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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터베리 이야기
제프리 초서 지음, 송병선 옮김 / 책이있는마을 / 2003년 8월
평점 :
품절
어울리지 않는 온갖 재료들이 버무려진 짬뽕이랄까. 그저 맵기만 하고 맛은 없는 짬뽕을 먹은 것처럼 책을 읽은 후 입맛이 텁텁하다.
<캔터베리 이야기>에는 온갖 이야기들이 섞에 있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부터 중세의 민담까지, 이 23개의 이야기들은 기독교와 기사도의 색채로 덧칠되어 있다. 그리스, 로마의 영웅들이 마상시합을 벌이고, 심지어 칭기즈칸 시대의 몽골 전사들도 기사도적 양식에 물들어 있다. 초서는 프로크루스테스가 되어 활자와 말을 통해 떠돌던 이야기들을 중세적 사고와 관습에 맞게 재단한다.
이처럼 <캔터베리 이야기>는 그 시대의 유럽중심주의를 짐작케 하는 단초로서도 기능하지만, '바스의 여인의 이야기'에서처럼 그 시대의 자유분방하고 쾌락적인 삶의 표현에도 관심을 두고 있다. "하느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틀림없는 것처럼 내가 사랑을 하는 데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에요. 나는 상대의 피부가 까무잡잡하든 하얗든, 키가 작든 크든 가리지 않고 항상 내 욕망만을 따랐답니다. 내 마음에 두는 사람이라면 가난하든 부자든 전혀 개의치 않았어요." (p. 238) 물론, 이를 여성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거나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상승되었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사회의 일반적인 분위기, 자유로운 성문화와 쾌락을 지향하는 심성이 음울한 종교관 및 세계관과 더불어 공존했다는 사실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