 덧없는 인간사에 대한 환멸일까. 적어도 하나만은 확실해 보인다. 에리카는 혼자가 될 수 없다는 것,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는 죽을 때까지 어머니와 떨어질 수 없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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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송어낚시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리차드 브라우티건 지음, 김성곤 옮김 / 비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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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집어 들고는 단숨에 다 읽었다. 재미가 있다거나 스토리 전개가 흥미진진해서였던 건 아니다. 단지 '미국의 송어낚시'가 의미하는 바를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는 부분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책에는 그런 부분이 없었다. '미국의 송어낚시'는 그저 미국의 송어낚시일 뿐이었다.

  <미국의 송어낚시>는 수많은 메타포로 직조된, '작품해설'이나 '작가 인터뷰'를 읽지 않고는 무슨 내용인지 좀처럼 파악되지 않는 소설이다. '사라진 꿈과 희망을 찾기 위해 떠나는 송어낚시 여행'이라는 활자가 버젓이 책의 표지를 장식하고 있지만, 읽으면서 한쪽 손가락을 '보충설명'에 끼워놓았을 정도로 내용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흐릿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는 건, 작가-주인공이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그게 유년의 아련한 기억이든지 혹은 현대사회에 가려진 자연의 생명력이든지, 어쨌든 우리는 무언가를 잃어버렸고 그로 인해 황폐, 상실, 파괴라는 단어와 맞닥뜨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꼽추 송어'의 이야기에서 잘 나타나 있는데, 주인공은 어느 날 송어낚시를 하다가 '혹이 달린 12인치나 되는 무지개 송어' 한 마리를 낚게 된다. 그 송어는 엄청난 힘으로 저항하다가 곧 주인공에게 포획되고, 결국 그날 저녁 반찬으로 요리된다. "옥수수 가루로 싸고 버터를 발라 프라이한 그 혹은 마치 에스메랄다의 키스처럼 달콤했다." (p. 122)

  황폐화된 현실에서 기형적으로 탄생한 송어는 엄청난 생명력을 갖고 있다. 현대 기계문명이나 자본주의로 인해 파괴된 자연은 망가지고 더러워졌지만, 그 본연의 생명력 또는 복원력을 아직도 유지하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꼽추 송어'의 혹을 정성스레 요리한 주인공에게 그 맛은 달콤할 수밖에 없으리라.

  수많은 메타포, 난해한 전개, 실험적 형식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송어낚시>는 이처럼 분명한 메시지를 남긴다. 또한 작품 전체에 녹아있는 쓸쓸함, 상실감은 이러한 작가의 주장에 서정성을 부여한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한데 모여 '미국의 송어낚시'를 정의하는 듯 보인다. 작가 자신이 '미국의 송어낚시'가 무언지 모르겠다고 밝힌 것처럼 , 독자 역시 그것이 무언지 알 수 없다. 다만 '미국의 송어낚시'는 미국의 송어낚시일 뿐이라는 것 외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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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터베리 이야기
제프리 초서 지음, 송병선 옮김 / 책이있는마을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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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울리지 않는 온갖 재료들이 버무려진 짬뽕이랄까. 그저 맵기만 하고 맛은 없는 짬뽕을 먹은 것처럼 책을 읽은 후 입맛이 텁텁하다.

  <캔터베리 이야기>에는 온갖 이야기들이 섞에 있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부터 중세의 민담까지, 이 23개의 이야기들은 기독교와 기사도의 색채로 덧칠되어 있다. 그리스, 로마의 영웅들이 마상시합을 벌이고, 심지어 칭기즈칸 시대의 몽골 전사들도 기사도적 양식에 물들어 있다. 초서는 프로크루스테스가 되어 활자와 말을 통해 떠돌던 이야기들을 중세적 사고와 관습에 맞게 재단한다.

  이처럼 <캔터베리 이야기>는 그 시대의 유럽중심주의를 짐작케 하는 단초로서도 기능하지만, '바스의 여인의 이야기'에서처럼 그 시대의 자유분방하고 쾌락적인 삶의 표현에도 관심을 두고 있다. "하느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틀림없는 것처럼 내가 사랑을 하는 데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에요. 나는 상대의 피부가 까무잡잡하든 하얗든, 키가 작든 크든 가리지 않고 항상 내 욕망만을 따랐답니다. 내 마음에 두는 사람이라면 가난하든 부자든 전혀 개의치 않았어요." (p. 238) 물론, 이를 여성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거나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상승되었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사회의 일반적인 분위기, 자유로운 성문화와 쾌락을 지향하는 심성이 음울한 종교관 및 세계관과 더불어 공존했다는 사실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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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가을 우리 시대의 고전 1
요한 호이징가 지음, 최홍숙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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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장 읽다가 책장에 고이 모셔둔 책인데, 다시 보니 감회가 새롭다. 습기 때문에 페이지 곳곳이 우글쭈글해져 있고 누렇게 변색된 곳이 한둘이 아니다. 그간의 세월이 고스란히 녹아있어서인지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묵직한 무게감이 손가락 끝에 남는다.

  호이징가는 중세를 흐릿한 거울의 시대로 보고 있다. 세계 속에는 이미지들이 넘쳐나고, 상징, 알레고리는 논리적, 객관적 사고를 압도한다. "쇠퇴 일로의 중세적 사고는 이미지들의 범람 속에 와해될 지경이었고, 이미지들의 범람은 거대한 상징 체계 속에 각 형상들에 제 위치를 차지하도록 모든 것을 포괄하지 않는 한 한낱 무질서한 환각에 불과했을 것이다." (p. 247) 중세인들은 사물과 자연, 그리고 인간을 거대한 상징체계에 대입하여 이해하려 했다는 것이 작가의 설명이다.

  논리는 성경, 전례, 관습적인 명제로 시작하여 엉뚱한 결론으로 끝나기 일쑤였고, 상징으로 이루어진 사물간의 연결고리는 그 자체로 무한한 관계망을 생성했다. 반대로, 성자의 유골들은 광신을 불러일으키고, 죽음과 행운 등은 의인화 되어 묘사되었다. 이처럼 구체적인 어떤 것들이 이미지화 되는 과정을 겪은 것과는 달리, 신, 혹은 신성한 것들은 사물화, 일상화 되어 이해되었다.

  고통과 열망, 참회와 분노, 눈물과 웃음이 빛과 어둠처럼 극단적으로 채색된 사회, 한편으로는 가난과 죽음에 대한 공포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축제와 희극을 몸으로 실천한 인간들, 또 신비주의가 치닫는 광포한 질주를 막는 최후의 보루로서의 교회, 이런 것들이 중세를 이해하는 단편을 제공하는 것이 아닐까.

  흥미로운 구절 발견; 교회는 왜 늘 과도한 신비주의를 두려워했는가?

  "그것은 교회의 모든 개념과 교리들과 성사들이 형식 및 이미지들과 더불어 엑스타시의 불길에 타버릴 위험 때문이었다. 그런데 신비적 열광의 본성 자체가 교회에 대해서는 일종의 비호를 함축하고 있었다. 엑스타시의 명정에 도달하고 형식과 이미지들이 없는 높고 고독한 명상의 경지를 배회하며, 유일하고 절대적인 원칙과의 합일을 맛보는 것, 그것은 신비론자에게 있어서는 단지 일순간의 은총에 불과했다. 높은 곳으로부터 다시 내려와야 했다. 극단주의자들이 몇몇 길 잃은 자녀들을 데리고 범신론과 지나친 괴벽 속을 방황했는 것은 사실이다. 반대로 다른 사람들, 그들 가운데는 대신비론자들도 볼 수 있는데, 그들은 늘 예전 속에 슬기롭게 배합한 신비 체계들을 가지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교회를 되찾았다. 교회는 늘 신비적인 영혼들에게 안전하게 개인적인 과도함의 위험 없이, 주어진 순간에 신성한 원칙과의 접촉에 들어갈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였다. 교회는 신비적인 힘을 비축해두었고, 바로 그 점이 왜 교회가 교회를 위협하던 신비주의의 위험들을 이길 수 있었는가 하는 이유이다." (p. 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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